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봄 혹은 여자가 있는 하얀 풍경

    입력 : 2018.04.16 10:18

    겨울을 막 빠져나온 벚꽃은 전철 안에선 순간마다 하얬다. 창에 부딪히는 빛은 모두 하얀 봄빛이었다. 하얀 블라우스를 얇게 입고 앉은 여자의 손등에서 하얀 소리가 났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마주 잡은 하얀 손톱이 유난히 반짝인다. 발목을 감싼 하얀 양말, 또 하얀 운동화, 그리고 짙은 분홍 신발 끈, 모두 새로 신은 듯. 아, 맞다. 흰 주름 스카프며, 목련을 꽂은 흰 핸드백도. 새것만 몸에 걸친 하얀 여자는 하얀 막대 박하사탕을 물고 있었다. 사탕과 입술 틈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하얀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짧은 옷이 어울려 난. 누가 나를 보고 있을 거야. 맘껏 보라지 뭐. 그들 즐거울까? 호호, 나도 즐거워. 내 이 즐거움이 계속 하늘로 올라간다니까. 짧아 가는 나의 치마처럼. 그대들이 볼 남은 나의 시간을 세어 보았지. 아무리 오래 헤아려 봐도 어제보다 더 줄어들었어. 그러니 줄어드는 시간만큼, 짧은 치마를 입어야지! 맞아, 호호. 내가 누군지 끝까지 봐달라며!

    가슴도 더 드러내고 싶어. 내 늘씬한 다리만 보지 말고 내 가슴을 더 보아주었으면 좋겠어. 예쁜 색을 골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가슴을. 눈은 찡그리지 마. 살짝 뜨고 반갑게 보아줘. 가슴 빛 때문에 조금 눈부실 수도 있지만, 내 가슴에 남은 시간을 세어줘. 지난 시간은 결국 잃어버린 거야. 찾지 못하니, 남은 시간 셀 때는 맨 끝에서부터 세어줘. 가까울수록 세면서 더 웃을 수 있을 테니.

    조선일보DB
    아, 어쩌지? 누가 나를 가졌으면 좋겠어. 시간시간마다 가슴에 피는 내 이 하얀하얀 꽃을. 내 꽃 송이송이 꺾어주면 좋겠어. 누가 나를 가져가도 좋아. 옷깃을 살짝 열고, 날 깊이 보고 싶어. 그대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내 가슴을 보고 싶은 버릇을 어찌 숨길 수 있겠어? 채우고 싶어. 그대들이 한 움큼 보이는 곳마다 떼어간 가슴엔 더 하얀 꽃들로 말이야. 이번엔 허리에 맨 까만 띠와 장식을 보고 있군. 예쁘지? 이건 나도 못 풀어. 비밀번호를 잊었거든.

    이 허리띠는 마지막 나의 꽃을 꺾는 그대에게 줄 선물일지도 몰라. 오래 묻혀놓은 나의 향기와 나의 시간과 나의 눈물이 섞여 물든 나의 모두야. 아마 그대는 허리 대신 그대 목에 감고 싶을지도 몰라. 아니 그랬으면 좋겠어. 숨을 쉴 때마다 목이 아마도 메게 말이야. 목이 메어 며칠 잠이 못 들 즈음이면, 그것은 그대만을 위해 기다리던 나의 생명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러면 비밀번호가 없어도 풀린다니까.

    참, 나를 보이는 시간이 많이 흘렀네? 내 시간은 빨리 흐르거든. 그대들 느낌을 순간마다 여러 번 느끼고 싶어서지. 그러니, 내 시간은 빨리 흘러. 빠르게 흐른 만큼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그대들 마음을 내 마음껏 들락거리다 보면 좋아지는 거야. 그대들도 내 마음을 여러 번 들락거려 봐. 저절로 웃음이 날 거야. 그것도 하얗게. 하얀 웃음이 최고거든. 물론, 그러다 시간이 고개를 휘휘 돌리다가 땅바닥에 납작 기어 다니기도 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웃거린다니까. 호호, 할 일 없어서 그래.

    호호, 뭐 그렇지 뭐. 이제, 고개 돌리는 일도 지치는군. 가슴을 열어제끼거나 짧은 치마를 예쁘게 올리는 일도 지쳤어. 하얗게 남은 말들도 점점 시들어 가. 내 시간 세는 일이 점점 느려지는 거지. 남은 나의 시간이 하나둘 세어질 때마다 가슴도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져. 검은 허리띠도 하얗던 가슴도 어쩔 줄 모르고 있군. 뭐, 함께 시드는 거지, 호호!

    아, 그렇군. 다시 시작해야 할까 봐. 눈을 뜨고 가슴 사라지는 것을 보는 일을. 더 치마를 짧게 입고, 가슴을 더 열어야겠어.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말이야. 나는 누가 나를 보고 있지 않으면, 보고 있지 않다고 느껴지면, 더욱 심심해진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더 심심해할 것 같아서 그래. 심심하니까 사람은 어떤 일이든 시작하나 봐. 다시 봐달라고 말이지. 호호, 살아져야 하니까. 그럴까? 그게 새로운 걸까? 그래야 심심하지 않은 걸까?

    하얀 여자가 말을 남기고 떠난 전철 빈자리에 외로운 향기가 났다. 전철 소리를 칼날로 베는 소리만큼이나 외로운 향기. 섣불리 가슴을 드러내지 마시게. 애써 마음 바닥을 보이지 마시게. 마음껏 내 것을 자르고 잘라 나누어 주지 마시게. 홀로 태어나 홀로 견디다 홀로 사라지는 우리들이니까. 마지막 내 바닥은 나만 보고 가야 하니까. 오늘은 내 구름이, 내 입에 눈에 손등에 머리에 머물지 않았다. 전철 안을 맴돌다, 하얀 여자 박하사탕 향기 따라 지나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