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극장가, 하정우와 하정우가 맞붙는다

"철없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처음엔 뿌듯했죠. '연말에 술 약속도 못 잡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올 연말 극장가에서 배우 하정우(39)는 하정우 자신과 경쟁한다. 20일 개봉하는 '신과함께'에서 저승 차사 역을 맡은 데 이어, 27일 개봉하는 '1987'에서도 '최 검사' 역을 맡은 것이다. 최대 2000만 관객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는 연말 극장가에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두 영화의 포스터가 나란히 걸린다. 그는 "철없는 생각도 잠시뿐, 지금은 '연속으로 걸리는 두 작품이 서로 피해 주지 않아야 할 텐데…'라는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고 했다.

'신과함께'는 주호민의 인기 웹툰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 하정우는 망자(亡者)들을 저승으로 데리고 오는 차사 역을 맡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을 다룬 '1987'에서는 시신 부검 절차를 정식으로 밟겠다고 고집하는 검사 역할로 출연했다. 자신의 출연작 두 편이 나란히 개봉하는 것도 1998년 데뷔 이후 20년 만에 처음이다. 2012년 영화 '범죄와의 전쟁'과 '러브픽션'이 한 달 간격으로 개봉한 적은 있다. 그는 "지난해 5월부터 '신과함께'를 1년간 촬영한 뒤 올해 4월부터 '1987' 촬영에 들어가서 겹친 기간은 없었지만 쉴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

저승을 다룬 판타지 '신과함께'와 30년 전 서울 배경의 시대극 '1987'은 장르적 성격부터 판이하다. 그는 "컴퓨터 그래픽이 많은 판타지는 실제 배경이 아니라 세트 장치에서 허공에 대고 말하듯이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맨바닥에 헤딩'하거나 '벽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반대로 '1987'은 촬영을 끝낸 직후 무대 인사를 할 때마다 조심스럽다고 한다. "당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유가족과 추모 단체에서도 관람하러 오셨는데, 차마 '즐겁게 관람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어서 조용히 고개 숙여 인사만 드렸죠."

그는 두 작품을 연이어 촬영하면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신과함께'는 가보지 못한 저승 세계를 상상하면서 연기하다 보니 과거에 어떤 죄를 짓고 살았는지 돌아보게 되죠. '1987'도 30년 전 시대 상황을 떠올리다 보니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는 오늘날에 감사하게 되고요."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과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는 뜻이다.

'신과함께'는 살인·나태·거짓·불의·배신·폭력·천륜 등 7가지 지옥의 심판을 거쳐야 한다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하정우는 "일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편이라 나태와 살인이야 피하겠지만, 나머지 심판은 통과할 자신이 없다"면서 웃었다. 두 영화가 차례로 개봉하고 나면, 이르면 다음 달에는 '월식'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촬영 중간에 한 주라도 짬이 나면 부지런하게 사람들도 만나고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다닌다"고 했다. 염라대왕이 그를 나태의 지옥에 빠뜨리고 싶어도 빠뜨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