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상추가 무슨 죄!

    입력 : 2019.08.21 10:09

    상추가 하늘을 난다. 상추가 뿌리째 뽑혀 하늘에 올랐다가 시멘트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있다. 떨어진 상추는 시멘트 바닥에서 잠깐 몸부림치다 이내 몸이 축 늘어지고 만다. 7월의 이글거리는 햇살 덕에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뜨거웠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한 상추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살도 델  만큼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죽어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다만 제 몸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추로서는 뭘 더 할 수가 있으랴. 그냥 눈을 감고 죽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말이다.

    상추의 죽음을 불러오고 있는 것은 분노다. 따가운 햇볕보다 더 이글거리는 아래층 아줌마의 분노다. 상추의 신세가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2층 아줌마 탓이다. 사람도 염치라는 게 적당히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유발하지 않는 데 이 아줌마는 해도 너무 한다.

    이삼 년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래층 아저씨와 2층 아줌마가 만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래층 아저씨를 만난 것이 잘 됐다 싶었는지 “옥상 텃밭 상추 좀 따 먹어도 되겠어요?” 하고 물었다. 분명 2층 아줌마가 한껏 애교를 섞어 코맹맹이 소리를 냈을 것이다. 늘 아쉬운 부탁일 때는 그러하니까. 한없이 마음만 좋은 아래층 아저씨는 “아 그렇게 하세요.” 한 것이 결국 오늘 아래층 아줌마의 불같은 화를 불러왔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때 한번 따 드시라 했던 말이 2층 아줌마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2층 아줌마는 해마다 번번이 묻지도 않고 상추를 따 갔다. 엊그제도 아파트 옥상 텃밭에서 나는 토마토 순을 따 주고 있었다. 띠리릭 소리와 함께 아파트 옥상 문이 열리더니 이 2층 아줌마가 올라왔다. 손에는 스텐 양푼이 들려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성큼성큼 아래층 아줌마네 텃밭으로 갔다. 2층 아줌마의 손이 서슴없이 상춧잎을 뜯어 젖혔다.

    평소 아래층 아줌마의 2층 아줌마에 대한 속상한 이야기들을 자주 들은 터라 얼른 말리고 들었다. “아줌마. 그거 따지 마시고 제가 제 것 따 드릴게요.” 그렇게 내 상자 텃밭에 있는 상춧잎을 다급히 제쳐 스텐 양푼에 꾹꾹 눌러 담아주었다. “고마워요.” 하더니 또다시 아랫집 상자 텃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상춧잎을 다시 따기 시작했다.

    속으로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기도 했다. 어이없어 망연히 서 있다가 다가가 또다시 말렸다. “아줌마, 저번에도 아랫집 아줌마 올라왔다가 상추 때문에 화내셨는데...”, “아 ~~ 괜찮아요. 아저씨가 따 먹으라고 했어요.”

    막무가내로 상춧잎을 똑똑 따서는 스텐 양푼에 꾹꾹 눌러 담으며 2층 아줌마는 한 수 더 뜬다. “아저씨는 심고, 물주고, 나는 따 먹고.” 말에 리듬까지 넣으며 내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이 정도면 아래층 사람들에게 놀림의 소리다.

    별 해괴한 소리도 다 듣겠다 싶었다. 아니 자기 먹으라고 아래층 아저씨가 상추 심고 물 준다고? 우리 집 3식구가 상추를 먹으면 대여섯 끼도 더 먹을 저 많은 상추를 다 먹겠다고? 살다 살다 별 이상한 말을 다 듣는다 싶어 나는 눈만 껌벅이고. 2층 아줌마는 상추를 모조리 따서는 스텐 양푼에 꾹꾹 눌러 담더니 발걸음도 가볍게 엉덩이까지 흔들며 내려갔다. “난 상추를 너무 좋아해요. 시장에 파는 것은 약을 많이 쳐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하는 말을 남겨놓고서.

    지금 그 후 폭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아래층 아줌마가 상추 때문에 2층 아줌마와 싸울 수도 없고 엄한 상추에게 분풀이를 하는 중이다. 말릴 수도 없는 분위기에 위로랍시고 “이층 아줌마도 너무 하셨지. 아저씨가 그때 따 드시라고 한 것은 거절할 수 없어 따 드시라고 한 것을 몇 년을 두고 묻지도 않고 그러니... ”

    “누가 아니래요. 인간들이 염치라는 게 있어야지 우릴 뭘로 보고, 이제 상추 다신 안 심어요!” 소리와 함께 아래층 아줌마 손길에 뽑혀 나온 상추가 더 높이 허공에 던져졌다. 상추는 허공에 잠시 머물다가 허공에 떠돌던 이층 아줌마가 버리고 간 염치도 데리고 함께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