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묵의 폐사지 답사] (9) 안성 봉업사지(奉業寺址) - 2편

    입력 : 2021.02.15 10:39

    '안성 봉업사 터' 답사기 1편에는 봉업사 터에 얽힌 복잡한 이야기를 풀어보았으며 죽산 폐사지에 있는 남아있는 당간지주와 5층석탑, 그리고 뒷편 산자락의 삼층석탑과 미륵석불, 태평미륵이라고 부르는 매산리 석불입상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제 2편에서는 봉업사 터를 떠나 안성 칠장사로 옮겨 간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과 '죽림리 삼층석탑'을 먼저 살펴 볼것이며, 기왕 간 김에 칠장사에 얽힌 이야기와 보유 문화재 등을 알아보려 한다.

    ▩ 칠현산 칠장사 (七賢山 七長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며, 고려시대 헤소국사가 중수한 기록이 사적비에 전한다.

    칠장사는 충북 진천군과 맞닿은 칠현산 자락에 묻히듯 들어가 있는데 주변은 여러개의 골프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당우도 그다지 많지 않은 소박한 절집으로 칠장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연과 혜소국사 이야기, 인목대비의 원찰(願刹), 임꺽정과 어사 박문수 이야기 등 많은 스토리 텔링이 있는곳이다.

    그러나 '봉업사 터' 답사 2편이므로 봉업사 이야기를 먼저 하고나서 칠장사의 여러가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칠장사에 있는 '봉업사' 관련 유물

    ㅇ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 (奉業寺址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83호)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3호, 오른쪽 입상). 원래 봉업사 터에 있었는데 근처의 죽산 중고등학교로 옮겼다가 훼손이 심하여 다시 칠장사로 옮겼다. 석재로 단을 쌓고 좌불과 입상을 모셨는데 오른쪽 입상이 봉업사 터에서 온 석불이다.

    커다란 연화대좌는 나중에 추가로 만든 듯하며 둥근 북 형태에 꽃무늬를 새긴 받침돌 위에 등신불 크기(불상 1.57m, 총 높이는 1.98m)의 입상을 세웠는데 두광과 신광이 불상과 (별도가 아닌)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아들을 비는 아낙들 때문인지 불교를 배척한 유학자들 때문인지 눈·코·입은 심하게 마모되었지만 전체적인 조각기법이나 표현은 뛰어난 솜씨로 보인다.

    양쪽 귀는 늘어져 어깨에 닿을듯 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U자 모양 통견으로 양 어깨에 걸쳐친 겉옷은 여러겹 무늬가 길게 늘어지다가 허리부터 무릎까지는 양 다리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무늬가 이어지고 그 아래로는 더 긴 옷이 겹쳐져 발등까지 내려오며 접히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이 가슴부분까지 들어 손바닥을 가슴에 붙이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 자연스럽게 옷자락을 잡고 있다. 원형 두광(頭光)에는 화불(化佛) 3구가 새겨져있고 바깥으로는 불꽃무늬가 타오르며 신광(身光)은 키 모양으로 전신을 감싸는데 역시 불꽃무늬가 바깥쪽을 장식하고 있다. 광배 뒷면은 아무 조각이 없이 평평한 면석이다.

    봉업사 터에 있어야 할 멋스러운 석불입상이 칠장사에 와 계신다.

    ㅇ 안성 죽림리 삼층석탑 (竹林里 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칠장사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죽림리, 즉 봉업사 터 근처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부재들을 모아서 만들었다는데 그동안 봉업사 터 근처의 강성원 목장에 세워져 있다가 2005년에 칠장사로 옮겨 세웠다.

    한 눈에 단정한 느낌이 드는 이 석탑은 새로 만든것으로 보이는 사각의 지대석위에 단층 기단을 얹고 그 위로 3층을 올렸는데 상륜부는 없고 노반만 남아 있다.

    아무런 장식없이 커다란 기단부는 4개의 돌을 판석처럼 돌려 만들었으며 덮개 돌 위로는 2단의 굄돌이 1층 몸돌을 받치고 있다. 1층 몸돌은 2개의 돌로 이루어졌는데(깨어진 후 수습한 듯) 남쪽 면에는 네모진 문비 무늬를 새기고 가운데에 두 짝의 문을 표시하고 문고리 2개를 달아 잡아 당기면 열릴 듯 하다.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隅柱, 우주)을 뚜렷하게 조각하였으며 2, 3층은 1층에 비하여 급격히 작아져 체감율을 높이므로써 석탑의 비례미를 갖추었다. 지붕돌은 적당히 완만한 곡선이며 모두 4단의 층급받침을 새겼다.

