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서 입신양명을 이룬다면 왕족이 아닌 이상 정승판서가 그 정점이다. 말이 쉬워 정승판서로 심지어 각설이 타령에도 등장하고 있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그 자리에 오르기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정승판서를 지낸 조상을 둔 후손들은 집안 대대로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판서가 여덟이 살았다는 종로구 삼청동 부근 팔판동은 양택의 자리로 더할 나위 없는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반대로 아홉의 정승 묘소가 모셔진 양평군 양서면 자락의 구정승골 또한 풍수적 요소를 찾아보려는 수많은 풍수지리 학인(學人)은 물론 문화유산 탐방객이나 역사학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을 비롯하여 증좌의정 신효창, 증우의정 이종억, 증영의정 이민성, 영의정 이덕형, 증영의정 이수정, 영의정 이준경, 영의정 정창손, 좌의정 민희와 대제학 민점, 우의정 민암 형제 등의 묘소가 모셔진 곳이다. 실제로 세다보면 9정승이 아니라 10정승도 넘어간다. 이는 최근 들어 이곳으로 이장(移葬)한 분도 계시거니와 굳이 아홉이냐 열이냐를 따지기 보다는 그만큼 많은 고관대작의 음택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공은 또한 문신이었으나, 태조 5년(1396)에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마도와 이키섬을 정벌하였다. 이는 공양왕 때의 박위 장군에 이어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이었다. 이후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의 정벌 등 모두 세 번에 걸친 대마도 정벌 역사가 있었으나,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만 알려졌을 뿐 그 전에 있던 두 번의 정벌은 그 과정과 결과가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별개로 정승에 재직하는 동안 조준(趙浚)의 의견에 따르며 그를 지원했을 뿐이라는 일부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하여 고전번역에 조예가 깊은 이한우 씨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정도전을 뛰어넘은 행정의 달인 김사형'이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조선 초 정승을 열거할 때 조준(趙浚), 하륜(河崙)은 알아도 김사형(金士衡)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태조 정권 내내 최고의 실권자인 좌의정 또는 좌정승이 조준이었다면, 그와 보조를 맞춰 내내 우의정 혹은 우정승으로 있던 이가 김사형이다.
흔히 3정승이라고 한다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인데 일반적으로 셋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실력자는 영의정이 아니라 좌의정이다. 시대에 따라 혹은 임금에 따라 아주 드물게 영의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실권은 좌의정에게 있었던 것이 조선시대 대부분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정치를 살필 때 좌의정이 누구인지부터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고려 때의 명 장군이자 충신으로 문무(文武)를 함께 갖췄던 재상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여말선초의 명문세가 출신이다. 사형은 공민왕 때에 문과에 제하여 조준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이때 맺은 교분으로 그의 정치노선은 단 한 번도 조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조준을 섬긴 때문이 아니라 조준의 노선이 옳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1407년(태종7) 7월 30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盛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 할 때부터 운명할 때 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善始令終)이 이와 비교할 이가 드물다“
그는 무엇보다 관리로서의 능력(史才)이 출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맹점은 이처럼 이재(吏才)가 뛰어났던 경세가들을 소홀히 한다. 그저 책이라도 남기면 그것을 갖고 일방적으로 높이는 경향을 보인다. 학재(學才)만 높이는 편향성 때문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다보니 황희나 김사형처럼 행정실무 능력이 특출 나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베푼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 하나 찾아보기 힘든 것이 그 반증이다. (中略)
탁월한 실무능력과 분수를 아는 처신은 그를 우정승에 그치게 하지 않았다. 조준과 김사형의 관계를 실록은 이렇게 압축해서 정리하고 있다.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을 전단(專斷)하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廟堂)을 진압했다." 흔히 말하는 환상의 콤비였던 셈이다. 태종 초에는 드디어 좌정승에 오른다. 이미 왕권 중심의 정치를 구상하고 있던 태종으로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할 때 김사형의 지혜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태종의 최측근인 하륜에게 좌정승 자리를 넘긴다.
태조부터 태종 때까지는 조선을 창업(創業)하고 수성(守城)해야 하는 험난한 시기다. 난세를 척결하는 영웅이나 선봉에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공신도 필요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백성을 향한 민생정치의 세심한 부분을 챙기는 숙달된 행정가가 절실하게 필요하였을 터이다. 그중 익원공 김사형은 명실상부한 내치(內治)의 전권을 행사하며 왕조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였다. 조선 창업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뚜렷이 기록되었음에도 세인들에게 알려지기는 덜한 듯 하여 조금은 아쉽던 차에 이렇게 계속 행적을 발굴해내는 사가(史家)들이 있어 다행이다.
공은 태종 즉위 후 좌정승에 올랐으며 특히 태종 2년(1402)에는 이무, 이회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지도이자 동양 유일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만드셨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미국에, 사본은 일본에 분산되어 있고 우리나라는 겨우 모사본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