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묵의 폐사지 답사] (3) 원주 법천사 터 (法泉寺 址)

    입력 : 2020.12.25 18:39

    ▩ 남한강변 폐사지 (청룡사터, 거돈사터, 법천사터, 흥법사터, 고달사터)

    남한강변 폐사지 답사
    세번 째는 법천사 터(法泉寺 址)를 찾아가 본다.

    법(法)은 부처님의 말씀, 즉 진리를 말하는데 법천사(法泉寺)란 '법(法)이 샘(泉)처럼 솟아나는 절'이며 이곳 마을 이름도 법천리(法泉里)이니 절집 이름을 동네 이름으로 삼은 곳이다.

    그만큼 불법(佛法)을 받들던 곳이었을텐데 지금은 황량한 폐사지로 남아 있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 원주 법천사 터(法泉寺 址) (사적 제466호)

    법천사 터는 먼저 둘러 본 거돈사 터에서 그리 멀지 않다.
    같은 부론면에 속하는데 거돈사가 조금 산속으로 들어간데 비하여 법천사는 부론면 면소재지에서 가까우며 (허난설헌과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이 한때 살았다는) 손곡리에서부터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법천천변 너른 들판에 자리 잡았다.

    그동안 절터에 남아있던 마을 민가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발굴조사도 어느정도 마무리 되었는지 지금은 대체로 잘 정비된 모습이다.

    발굴작업을 마치고 정리된 모습의 법천사 터. 너른 절터에 특별히 남아있는 유적은 없으며 뒤편 높은 곳에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제59호)'가 남아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당간지주 1쌍이 남아 있다

    법천사(法泉寺)
    남한강변 사찰들이 대부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크게 일어난 선종 사찰들인데 비하여 법천사는 교종(敎宗)에 속하는 법상종 사찰이다. 법상종 스님들은 사회봉사를 위주로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부류와 불학연구에 매진하는 부류가 있다고 하는데 법천사는 후자에 속하는 스님들이 많았으니 남한강변의 절집들은 대부분이 연구하고 수양 참선(禪)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법천사는 725년(성덕왕 24)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이곳에 머물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강학(講學)하였는데, 이 때 수학한 한명회(韓明澮)·강효문(康孝文)·서거정(徐居正)·권람(權擥) 등이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지광국사 승탑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 탑비(국보 제59호)

    ㅇ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 (984년~1067년)
    고려 중기 문종 때 국사(國師), 법상종의 고승이다. 본관은 원주 원씨(元氏), 원주 법천사(法泉寺)에 있던 관웅(寬雄)을 찾아가 유식학을 배웠으며 관웅이 ‘해린(海鱗)’이라는 법호를 지어줬다. 관웅을 따라 상경, 개경 해안사(海安寺) 준광(俊光)의 제자가 되었다. 1004년 21세에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다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 평양 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덕종 때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을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의 다섯째 아들인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059년 내전(內殿)에서 개최된 백고좌(百高座)의 제일 설주(說主)가 되었으며, 1067년, 국사의 나이 84세에 은퇴하여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 머무르다가 입적하니 문종은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라 내리고 당대의 최고 문장가 신하들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였다.

    탑비의 음기에 해린의 제자를 열거하였는데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선후사이몰세자(先後師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 대덕으로 나누어 기록했는데, 거기 실린 인명이 1400명에 이른다.

    *** 문화재청 설명이나 각종 자료, 답사기록 등에 지광국사 생몰년도를 984~1067년으로 해놓고는 입적년도는 1070년으로 적어 혼란스럽다.

    ㅇ 지광국사(智光國師) 승탑(僧塔) 현묘탑(玄妙塔)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 승탑, 현묘탑(玄妙塔) (국보 제101호). 이 승탑은 법천사 터에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던 시절에 야외전시 형식으로 잔디밭에 있었으며 이촌동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할 때에도 안전상의 문제로 이전이 어려워 경복궁에 남아있다가 보존처리를 위하여 2015년 3월에 대전 소재 국립문화재 연구소로 옮겨져 완전 해체후 복원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문화재청)

    고려때 승탑은 팔각원당형이 주된 흐름인데 비하여 방형(4각)의 네모난 모습에 자유로운 형태로 화려하고 다양한 장식들을 둘렀지만 혼란스럽거나 어지럽지 않고 예술성은 뛰어나 현존하는 승탑중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동안 원래의 자리(법천사)로 보내달라는 지역민의 강력한 주장과 청원이 있었으며 그에따라 복원이 완료되면 법천사 터로 간다(?)고 한다.

