나이 드니 옛 기억이 오히려 선명해져

이것은 이른바 '노년 소설'이다. "30 ~40대 작가들이 죽음에 대해 쓰면 멋지고 심각해요. 상상의 세계거든. 하지만 노년은 실제로 신체가 죽을 맛이에요. 내 지병이 대여섯 개가 넘으니 별별 색 알약을 먹습니다. 현실적일 수밖에 없죠."

소설가 최일남(85)씨가 13년 만의 단편집 '국화 밑에서'를 펴냈다. "'현역 최고령'운운하는 게 남사스럽다"고 하지만 나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록작 7편 모두가 노령에 대한 소설. 감상에 치우치는 대신 지적 유희와 매서운 자조를 선보인다. '젊은 사람이 동무 따라 강남 간다면, 늙은 사람은 죽은 친구를 장송할 때마다 내 차례가 멀지 않구나 다짐한다. 전자에는 모험과 희망이, 후자한테는 연민과 인멸의 냄새가 난다'(스노브 스노브)거나, '노년에 들면 마음이 너그럽고 사리 분별에도 밝다고들 하던데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리어 갈팡질팡 줏대 없이 구는 수가 많다'(밤에 줍는 이야기꽃)고 적었다.

80대가 보여주는 노년 탐구는 이미 60대에 낸 단편집 '아주 느린 시간'(2000)과 70대에 낸 '석류'(2004)가 이어온 한 갈래다. "늙으면 엊그저께 일은 까맣게 잊어도 서너 살 때 기억이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할아버지와 지새운 달밤 같은. 과거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지요." 거기에 상상을 덧댄다. 표제작 '국화 밑에서'는 어느 하루 장례식 두 곳을 가게 된 화자의 1인칭 대화록인데, 이 역시 경험담. "소설은 거짓말을 현실적으로 하는 거니까요."

최씨의 과거, 일제강점기의 기억도 자주 출몰한다. "중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어요. 학교선 일본말, 집에선 우리말을 썼죠. 일본 선생이 가끔 학생 옆구리를 쿡 찔러요. 자기도 모르게 '아야'라고 말하게 되잖아요? 그럼 '혼네'(本音·본마음)가 한국식이라고 매 맞던 세대였습니다. 일본어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서 비망록 적듯 썼죠. 그런 차별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최씨 특유의 토착어가 읽는 맛을 더한다. '개심심한 맛' '깨복쟁이' 같은 사투리. 2015년 '최일남 소설어 사전'이 나왔을 정도로 희귀한 입말을 구사하는 작가다. "고향이 전라도라 그쪽 사투리를 자주 써요. 재밌잖아요. 요즘엔 지역이 사라지고 표준어만 남은 것 같아 아쉽죠." 그는 소설에 '(사투리는) 깨끗이 씻어 새말에 곁들이면 섞어찌개 같은 맛'이 난다고 썼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최씨는 1953년 데뷔해 이상문학상·한무숙문학상 등을 받았다. 내년이면 데뷔 65주년. 오른쪽 귀가 성치 않고 말은 어눌해졌으나, 연마를 쉬지 않는다. "책 읽다 재밌는 표현이나 단어를 보면 꼭 적어둬요. 벌써 노트 몇 묶음 돼요." 그러기에 현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