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내 엔트로피 혹은 내 행복 만지기

    입력 : 2020.04.09 10:03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며, 다기에 녹차를 조금 넣었다. 끊는 데 불과 3~4분. 참 세상 편하다. 조금 식힌 뜨거운 물을 붓고 또 3~4분. 찻잔에 떨어지는 찻물, 그리고 향. 그 향은 김과 함께 모락거리며 하늘로 오른다. 김이며 향이 위로 오르다가 점점 오르는 느낌이 줄어들다가 흐트러지다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본다. 아 그래, 그 김과 향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어렸을 때, 참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너 커서 뭐가 될래?’, 이때마다 세상 모두 가진 듯해, 순간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군, 박사, 과학자, 왕 등 주워들은 단어를 외치듯 말하곤 했다. 학교에 다니며 이 단어들이 바뀌다가 더 아는 만큼 구체화 되고, 먹고 사는 직업인이 되기 위한 실제 상황이 펼쳐진다. 이때마다 나를 크게 존속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내 몸보다 몇 배 커지고, 그래서 내 에너지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돌아다니면서, 세상사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가 몇 더 늘어갈수록 사회 활동 영역이 극대화된다. 크든 작든 누구나 자신만의 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 법. 당연히 그 에너지들이, 그 꿈들이, 아니 어쩌면 그 욕구들로 펼쳐지는 세계는 모두 내 것인 양, 큰 즐거움으로 만끽하기도 한다. 꼭 세상이 꿈속인 양 훨훨 즐거움을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순간마다 조금씩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마치 차의 김과 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는 것처럼. 분명 내 것들이었는데, 내가 보고 있었는데, 그 내 것들이 이제 쓸모없어져 줄어드는 꿈 혹은 에너지인 것처럼. 혹여, 내가 느끼지 못하는 꿈 그리고 에너지처럼.

    이쯤에서 꿈 아니 에너지에 관한 과학적 접근을 맛보자. 인류는 생활 혁명을 거듭 일으킬 때마다 새로운 에너지원이 발굴해왔다. 물의 위치를 이용하고, 바람이며 태양열을 이용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30억 년 동안 지구에 축적된 화석연료를 밑바닥까지 소진하고 있다. 이도 모자라 희토류며 희귀원소까지 활용하면서 에너지 한계상황에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과학, 산업분야에만 종속된 것은 아닐 것이다. 찻잔에서 내 김과 향이 나도 에너지라며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 것도 당연한 한 모습.

    태양을 돌고 있는 지구, 지금 지구에 있는 에너지는 그 형태가 변화할 뿐 없어지지 않고 재창조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즉, 열역학 제1법칙으로서 에너지는 영구히 보존된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그러나 에너지란 그 총량은 보존되지만, 유용한 에너지에서 무용한 에너지로 바뀐다는 열역학 제2법칙. 이를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한다. 즉, 에너지를 쓸수록, 쓸데없는 에너지가 계속 증가한다는 ‘엔트로피법칙’에 이르러 ‘차향이 제 역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향이 어디 갔느냐’는 ‘나는 과연 쓸모 있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씁쓸한 자구심이 들기도 하는 것. 

    괜히 쓸데없는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생각될 때마다 퍽퍽한 생활이 되풀이됨을 느끼는 요즘이다. 식은 차 한 모금 마시며 그 생활 일면을 더 들여다본다. 가끔 에너지를 자본으로 비유해 보면? 그럴수록 자본이란 어떤 형태로든 보존, 즉, 상속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에너지가 많이 움직이는 곳이 도시라면 자본은 도시에 많이 몰린다. 에너지, 자본 중앙집중 현상이 두드러져 있다. 물론 현대 사회 힘의 원천인 정보의 집중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권력 또한 마찬가지. 사람이 곳곳에 많이 몰려 있다는 이유란 그만큼 쓸데없는 에너지가 많을 수밖에 없는 엔트로피계의 삶이 아닌가 하는 것. 또한 그만큼, 나 스스로 소모한 에너지가 누적되어 지금 이 피로도도 더 높다는 뜻일 게다.

    현대라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도시의 삶이 넘쳐날수록 에너지 간의 충돌이 늘어난다. 유유상종,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 에너지는 서로 뭉쳐진다.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로 인해 치열한 경쟁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이렇게 경쟁과 협력의 반복으로 현대 문명이 발달한다. 물론 삶의 질이 윤택해지는 것은 한시적인 수순일 것. 어느 시점까지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일어난다. 그렇게 평생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단조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에너지 분출구를 어쩔 수 없이 찾는다. 공원을 늘리고, 경기장을 크게 짓는다거나 공연장, 전시장, 극장 등이 많아지는 현상은 당연한 모습이다. 그리고 휴가철을 만들어 산이며 강과 바다 곁으로 가곤 한다.