    봉업사 터에서 대각선으로 17번 도로 건너편 천주교 죽산성지 근처에 이 석탑을 세워두었던 강성원 목장이 있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일반 방문객도 우유를 가공, 처리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이 석탑의 근원이 궁금하면 겸사겸사 한번쯤 방문해도 좋을듯 하다.

    **** 여기까지가 '봉업사 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칠장사에 얽힌 이야기들
    봉업사 터에 관한 답사만 하고자 한다면 여기까지면 된다.
    그러나 위 석불과 석탑이 있어 칠장사까지 찾아왔으니 이 절집은 어떤 곳인지? 어떤 문화재들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ㅇ 혜소국사에 관한 전설
    칠장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 않다. 신라 선덕여왕 5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다만 고려초 현종 5년(1014)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다고 알려진다.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머무를때 일곱도적이 절에 와서 못된 짓을 일삼는 것을 깨닫게하니 그들이 모두 제자가 되어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하여 모두 훌륭한 아라한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때부터 절 뒷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 절 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 했다고 한다.

    칠장사 나한전. 그야말로 단칸 전각인지라 공간이 너무 좁아서 그 앞으로 알미늄 새시로 참배공간을 덧붙였는데 영 어색하다. 나한전을 가리듯이 서 있는 나무는 나옹선사가 나한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려고 심었다는 600년 된 나무이다. 실내를 들여다보면 일곱나한을 모시고 있다.(오른쪽 사진)

    혜소국사(慧昭國師) 정현(鼎賢) (972년 ~ 1054년)
    속명은 이정현(李鼎賢)으로 광종 23년(972)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여 죽산 칠장사(七長寺) 융철(融哲)에게 배우고 996년 승과에 급제, 999년 대사가 되었고 덕종 때 승통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문종 즉위 후 1049년 왕사, 1054년 국사가 되었다.

    이후 대부경 김양(金陽)과 승정 도원(道元)으로 하여금 칠장사까지 모시고 가게 하니 산에 돌아와서부터는 승상(繩床)에 앉아 옷 1벌만을 해 입고, 모든 인연을 끊고 있다가 앉은 채로 입적하니 문종 8년(1054) 세수 83세였다. 시호는 혜소(慧昭)이다.

    ㅇ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七長寺 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는 3칸짜리 커다란 보호각 안에 비신과 비좌, 이수가 분리된채 나란히 모셔져 있다. 아마도 비신이 부러지면서 무너진후 다시 세우기가 어려운듯 하다.
    비신과 비좌, 이수가 나란히 놓여있다.(사진 ①) 비신은 높이 241cm, 폭 128cm이고 비신의 양측에는 상하로 길게 쌍룡이 새겼다. (사진 ②) 귀부는 대체로 온전한 모습으로 큼직한 양발을 짚은채 머리를 들고 있으며 (사진 ③) 이수는 구름 속에 노니는 용 4마리를 실감나게 새겼으며 위에는 보주를 얹었는데 매우 무겁고 커 보이는것(사진 ④)이 지금의 비신 상태로는 위에 올리기 힘들듯 하다.

    혜소국사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년)에 세운 것으로서 글은 김현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가 썼으며 배가성, 이맹 등이 새겼다. 비신의 글씨는 대체로 해독이 가능하나 중앙부를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부러진 흔적이 보인다.

    가토 기요마사를 꾸짖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고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렇듯 칠장사와 뗄 수 없는 혜소국사는 탑비만 남긴채 승탑이 보이지 않는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비석을 칼로 내리 친 가토 기요마사가 파괴했다고 하는데 9층으로 멋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ㅇ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仁穆王后御筆 七言詩) (보물 제1627호)

    인목대비 친필 칠언시로 만든 족자.(보물 제1627호).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당(願刹)로 삼고 친필 칠언시를 내린 것이다.

    老牛用力己多年 (노우용력기다년) 늙은 소 힘쓴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領破皮穿只愛眠 (영파피천지애면) 목덜미 쭈그러들고 가죽은 헤져 졸립기만 하고
    犂耙己休春雨足 (이파기휴춘우족) 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 또한 넉넉한데
    主人何苦又加鞭 (주인하고우가편)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

    이 한시(漢詩)는 늙은 소의 고달픔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ㅇ 임꺽정과 박문수 이야기
    벽초 홍명희의 소설 주인공 임꺽정의 스승 병해스님이 이곳 칠장사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는 갖바치로 주민들에게 가죽신 만드는 법을 가르쳐 안성유기와 함께 가죽신이 안성 특산물이 되었다고 한다.

