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봉숙의 '내 마음과 손잡고 걷기'-6

수십 년을 살아도 잘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성격유형검사는 나의 성향이나 기질을 측정하는 유용한 도구로 쓰입니다. 성격유형검사의 결과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진로 선택에 도움을 받기도 하죠. 하지만 78억이 넘는 유일무이한 인간 개개인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도식화의 위험이 있습니다. 검사 결과를 부동의 프레임으로 삼아 고유한 존재인 개인을 하나의 유형 안에 고정시키거나 규정짓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격유형을 적용할 때는 예외와 보완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격유형을 아는 것 외에 나 자신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요, 바로 나의 감정을 탐색하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쁨, 즐거움, 불안, 분노, 두려움, 슬픔 등 다양한 감정들의 집합체이고, 이러한 감정들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때문에 나의 감정을 탐색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구별된 나를 아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을 알기 위한 감정 탐색의 첫걸음은 감정의 레이블링(labeling), 곧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먼저 통성명을 하듯, 내 안의 감정을 알려면 감정마다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줘야 합니다. 감정이 발달된 성숙한 사람일수록 감정의 이름(단어)을 다양하게 알고 있고, 그 이름으로 감정을 표현합니다. 감정의 발달은 감정의 분화로 이루어지는데요, 신생아 때는 미분화된 흥분성만으로 자극에 반응하다가 쾌와 불쾌의 감정으로 나뉩니다.

이후 불쾌의 감정에서 분노, 혐오, 공포, 수치심과 질투가 분화되고, 쾌의 감정에서 의기양양함, 애정, 기쁨이 분화되면서 두 살까지 기본적인 감정의 분화가 이루어집니다. 성인과 비슷한 수준의 감정의 분화는 다섯 살 즈음에 완성된다고 보는데, 생후 흑과 백의 두 가지 색으로만 느껴지던 감정이 점차 총천연색으로 미세하고 풍부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의 답변을 생각해 보면 내 감정의 분화 수준을 알 수 있겠죠.  ‘쾌/불쾌’ 곧 ‘좋아/나빠’로 표현한다면 신생아 수준일 텐데 매번 그것에도 못 미치는 ‘몰라’라는 대답을 연발한다면 좀 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려고 또는 사회적, 문화적인 이유로 감정을 억제하다 보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기 어렵게 되고, 나아가 감정 인식 불능 또는 감정 난독증으로 악화될 수 있습니다. 억압되고 억제된 감정은 긴장된 형태로 몸에 저장되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냥 ‘좋다’보다는 ‘상쾌하다’ ‘흡족하다’, 그냥 ‘나쁨’보다는 ‘서글픔’ ‘서운함’ 등으로 감정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면, 모호한 감정을 보다 명료히 함으로써 감정을 잘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습니다. 감정 단어로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서 훅 올라오는 감정에 휘감기기 전에 멈춰서 객관적으로 감정을 볼 수 있게 되어,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정신과 의사 훈련을 받았던 인류학자 로버트 레비는 1950년대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타히티의 높은 자살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연구 결과 타히티 원주민의 말에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으니 슬픔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의식도 없었습니다. 감정은 그 이름, 곧 언어의 옷을 입고 바깥세상으로 나와 표현되고 소통돼야 하는데, 표현되지 못한 슬픔이 내면에 갇힌 채 타히티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겁니다.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한 연구에서 감정 표현 단어 504개를 선정했는데, 그중에 슬픔과 관련된 단어가 128개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데도 계속 자살 1위인 것은 그 이름들을 제대로 불러줄 수 없을 만큼 슬픔의 고통 수위와 무망감이 극대화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인도의 시인 까비르는 인간 전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대로 느낌 그 자체가 되어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느낌은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사람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감정은 무엇보다도 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말해주는 나만의 독자적인 자원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알지 않고는 인공지능 이상으로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 단어는 누구에게는 서러운 느낌으로, 또 누구에게는 애잔한 느낌으로 분화됩니다. 이렇듯 사람은 나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존재하고, 그 느낌으로 생각과 판단을 이끌어냅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잘 알기 위한 감정 레이블링. 내가 그 감정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내게로 와 나의 참모습을 비춰 줍니다.

차 봉 숙 (무용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