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번째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답사기(2-1)

    입력 : 2019.07.15 13:02

    두 번째 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蘫溪書院)

    조선의 두 번째 서원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중종 38) 세운 백운동 서원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은 7년 뒤인 1550년(명종 5)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명종 임금의 친필(御筆, 어필) 현판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 뒤를 이어 1552년(명종 7) 두 번째 서원이 건립되니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蘫溪書院)이다.
    이 지역 유학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개암 강익이 주동하여 유림과 당시 군수 윤확시가 세웠으며 1566년(명종 21) 사액 받아 조선에 두 번째 세워진 사원이자 두 번째 사액서원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03년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였으며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추가 배향하였다. 별사에는 유호인(兪好仁)·정홍서(鄭弘緖)를 배향했다가 1868년(고종 5)에 별사를 없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 하나이며, 1974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9곳 서원중 하나이다.

    두 번째 서원의 진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의 두 번째 서원은 해주 문헌서원(文憲書員)이다. 풍기군수를 마친 주세붕이 잠시 내직을 거쳐 1549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이때 해동공자로 불리던 유학자 최충을 기려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웠으며 이듬해에는 문헌서원(文憲書員)으로 사액을 받으니 소수서원에 이어 주세붕이 세운 사실상 조선의 두 번째 서원이다.

    문헌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해방 후 남북 분단으로 현재 상태는 알 수 없다. 다만 해주 최씨 문중에서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1991년에 오산시에 문헌서원을 복설(復設)하고 최중과 아들 최유선, 최유길을 배향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남계 서원에 모셔진 정여창 선생은 동국 18현이며 조선조 5현으로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받들어 모시고 있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다.

    8세 때 의주 판관 아버지(정육을)를 수행하니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그의 비범함을 보고 ‘집안을 창성하게 할 인물’이라 칭송하며 이름 백욱(伯勗)을 여창(汝昌)으로 바꿔지어 주었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 문하에서 수학,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한 달간 전쟁터를 뒤져 시신을 찾아 예장하였으며, 세조의 특명으로 부친 벼슬인 의주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그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한때 연산군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김일손 사초/김종직 조의제문) 때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54세로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두 달에 걸쳐 함양으로 옮겨와 장사 지냈다. 갑자사화로 김굉필이 사사될 때 부관참시되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남계서원(蘫溪書院)
    사액으로 받은 이름 ‘남계(蘫溪)’는 서원 앞을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현재는 남강으로 부르는데 안의에서 흘러내려온 남강 줄기는 서원 앞을 지나 산청, 진주로 내려가며 낭만적인 이름과는 달리 서원과 하천 사이로 3번 국도가 놓이고 서원 바로 앞으로는 지방도로가 하나 더 지나가니 사실상 서원 앞 풍광은 다소 삭막하다.

    남계서원 전경. 앞쪽으로 하마비와 홍살문이 서 있고 너른 마당을 지나 평지에 서원이 자리 잡았다. 다만 지형상 이유로 뒤쪽의 사당은 높이 올라앉았는데 엄숙하며 안정된 모습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서원의 오른쪽에는 안내소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는데 나뭇그늘이나 그늘막 하나 없어 한여름 뙤약볕에는 탐방객들이 쉴 만한 공간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서원 앞쪽이 삭막하고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만큼 그에 걸맞게 주변 정리가 되면 좋겠다.
    정문을 겸한 누각 풍영루(風永樓), 창건 당시에는 누각이 아니라 삼문 형태의 외삼문이었으며 준도문(遵道門)이라 하였는데 후에 이층 다락을 올려 누각이 되었다. 병산서원 등 대부분의 서원들이 누각을 차단하고 오르지 못하게 하는데 남계서원은 누각을 개방하니 참 좋았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풍영루에 올라 본 서원 모습. 정면으로 남계(蘫溪) 서원(書院) 큰 글씨가 보이는 강당 명성당(明誠堂)이 마주하고 그 앞에는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서재를 가리는 건물은 묘정비각이다. 묘정비각으로 인해 다소 답답해 보인다. 사당은 강당 뒤로 높직하게 올라앉았는데 지붕만 조금 보인다. 앞쪽 좌우로는 네모꼴의 연지(蓮池)가 있어 여늬 서원과 색다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강당 명성당(明誠堂), 서원의 핵심 강학(講學) 공간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앞쪽으로는 퇴칸을 두었으며 가운데 두 칸은 마루, 동서는 스승들의 공간으로 좌우 대칭 공간인데 동쪽이 원장 스승 공간으로 뒤에 칸살(일명 개흘레)을 두어 여유공간을 더 드리고 있다. 강당 오른쪽 작은 건물은 서적 출판에 필요한 경판을 보관하는 경판고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강당 앞에는 좌우로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지역과 파당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동재에는 선배 또는 양반 자제들이, 서재에는 후배나 중인 자제들이 머물렀다. 스승들 공간을 거경재(居敬齋), 집의재(集義齋)로 이름을 지었듯이 유생들 숙소도 동재는 애련헌(愛蓮軒), 서재는 영매헌(永梅軒)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서원 한가운데 자리 잡아 조금은 답답한 묘정비각. 남계서원에 송덕비 하나 없어 안타깝기에 서원 설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세웠다. 흥미로운 것은 묘정비의 비석 지붕, 즉 옥개석을 보니 화려하게 채색한 흔적이 역력하며, 비각의 천장에도 다양한 채색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엄숙 단정이 기본인 줄 알았던 서원에 세운 비석의 이런 모습이라니..../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에 따라 뒤쪽에 자리한 사당은 지형상 높이 올라앉았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이 정여창, 강익, 정온 세 분을 모신 사당이며 오른쪽 옆면이 보이는 건물은 향사(享祀) 관련 비품들을 보관하는 전사청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서원에 올라 바라본 전경. 팔작지붕의 강당 명성당(明誠堂)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우진각 지붕의 경판고 건물이다. 서원 앞으로는 지방도로가, 그 앞으로 3번 국도가 지난다. 사진에는 잘 안보이지만 그 앞이 남강이며 그 너머에 정여창 선생이 살던 개평마을이다/ 사진출처=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