    극락전의 목조불상은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만들어 봉안했다고 전하는 일명 '꺽정불'인데  밑 부분에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 진 삼베 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의 방사선 연대측정”이라는 결론을 내려 실제 임꺽정(?~1562)이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어사 박문수는 한양으로 과거보러 올라가면서 칠장사에서 하루 묵게 되었는데 나한전에 휴대한 유과을 올리고 불공을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과거시험 문제 8줄중 7줄을 알려주고 한 줄은 본인이 완성하라 하여 장원급제를 하였다고 한다.

    ㅇ 칠장사 당간 (七長寺 幢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칠장사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철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공주 갑사와 청주 용두사지, 법주사 등 국내에 몇 안되는 철당간이다.

    총 높이 11.5m로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연결되어 있으며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각 이음새부분은 마치 대나무마디처럼 형성되어 있다. 좌우로는 끝이 둥글게 처리된 화강암 당간지주가  받치고 있다.

    원래는 원통모양의 철통이 30마디를 이루었다고 하며, 칠장사의 지형이 배(舟)모양과 같아 돛대의 역할을 하도록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고 전한다.

    당간지주 옆에는 현종 12년(1671)에 세운 칠장사 사적비(향토유적 제24호)가 있다.

    ㅇ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五佛會 掛佛幀) (국보 제296호)

    국보 제296호 오불회 괘불탱화는 국내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것으로써 조선 인조 6년(1628) 법형(法浻) 비구니가 그린 군집도 형식의 불화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불화는 단일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반하여 이 괘불도는 구름을 이용하여 화면을 상, 중, 하 3단으로 구분지어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길이 6.56m, 폭 4.04m로 비록 중간 크기이긴 하지만,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유려한 필선, 화사하면서도 은은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서 예배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밖에 칠장사에는 삼불회 괘불탱(보물 제1256호)도 있는데 이 괘불탱들은 평소에는 볼 수가 없고 부처님 오신날 등 특별한 날 야외법회를 위해 법당 앞 마당에 임시 설치하여 공개한다.

    ㅇ 안성 칠장사 대웅전 (七長寺 大雄殿) (보물 제2036호)

    칠장사 대웅전(보물 제2036호). 1790년(정조 14년) 중창되고 1828년(순조 28년) 이건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화려한 다포식 공포를 전후면에만 두고 있고 측면에는 없이 풍판으로 비바람을 가리고 있다.

    대웅전에는 1685년 만들어진 목조석가삼존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이 모셔져 있고 삼존불 후면의 영산회상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9호)와 칠장사 범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이 있다. 


    그밖에도 대웅전등 불전 외벽에는 일곱도둑이 나한이 된 모습과 임꺽정과 병해스님 이야기등을 그린 벽화가 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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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업사 터'를 답사하다가 이산가족이 된 문화재를 찾아 칠장사까지 둘러보았다. 소박한 절집인 칠장사가 재미있는 스토리도 많고 뛰어난 문화재가 많아 놀라운데 봉업사가 있었던 안성 지역에 유난히 석불이나 미륵불이 많은 점이 특이하다.

    지금껏 알아본 것 외에도 기솔리 석불입상(쌍미륵)(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 대농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아양동 보살입상(향토유적 제10호)/석불입상(향토유적 제15호) 등 서민들이 세웠을 투박한 미륵불들이 이 골짜기 저 들판에 서서 안성땅을 지키고 계신다.

    그밖에도 청룡사, 석남사 등 대찰(大刹)은 아니지만 소박한 절집들이 있고 죽산성지, 미리내성지와 인접한 진천의 베티 성지등이 있어 안성에 내려오면 여기저기 들려봐야 할 곳이 참으로 많다.

    무엇이든 딱 맞게 흡족하면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난 안성
    한반도 남부지방의 물류가 모이고 흩어지는 요지이며 군사적 요충지로 꼽히는 안성지역의 '봉업사 터'는 아직 발굴하고 정리해야 할 여지가 많은 곳으로 보인다.

    특히 지역민들이나 관계 학자들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이 절실(현재는 경기도 기념물 제189호)하다고 주장하는 바 이러한 사정을 잘 살펴 사적으로 지정이 되고 관련 내용들을 잘 정리해놓아서 '봉업사 터'를 찾아와서는 당간지주와 오층석탑만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계 속]

    *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