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용사 국적찾기… 미국은 20년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21일 서울 용산 주한미군기지 나이트(Knight) 연병장. 푸른 유엔 깃발로 덮인 관 앞에 의장대 장병 여섯이 도열했다. 이들 손에는 태극기·성조기·영국 국기·유엔기·한미연합사령부기·주한미군기 등이 들려 있었다. 관에 들어 있는 유해는 '83○○'(정확한 숫자는 미공개)라는 네 자리 숫자 묘비명으로 부산 유엔군묘지 영국참전용사 묘역에 잠들어 있던 '무명(無名)용사'다.

6·25전쟁이 끝난 지 64년 만에 이름과 계급, 국적(國籍)을 확인하기 위해 바다 건너 미국 하와이로 떠나는 그를 위해 한국전 참전 혈맹국들이 마련한 송환식이었다. 주한미군 관계자는 23일 "무명용사의 국적을 찾아주기 위해 이미 안장된 묘역에서 유골을 다시 꺼내는 일도, 별도로 송환식을 연 것도 모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83○○' 용사는 19년 전인 1998년에 휴전선을 건너왔다. 북한 쪽 6·25 격전지에서 유골이 수습돼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에 인계됐다. 그러나 당시의 감식 기술로는 구체적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수습 지역의 전황으로 미루어 영국군 소속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됐다. 그래서 '영국군 추정'이라고 국적이 분류된 '83○○' 용사는 884명이 잠들어 있는 부산 유엔군묘지 영국군 무명용사 묘역에 안장됐다.

그러나 DPAA는 '83○○' 용사가 영국군이 아닌 미군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영국 정부에 신원 확인을 위한 하와이 본부 신원감식센터 이송 가능성을 타진했다. 한국전 참전 미군 중 생사 불명으로 처리된 사람은 7700여명에 이르고, 이들 대다수가 북한의 6·25 격전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미국 측 의사를 전해 들은 영국 정부는 흔쾌히 동의했다. 미·영 두 나라 관계자들은 19년 전 부산 유엔군 묘역에 안장된 유해를 조심스럽게 꺼내 관에 싣고 서울로 운구했다.

DPAA는 유전자 감식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해 6·25전쟁을 비롯해 베트남전과 2차 대전 참전 군인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이 기관의 모토는 '용사들을 귀가시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 '나라가 한 약속은 지킨다(Fulfilling Our Nation's Promise)'이다. '83○○' 용사는 통상 DPAA가 신원 확인에 나선 실종 군인들과는 사정이 다른 특수한 경우다. 이미 남의 나라 군인으로 분류돼 안장식까지 마친 데다가 안장된 유해를 묘지에서 꺼내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감식단 지원 예산이 매년 감소하고, 국군 전사자 예우에 대한 인식도가 매우 낮은 것과 대조된다.

지난 21일 송환식에는 한국·영국·미국을 비롯한 유엔사 소속 장병들이 대거 참석해 무명용사를 극진히 예우했다. 성조지에 따르면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 존 크레이츠 DPAA 부국장(해군 소장), 찰스 헤이 주한 영국 대사 등이 연단에 올라 참전용사의 넋을 기리고 참전 혈맹국들의 협력과 우의를 강조했다. 헤이 대사는 "전사한 군인들의 국적과 신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동맹이자 친구로서 영국에 주어진 책임"이라고 했다. 영국 역시 6·25에 참전했던 295명이 행방불명된 상태다.

묵념에 이어 의장대가 공포탄 21발을 쏘아 올리고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것으로 송환식은 마무리됐다. 관에 누운 용사는 도열한 각국 장병들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리무진 차에 올라 DPAA 본부가 있는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무명용사의 국적과 신원이 최종 확인되면 그는 한국으로 떠난 지 60여년 만에 비로소 고향 땅에 잠들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