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하얀 마스크 사내 눈물

    입력 : 2021.08.30 10:34

    검은 옷을 옥죄듯 입은 중년 사내는 전철에 들어서자, 흰 마스크를 벗으려다 말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빈자리를 두고 출입문 곁에 기대고 밖을 보는 사내. 눈을 천천히 힘주어 감다 뜨던 사내 눈 끝이 떨렸다. 순간, 마스크 속 그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도 억울하게 사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고 싶은 걸까? 덩달아 움직거리는 내 입술. 바닥에 떨어지는 내 단어들이 전철 덜컹 소리마다 톡톡 튀어 올랐다.

    우리는 서로 얼굴 가리고 싶을 때가 있는 거지. 예를 들면, 다른 꿈이 몸에 들어올까 마스크 모두 쓰고, 서로 숨결 싫어 쳐다보지 않을 때라든지. 네가 있던 그곳에 뭐가 있을 것 같아 숨 막고 지나칠 때라든지. 아니면, 내가 다른 곳에 오염시킬 것 같아 얼굴 가리고 재빨리 지나치고 싶을 때 말이야. 그때가 얼마나 많다고. 언제 언제냐고? 굳이 시시콜콜 예가 필요 없을 것 같아. 세상살이 중에 제 손으로 제 얼굴 가리고, ‘나는 아니오! 나만은 아니오!’라며 소리치고 싶을 때가 그 얼마나 많다고.

    내 것을 보던 사내는 한숨 쉬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래, 지금 이런 말을 하고자 함이란 이래. 얼굴 붉히는 일에 싫증이 나서 그래. 세상을 내 중심으로 살아가려면, 맞아, 그냥 좋은 게 좋게 끝나길 바라는 일이지. 그러나 좋은 게 좋다고, 오늘도 검은 옷을 입고 얼굴 붉혀 마스크를 쓰는 건, 아무리 눈을 세게 끔뻑여도 지나가는 시간 덩이를 하얗다고 말 못 하는 버릇 때문이야. 내 시간은 분명 하얗거든. 내 시간이 내 꿈이라며, 내 꿈은 하얗다고 아무리 말해도 누구도 안 믿거든. 나만 믿고 내 집까지 가야 하는 거거든.

    사내는 오물거리는 입 대신 이젠 이빨에 힘을 주었는지, 눈썹이며 눈꺼풀이 심하게 구겨졌다. 하얀 시간을 끝까지 하얗다고 보려는 듯, 하얀 눈동자를 번쩍번쩍 전철 안을 열 번, 백 번 더 휘둘렀다. 그도 나도 전철도 섰다. 그렇게 섰다 움직이길 몇 번. 승객이 점점 많아지면서, 더 볼 곳이 없어졌는지, 천정을 치켜보는 하얀 마스크 사내. 마스크 틈에서 떨어지는 그의 말토막들이 전철 바닥에 눕다가, 사람들 발 틈마다 미친 듯 굴러다닌다. 굴러다니며, 계속 나를 노려보며 뭐라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 시간이 내 마스크 때문에 하얗다고만 고집하진 않겠어. 오늘도 좋은 게 좋다고 살아온 사람을 향해서 말이야. 제멋대로 어느 때든 노랗기도 퍼렇기도 빨갛기도 한 사람에게는. 그러나 거짓은 거짓이라고 끝까지 말해야 해. 그래서 우리들 얼굴을, 몸뚱어리를, 거기에 흐르는 눈물을, 우리는 한꺼번에 하얗게 안고 안아 사랑해야 해. 계속, ‘나 몰라라’ 맞는다며 고개 돌리고 눈 감아버리면, 그래, 더 이상 얼굴 가릴 일이 없어지는 거야. 이렇게 하얗게 서서, 나라도 하얀 세상이 되길 기다려야 하는 거야.

    사내와 함께 잠깐 ‘세상이 왜 이리 갈라졌느냐’라며 전철 바닥에 늘어놓았지만, 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꿈이란 바닥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다 한 번은 하늘로 오르는 것이라고, 그저 한번 늘어놓아 본 것일 뿐. 내릴 곳을 몰랐는지, 전철 문이 열리자, 어떤 문이든 열리면 나가고 들어가고 싶은 듯, 사내가 나갔다. 나가며 뒤를 슬쩍 돌아본다. 순간, 비틀어진 하얀 마스크 사내 눈에서 고였던 하얀 눈물이 튕겨졌다. 아, 그런데, 하필, 왜 내게로 오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