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에세이] 딸아이의 이유있는 반란

    입력 : 2019.10.08 15:01

    지난달 어느 날.  학원을 가기 위해 현관을 나서는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날 따라 아이의 뒷모습은 무척 건강해 보였다. 그래서 무심결에 딸아이에게 “뒷모습이 건장해졌네.”라고 한마디 던졌다. 아빠 입장에서 딸아이가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긍정과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러자 딸아이에게서 갑자기 돌아온 말은 “개 재수”란 말이었다. 순간 누군가 망치로 내 머리를 강하게 내려친 느낌이었다. 딸아이에게서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든 아빠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아이에게 심한 말을 쏟아부었다. 내가 이런 말 들으려고 너를 지금까지 키운 줄 아느냐? 내가 너 친구야?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이런 인성을 갖고 무슨 공부를 하느냐 이런 인성이면 공부하지 말라고 강하게 꾸짖었다.

    딸아이도 갑자기 정색하고 강하게 소리치는 아빠의 모습에 한편으론 놀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아빠의 말에 상처를 받아서인지 울음을 터뜨리면서 학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는 딸아이가 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딸아이를 큰 소리로 꾸짖느냐 고 딸아이 편을 들었다.

    또 한 번 감정이 폭발했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아이를 감싸니 아이 버르장머리가 저렇다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아내는 별일 아닌 일에 왜 이렇게 흥분하느냐고 또 반격했다. 불과 10분 전만 하더라도 딸아이, 아내와 웃으면서 대화하는 장면이 불과 몇 분 후에 갑자기 낙동강 전투 모드로 변했다. 잠시 동안 딸아이 문제로 아내와 씩씩거리다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물 한잔과 함께 차분한 어조로 아내와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의 발단은 청소년기에 있는 학생들 특히나 감수성이 예민한 여고생 여자아이에겐 아무리 아빠지만 말을 가려서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무심코 던진 건장하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라고 아내가 충고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건장하다는 말이 딸아이에게 그렇게 기분 나쁘게 들렸는지.

    아내가 차분하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여자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안다고 그렇게 서두를 꺼내면서, 고2, 고3 즉 입시를 앞둔 수험생은 누구나 시험을 앞두고 예민해지겠지만 특히 여학생인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시험을 앞둔 여자아이에겐 더더욱 말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불문율이 신체에 대한 얘기, 예를 들면 얼굴이 통통해 보인다던가 건강해 보인다는 말은 반드시 금기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차분하게 조목조목 얘길 하니 이 사건의 발단은 딸아이 보다 나의 잘못이 크다고 내심 느꼈지만,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아빠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래에게나 사용하는 비속어를 아빠에게 했다는 것에 대해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비록 아빠 본인의 잘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남자의 자존심이랄까.

    아침에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수습 차원에서 저녁에 딸아이가 집에 오면 늙은 아빠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화해의 의미라 판단하고 딸아이를 기다리다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화해의 타이밍이 일주일 뒤에나 가능했다.

    이번 이를 계기로 아빠와 딸아이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첫째는 흔한 말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딸아이의 입장이 되어 건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과연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 건장하다는 표현보다 평소보다 더 건강해 보인다는 표현을 했더라면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본다. 적절한 언어 구사력이 얼마나 사람의 심리에 큰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둘째는 상호 간 깊은 신뢰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딸아이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회사에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귀가하면서 단지 딸아이의 든든한 자금 공급원 정도의 역할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루, 일주일 혹은 한 달에 과연 딸과의 대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평일에는 거의 없고 일주일에도 토, 일 포함해서 1시간 남짓으로 한 달로 보면 약 4시간.

    아빠와 딸아이와의 신뢰 구축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신뢰 구축은 결국 두 당사자 간에 약간의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다. 딸아이와의 대화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더라면 보다 든든한 신뢰 구축으로 사소한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확전이 되지 않았을 터라고 되짚어 본다. 딸아이의 반란은 이유 있는 반란이라 생각하고 딸아이와 더욱 든든한 신뢰의 끈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