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봉숙의 '내 마음과 손잡고 걷기'-7

  • 차봉숙

    입력 : 2021.07.19 12:25 | 수정 : 2021.07.19 12:31

    (7회) 내 탓, 남 탓의 심리

    우리는 부정적인 현상이나 결과에 대해 ‘탓’을 합니다. 내 탓, 남 탓, 날씨 탓, 심지어 보지도 못한 조상 탓까지도 합니다. 탓하는 것이 책임의 소재를 밝힌다는 점에서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어떤 결과의 원인이 내 탓인지 남의 탓인지, 아니면 복합적인지를 따져야 부정적인 결과를 해결하거나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원인을 찾는 방식이 비합리적이어서 무조건 남을 탓하거나, 근거 없이 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무조건 남을 탓하는 심리는 자기방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탓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불편하고 수치스러워서 내 탓을 남에게 떠넘깁니다. 내 탓이 마치 시한폭탄처럼 날 파멸시키는 위해한 것이라고 여기고 밖으로 내던지는데 그 타겟이 다른 사람이 되는 거죠.

    애영씨는 집안의 귀한 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게다가 뭐든지 잘하는 팔방미인입니다. 친구들의 시기로 마음고생 좀 해 본 애영씨에게 시기심은 못난 사람이나 갖는 경멸스러운 감정입니다. 시기심이란 단어는 애영씨 사전에는 없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애영씨의 딸은 잘난 애영씨와 달랐습니다. 공부도 바닥이고 아무 의욕도 없습니다. 딸 문제로 속앓이를 하는데 평소 애영씨를 부러워하던 친구 성숙씨가 딸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 후 애영씨는 일방적으로 성숙씨와 관계를 끊고 지냅니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친구들이 이유를 묻자 ‘걔가 날 싫어해서 내가 피해주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사진 제공=차봉숙

    자기처럼 완벽한 사람이 친구를 시기한다는 사실을 애영씨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시기심으로 친구를 미워하는 자기 감정을 친구에게 떠넘깁니다. 친구가 나를 시기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내가 거리를 둔다는 거죠. 내가 친구를 미워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 그 친구의 탓이라며 자기를 정당화하면서요. 이런 자기방어를 ‘투사’라고 하는데요, ‘투사’라는 마음의 방패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발동되지만 자기통찰을 가로막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방어기제입니다.

    모든 걸 내 탓이라고 하는 심리는 ‘내사’라는 방어기제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투사’와는 반대로 남의 탓도 내 것인 양 내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인데요. 무조건 다 내 탓만 하는 심리는 어린 시절 뿌리 깊은 부정적인 경험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는 생존의 모든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호해 주고 의식주를 해결해 줄 부모 없이는 아이들은 살아갈 수 없죠. 그래서 아이를 버리는 부모는 있어도 부모를 버리는 아이는 없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나빠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아이는 부모의 탓을 내사하여 내 탓으로 만듭니다. 방임되고 폭행 당해도 부모가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아이라서, 내가 맞을 짓을 해서’ 라며 다 내 탓으로 돌립니다. 부모의 이혼도 어떤 아이들은 자기 탓이라고 합니다. ‘내가 더 사랑스럽고 더 공부를 잘했더라면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요. 페어베언의 용어로 말하면 ‘도덕적 방어’인 거죠.

    근거 없이 다 내 탓으로 돌리는 또 다른 심리는 ‘통제의 환상’때문입니다. ‘통제의 환상’은 내가 나의 노력과 의지로 모든 문제와 갈등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부정적 결과의 원인이 남이나 외부 환경일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포기하거나 수용해야 하는데 그게 맘대로 되지 않으니, 내 탓으로 가져와 해결해 보려 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걸 다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을 부정하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은커녕 남의 탓에 파묻혀 자기 존재감마저 잃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산 장수인 큰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 아들을 둔 어머니는 날씨 탓을 하며 걱정근심을 달고 살았다죠. 비가 오는 탓에 작은 아들의 짚신이 안 팔리고, 해가 쨍쨍한 탓에 큰아들의 우산이 안 팔린다고 말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이 ‘탓’을 ‘덕(분)’으로 바꾸며 늘 싱글벙글했답니다. 비가 오는 덕에 큰아들의 우산이 잘 팔리고, 해가 쨍쨍한 덕에 작은 아들의 짚신이 잘 팔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탓인지를 제대로 가리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탓을 덕으로 바꾸는 것 또한 꼭 필요한 일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남의 탓을 타산지석으로 받아들이고, 내 탓 역시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탓하느라 소모했던 에너지를 보다 생산적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차 봉 숙 (무용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