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호박꽃등

    입력 : 2019.09.16 10:36

    서울에서 호박꽃을 만난 것은 순간접착제를 사러 상점에 가던 길이다. 버스를 타면 세 정류장을 지나야 하는 거리지만 할 일도 없는 터라 어둠이 막 내리는 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장마가 끝났다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비는 내렸다 그쳤다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춘 사이에 얼른 다녀와야지 싶어 길을 나선 것이다. 보통 때 같으면 아파트에서 나와 바로 우회전을 했겠지만, 오늘은 그대로 지나쳐 직진했다.

    미장원을 지나 다시 우회전을 막 했을 무렵 호박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유치원 한쪽 붉은 담벼락에 죽은 나뭇가지가 두어 개 세워져 있고, 그 나뭇가지 위를 호박 덩굴이 오르고 있었다. 유치원 붉은 담벼락을 타고 자라던 줄기 끝에서 꽃봉오리가 살짝 벌어지고 있었다. 호박꽃이야 아침에 피는 법인데 날씨가 오락가락하니 꽃도 언제 피어야 하는지 헷갈렸던 모양이다. 얼마 만에 보는 호박꽃인가! 순간 걸음이 저절로 빨라져 호박꽃 앞에 섰다. 오랜 비에 지쳐 축 늘어진 호박잎 사이로 호박꽃구경 삼매경에 빠졌다가 연둣빛 고운, 윤이 자르르 흐르는 애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사진출처: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비 내리는 여름날 낮, 어김없이 부엌에선 애호박 송송 썰어 넣은 애호박전 익는 소리가 지글거렸다.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엄마가 부쳐주는 애호박전 한 장이면 무더위도 잊었다. 당연히 저녁 밥상에는 애호박 찌개가 올랐다. 감자 툭툭 썰어 넣고 막장을 풀어 보글보글 끓이다가 애호박 듬뿍 집어넣은 애호박 찌개가 올랐다. 엄마는 애호박 찌개에 언제나 부새우젓을 넣었다. 부새우는 지금이야 매우 드물어 보기도 힘들지만, 그 시절엔 경포호에서 많이 잡히던 세상에서 제일 작은 새우였다.

    옛집 동네 호랑이 할아버지네 작은 텃밭 울타리에는 여름날이면 무수한 호박꽃들이 피었다. 장난기 많은 남자애들은 호박꽃에 벌이라도 들어가면 살금살금 다가가 호박꽃 꽃잎을 조심스럽게 오므려 호박꽃을 땄다. 행여나 꽃 속에 들어간 벌이 눈치채고 달아날까 봐서였다. 벌이 들어 있는 호박꽃을 딴 남자애들은 얼굴에 의기양양한 웃음기 가득 담고 호박꽃을 등 뒤에 감추고 다녔다. 그러다 여자애들을 만나면 코 앞에 들이대고 흔들었다. 호박꽃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는 여자애들은 놀라 소리소리 지르고, 남자애들은 목적 달성에 깔깔거렸다.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골목길은 아이들 소리로 가득했다.

    밤이면 반딧불이 지천으로 날아다녔다. 내일 새벽이면 피어날 호박꽃 꽃봉오리 하나 잘라 들고서 반짝이는 불빛을 따라 쫓았다. 반딧불이는 잡히는 족족 호박꽃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이면 호박꽃 꽃봉오리는 호박 등이 됐다. 은은한 달빛처럼 호박꽃등도 은은하고 오묘했다. 호박꽃등을 켜 두고 평상에 누웠다. 시원한 밤바람이 찰랑찰랑 밤하늘의 별들을 흔들었다. 셀 수 없는 많은 별이 앞다투어 반짝이고 있었다. 슬금슬금 죄책감이 밀려왔다. 어렸을 적에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었다. 반딧불은 죽는 게 아니라 밤하늘에 올라 별이 된다고. 그 생각에 미치면 슬그머니 호박꽃 입을 열어 반딧불이를 밤하늘로 돌려보냈다.

    누군가는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호박꽃도 꽃이냐?’ 하는 말로 호박을 비하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유년 시절은 호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많은 추억이 있다. 호박이면 어떻고, 수박이면 어떠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꽃 피우고, 각자의 책무를 다하면 그만인 것을. 오늘은 호박꽃등 옆에 놓고 평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