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봉숙의 '내 마음과 손잡고 걷기'-20

  • 차봉숙

    입력 : 2021.10.19 10:48 | 수정 : 2021.10.19 10:55

    (20회) ‘낀 세대’의 시간

    ‘낀 세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있는 세대를 이르는 말입니다. 보통 양대 주류에 끼여 특별한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는 40,50대 직장인을 일컫기도 하지만, 가정에서는 자식과 부모를 동시에 부양하는, 대개는 50,60대를 ‘낀 세대’라고 합니다. 2019년의 통계에 의하면 45~64세 10명 중에 4명이 노부모와 성인 자녀를 동시에 부양하고 있다고 하니 ‘낀 세대’에 해당하는 인구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죠.

    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낀 세대의 기간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사회가 문명화될수록, 고스펙을 요구하는 사회일수록 교육 기간이 늘어나 성인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 늦어지고,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노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기간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두 세대 사이에 ‘끼어 있다’는 느낌은 어떤 걸까요? 양옆이 든든한 방어벽이라면 보호받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양쪽 모두를 향한 책임의식은 중압감을 가중시킵니다. 게다가 양쪽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는 소외감과 외로움이 배가됩니다. 자식 세대에게는 고루하다고 외면당하고, 노쇠하신 부모님과는 물리적인 소통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합니다.

    지영씨는 아들이 취업하자 드디어 일에서 손을 털고 시간적으로도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슬슬 남들처럼 자신을 위한 새 삶으로 재탄생한다는 '리본(Re-born) 세대'로 돌입하려는 순간,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퇴사했다는 아들의 선전포고를 듣습니다. 아들은 취준생이 되어 또다시 수험생으로 원위치한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시아버님이 뇌졸중으로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이제 겨우 자신을 위한 삶을 시작하려 했는데 온몸의 기가 다 빠져 버리는 것 같았죠. 기약도 없이 두 세대를 다시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일찌감치 아들을 분리 독립시키지 못한 자신을 탓해 봐야 소용없고, 노인 공동 부양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도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사진제공=차봉숙

    ‘낀 세대’의 고통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입니다. ‘낀 세대’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 심리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죠. 위기에 꺾이지 않고 기회로 전환시키려면 ‘낀 세대’의 이점을 잘 이용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요, ‘끼어 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요?

    중간에 끼어 있으면 ‘다시 보기’와 ‘미리 보기’가 가능합니다. 자식 세대를 통해서 자식으로서의 지난날 나의 모습을 ‘다시 보기’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보게 되면 ‘나도 그땐 그랬구나’, ‘저럴 땐 내가 우리 아이만도 못했네’라고 깨닫게 되어 한없이 한심해 보이던 자식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철없이 못되게 굴던 나를 무던히 참고 기다려 주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이제야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기도 하고요.

    말년의 부모님의 모습 보면서 다가올 미래의 내 모습을 ‘미리 보기’합니다.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 앞에서 삶에 대한 집착과 순종의 양면을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미리 보기’를 통해서 너무 늦게 깨달아 후회할 걸 앞당겨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로 받게 되죠.

    ‘낀 세대’에서 언제 해방될지 막막한 지영씨는 언뜻 펼쳐진 책장에서 다음의 글귀를 봅니다.

    ‘마음을 놓고 염려하지 말고 천천히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합당한 도리다’

    18년의 유배 시기를 다작의 기회로 삼았던 다산 정약용의 글이라 아무 반박은 못했지만 묘한 반발심이 듭니다. ‘피할 수 없는 ‘낀 세대’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너무나 지당하지. 그런데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걱정 없이 마음이 절로 놓이냐고…’ 속으로만 꿍얼대는 지영씨 앞에 다시 펼쳐지는 책장 속의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의 조각(부조) 사진입니다. 그의 손에는 저울과 칼이 들려 있네요.

    카이로스는 헬라어로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시간과는 의미가 다른데요, 예를 들어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특별한 재미와 의미가 있었던 하루는 매우 짧게 느껴지는 것 같은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신의 뜻이 실행되는 결정적인 기회의 때가 오는 시간이고 나와 깊이 있게 만나는 영적인 시간이기도 하죠.

    고행 길로만 보이는 ‘끼인 세대’의 늘어난 시간이 지영씨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될 수도 있을는지요? 기회의 신 카이로스가 들고 있던 저울과 칼을 유심히 보게 됩니다. 중간에 끼인 존재에게 필요한 일은 양쪽과 잘 구분되는 것 그리고 양쪽을 잘 넘나들며 아우르는 것의 균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울은 그 균형을 잘 맞춰주는 도구가 아닐까요? 칼은 나와 양쪽 세대의 경계를 그어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도구가 아닌지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도를 넘지 않아야 지속적인 세대 부양이 가능합니다. 이 도구들은 도움이 필요한 가족을 돌보기 이전에 또 그들을 잘 돌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자기 돌봄에 꼭 필요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내가 닳아 없어지지 않으면서, 두 세대를 적절하게 돌보는 ‘낀 세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그들의 균형감과 일정한 경계를 두고 유연하게 거리 조절하는 지혜로움을 본받습니다.

    ‘다시 보기’와 ‘미리 보기’를 통해 나날이 성장하는 ‘낀 세대’를 응원합니다.

    차 봉 숙 (무용동작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