    현묘탑(玄妙塔) 수난사
    강원도 원주 법천사 터에 탑비와 나란히 서 있던 승탑 현묘탑(玄妙塔)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일본 골동상 모리가 불법 반출하여 경성에 살던 부자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에게 넘어갔다가 오사카 귀족 후지타 헤이타로에게 매각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총독 데라우치의 강요로 기증형식으로 반환되어 돌아왔으며 1915년 경복궁에서 벌어진 조선물산공진회에 전시되었다가 그후 명동성당 부근과 경회루 동편등으로 9차례 옮겨 다녔으며

    6. 25전쟁때 포탄에 피폭되어 12,000조각으로 부서진것을 1957년 시멘트로 하나 하나 접합해 붙여 세웠는데 그 상태로는 이동하는것이 불안해서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이촌동으로 이사갈때에도 현묘탑은 그대로 남아 있다가 2015년 3월 완전해체후 보존처리하기 위하여 철거하였다.

    명동 지역에 서 있는 현묘탑 모습. 1911년 9월 일본인 건축사 세키노 다다시가 찍은 사진으로 현묘탑의 가장 오랜 사진이다. 즉 법천사 현장에서의 사진은 전하지 않으며 반출후 최초의 사진으로 이후 폭격등으로 망가진 모습의 원형을 참고 할 수 있는 자료이다. (문화재청 사진)

    와다 쓰네이치가 사들여 메이지마치(명동) 무라카미 병원 옆으로 옮겼는데 그때 찍은 사진으로 보이며 현재 명동성당 구내 가톨릭센터 부근의 저동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남산 기슭 남창동의 저택으로 탑을 옮겼다가 일본으로 팔려 나간 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사자가 놓여 있는데 그동안 이는 모두 도난당하고 남아있지 않다고 했으나 알고보니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어서 다시 찾았다는 해프닝도 있었다.

    ㅇ 지광국사(智光國師) 탑비(塔碑) 현묘탑비(玄妙塔碑)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탑비, 현묘탑비(玄妙塔碑) (국보 제59호). 법천사 터에 있다. 드물게 승탑과 탑비 모두가 국보급 문화재인데 그만큼 뛰어난 작품성과 예술성을 보인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전국의 차(茶) 동호회에서도 이 지광국사 탑비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 까닭은 구양순체로 부드럽게 써내려간 2000자가 넘는 비문 내용중 차(茶)를 지칭하는 다른 글자가 5번이나 발견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지광국사를 고려의 이름난 차승(茶僧)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현묘탑 귀부는 이중 기단위에 올라 앉았는데 뭉게뭉게 구름 문양에 떠 있는 모습이다. 고른 치열에 잇몸까지 보이며 웃는듯 한데 긴 턱수염은 목과 머리를 지탱하는 역할까지 하는 듯 하다. 거북 등은 네모꼴 형태로 나눈뒤에 각 칸마다 육각의 귀갑무늬를 새기고 그 안에는 王자를 새겨 지광국사가 왕사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비신은 검은색(오석) 화강암 점판암으로 광택이 나는 고급 석재인데 크고 무거운 이수(머릿돌)보다 갸날퍼보여 불안정한 느낌이다. 게다가 오랜세월 비바람에 시달려 뒷면 아랫쪽 좌우가 일부 파손되어 얼마나 지탱할수 있을지 불안한데 쌍계사나 봉암사의 최치원 사산비명을 새긴 탑비들처럼 철제 앵글로 받쳐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비신 양옆으로는 용 2마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깊게 새겨 매우 화려하다. 자세히보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습이 아니라 2마리 모두 하늘로 향하는 모습인데 비신의 옆면에까지 이렇게 공력을 들인 탑비는 드물다.
    이수(머릿돌)는 왕관 모양 또는 사대부 갓 모양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으로 데려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처럼 보이기도 한다. 끝부분에 귀꽃 장식을 붙였으며 연꽃잎을 기본에 새긴후 구름과 용무늬가 또렷한데 그 위로는 연꽃모양의 3층 보주를 얹은 상륜부까지 두었으니 무척 화려한 탑비이다.

    아쉽게도 비신은 아랫부분이 일부 훼손되어 불안정할뿐 아니라 윗면도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사선(斜線) 방향으로 깨어져 붙인 흔적이 뚜렷하다.

    머릿돌에 제액(題額)은 없고 비신 상단에 네모 칸을 새겨 모두 2줄 12자로 '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증시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이라고 전서체로 새겼는데 검은 바탕인지라 잘 보이지 않는다.

    비신 상부를 탁본한 것이다. 검은색이라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전서체로 쓴 전액(篆額)이 뚜렷하고 그 좌우로는 큰 네모칸에 봉황을 새겼다. 글씨 위로는 복잡다양한 그림을 넣었는데 불교의 세계관을 축약한 것으로 보인다.