    중년이 되어보니, 권력이니 정보니, 문명이니 하는 것 모두 내 행복감을 확인하려는 수단이라는 글귀가 점점 마음에 든다. 이렇듯, 어쩌면 산다는 것은 내 행복감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에너지 사용이 아닐까? 그 에너지를 두고 어떻게 선점하느냐 하는 과정 충돌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 그래, 조금은 안다. 내 행복 자체란 내 에너지가 일정량 머문 내 시간임을 안다. 또한, 나만의 행복감 느끼기에 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도 안다. 과연,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에너지를 여유롭게 만진다는 일이 터무니없는 욕심일까? 만만의 쓸데없는 에너지 축적이란 말인가? 내 손으로 확인할 수 없는 시간을 만지고자 함이 어찌 쓸데없는 에너지란 말인가?

    맞다. 내 에너지가 이러저러하다고 시시콜콜 말하는 것은 결국 내 욕심이리라. 그렇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어떠한 에너지 의미에 점수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에너지가 필요한지 아닌지 나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것. 내 에너지 확인이란 결국 내 욕심의 하나가 아닌가. 태어나면서 묻고 답한, ‘너는 무엇이 될래?’,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러한 말들이 내겐 아주 오래된 꿈이었기에, 내 꿈을 맛보기 위한 에너지 모으기와 사용하기에 있어, 어찌 쓸모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따져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 하, 그래서 세상 에너지는 충돌하는가? 충돌하면 쓸데없는 에너지가 방출하는 것인가? 엔트로피법칙은 그래서 나온 것인가? 우리는 그저 고만고만한가? 하하, 그럴듯하다.

    다시 끓는 물을 넣고, 다기를 멍청히 바라본다. 아, 그래, 천천히 찻잔을 산책하다 하늘로 피어오르는 김과 향이다. 잠시, 이들이 어디론가 사라질 즈음, 이럴 땐, 그래, 내 에너지가 곧 나였구나 하는 나만의 고백을 해야 한다. 그저 이런저런 생활에 찌들다 보니, 아니, 그저 내 것이 무엇인가 만지려는 욕심을 많이 부리다 보니, 쓸데없는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였구나 하고, 서서히 움직거리는 녹차의 김과 향에 말해두어야 한다. 뭐가 좋으니, 쓸모 있느니, 그도 아니니, 하는 지금 이 시간 자체가 차 한 모금과 같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래 서로 모두 같으니, 에너지니, 자본이니 정보니 내 남은 힘이니 하는 말들을 더 줄여야 할 것. 그러면, 이다음 시간엔, 나는 나인가? 허허, 아닐지도 모르는데!

    내가 몇 살이라고 하는 것, 그때마다 느꼈던 것, 그렇게 지나간 그 시간이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러면, 다가오는 시간은? 한순간, 이 순간만은 ‘내 것이다’ 만지려 하? 이도 또한 쓸데없는 에너지인가, 나인가, 어떤가, 하며 사라질 텐데? 그래, 그래. 보이든 안 보이든 뭐든, 다가오는 모두는 내 것만이 아니다 침 꿀꺽 삼키며 눈 부릅떠 두 손 손가락을 서로 만져본다. 10초가 10분인지... 뺨도 옆구리도, 또 몸 구석을 만지며, 저도 모르게 사라지는 녹차의 김과 향을, 음음음, 바라다본다. 

    창 너머, 문득 보이는 세상, 참 아름답다. 천천히 찻잔을 쓰다듬으며, 지구가 돌아가는 것처럼 천천히, 더 천천히 녹차의 김과 차향을 바라보며, 지금은 뭐라도 물어보고 잊어야 한다. 내 시간은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내 몸에서 나오는가? 그래, 이게 바로 나인가?  하하, 뭐, 괜찮을 듯. 이런 말도 있다. 아니면 말고.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더 많으니. 그런데도, 하, 웬일인가, 이것만이 가장 쓸모 있는 에너지일 듯하니! 나는 이렇듯, 내 에너지를 내 시간을 만지며, 내 엔트로피를 내 행복인 양 숨소리 따라 늘리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