    여백에는 세밀한 넝쿨 문양을 그려넣었으며 글씨 위로는 반원형 큰 안상에 중앙에는 나무 한그루를 세웠고 좌우로 옷자락을 휘날이며 향로를 들고 하늘을 나는 모습의 천인상을 큼직하게 새겼으며, 둥근 원 2개을 그려 왼쪽에는 달에 산다는 계수나무와 토끼, 두꺼비 등을, 오른쪽에는 다리가 셋이라는 전설의 삼족오(三足烏) 까마귀를 새겼다.

    크고 작은 산들과 구름 문양, 꽃 모양을 새겼으며 여러곳에 봉황이나 전설의 극락조로 보이는 새들을 새겼는데 그 정교함이 매우 화려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 참으로 보기 힘든 걸작이다.

    비문을 짓고 쓰고 새긴 사람
    본디 비문을 쓰고 새길때는 글을 짓는(撰, 찬) 사람과 글씨를 쓰는(書, 서) 사람, 비석에 새기는(刻, 각) 사람이 있어야 하나 짓고 쓰는 사람은 대개가 벼슬아치거나 유명 학자들이니 잘 전하는데 비하여 새기는 사람은 석공이거나 스님(僧)이거나 하니 그 이름이 잘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고려 초에 문장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유언(鄭惟産)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잘 쓰던 안민후(安民厚)가 비문과 음기(陰記)를 서병전(書幷篆)하였으며 이영보(李英輔)와 장자춘(張子春)이 각자(刻 字)하였다고 전한다.

    ㅇ 법천사지 당간지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
    법천사 터에는 현재 현묘탑비뿐, 알수없는 석물 조각 몇개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절 터에서 마을 방향으로 300m쯤 떨어진 곳에 당간지주 1쌍이 온전하게 남아서 눈길을 끈다.

    법천사지 당간지주 (문화재 자료 제20호). 원래 이 당간지주는 마을 민가들 가운데 갇혀 있었는데 민가들을 모두 철거하고 주변정리를 하여 지금은 외따로 혼자 서 있다. 이곳이 그 옛날 법천사지 초입쯤 되었으리라.

    두둑하게 흙을 북돋아 토단을 조성하고 큼직한 당간지주를 세웠는데 별 장식이나 새김없이 단순 명료한 모습이며 제법 크고 멋스럽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간(竿)을 세울때 세우는 홈을 파낸 둥근 석재가 끼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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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법천사지는 부론면소재지에서 가깝다.
    네비게이션에 '법천사지'를 입력하면 안내한다.

    최근 발굴을 마치고 주변 민가들도 철거하고 부지정리를 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하며 주차장이나 화장실도 잘 되어 있다. 건물 2동쯤이 남아 아마도 전시관이나 방문자센터로 운영하는듯 한데 최근 코로나 사태로 대부분 페쇄상태이다.

    손곡리 : 임경업 장군의 출생지, 손곡 이달 거주지
    법천사지 서북쪽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이 법천천이다.
    부론면소재지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이 물길의 상류는 손곡리인데 이곳 평촌마을이 임경업 장군의 출생지로 장군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워 놓았다.

    또한 서자로 태어나 한세상을 방랑의 길로 떠돌며 생을 마감한 허난설헌과 허균의 스승 손곡 이달(李達)도 이곳에 거주한 적이 있어 호를 손곡이라 했던 것이니 유독 원주 부론 일대에는 그 뜻을 펼치지 못한 이들의 한맺힌 사연이 남아 있어 마음이 무겁다.

    법천사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손곡리를 둘러볼 수 있다.

    흥원창(興元倉)
    고려때 전국의 조세를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하여 세운 13조창 중 하나로 법천사가 있는 곳 남한강변에 있었다. 조선초기 9창으로 변경되어서도 계속 운영된 남한강 수계(水係)의 대표적인 조창이었으나 18세기 이후 군현별 조운이 일반화되면서 조창제도는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興原倉이라 함)

    이곳에 물류가 모이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권역(圈域)이 형성되니 자연히 마을이 커지고 큰 절이 생기며 또한 이런저런 주장과 말(言)이 넘치게되니 이곳을 부론(富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도 과장은 아닌듯 하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 터 가까운 남한강변에 '흥원창'이 있었다. 사진은 남한강변 자전거 도로 옆에 세워진 흥원창 표석. 원주-문막에서 내려오는 섬강이 남한강과 합류되는 지점이다.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OO 법무차관 성접대' 사건의 현장, 원주 별장이 이 동네라고 하는데 굳이 소개할것까지는 없을 듯 하다.

    제 자리를 찾아 올 지광국사 현묘탑
    완전 해체후 복원중이라는 현묘탑(국보 제101호)이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입고된지도 5년이 넘었으니 아마 곧 새롭게 태어난 모습을 볼 수 있을듯 하다.

    그때는 원래 자리인 이곳 법천사 터에 세우겠다고 했으니 언제 이곳으로 옮겨올지는 알수 없으나 복원 수리후 세워지면 꼭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계 속]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