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훈 에세이] 요양원 가는 길

    입력 : 2022.04.29 09:51 | 수정 : 2022.04.29 09:53

    지난달 초 모친을 요양원에 모셨다. TV에서 본 요양원은 노인들의 건강이 회복 불능하면 가는 곳으로 그곳에서 생을 마치는 장소였다. 필자 또한 그렇게 알았기에 가족회의에서 모친을 요양원에 모시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회의 끝에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지했다. 모친을 직접 모시는 형님을 보고 과연 나라도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부터 색소 망막 변성증이라는 병을 앓기 시작한 모친이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점차 기억력도 떨어지고 급기야 치매까지 오게 되었다.

    다행히 착한 치매이기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진 않으셨다. 그러나 모친이 야간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면서 돌보는 형님의 일상이 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야간에 서너 차례 화장실을 가고 때론 침대에서 볼일을 보시는 모친을 혼자 감당하며 밤새도록 돌보는 피로감으로 인해서 다음날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이젠 요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필자 나이 스무 살에 아버님을 여의었고 그때부터 세 남매를 혼자 키우신 어머니셨다. 그렇게 혼자 몸으로 40여 년 세월을 지내면서 세 남매를 다 출가시키신 어머니는 이젠 당신의 삶을 즐기셔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라니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 앞에 그저 눈물만 흐른다. 자주 회자하는 말로 막상 효도하고 싶어도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을 피부로 진하게 느끼게 되었다.

    다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과연 100세 시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다. 7~80을 살아도 정신이 온전하게 내 두 다리로 산천을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강이 뒷받침될 때 100세 시대의 의미가 있지, 두 다리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고 약으로 연명하면서 살아가는 100세 시대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회사에 다니면서 필자 나이대의 사람 중 십중팔구는 어떤 약이든 한, 두 종류의 약을 먹고 있다. 어떤 이는 심장약, 어떤 이는 혈관약, 좀 심한 경우에 암이라는 중증을 앓은 후 그 치료약을 복용하곤 한다.

    모친을 요양원에 모시고 2주일 후 첫 면회를 하러 갔다. 코로나 시국이라 온전히 뵙지 못하고 모친과의 대면하는 사이에 투명 칸막이가 있었다. 투명 칸막이 뒤로 보이는 모친을 보면서 그새 부쩍 늙어 보이시는 모습에 잠시 가슴이 뭉클했다. 젊음을 자식을 위해 희생했던 모친의 노년 모습이 이렇게 변한 것에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모친에 대한 연민이 한 번에 밀려왔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난 뒤의 노년의 모습은 모친과 동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대부분의 어르신이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 왜 당신 노년의 삶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필자가 같은 시대 상황이었다면 과연 자식을 위해 모친처럼 그렇게 헌신적으로 노력했을까 반문하면 솔직한 심정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몇 년 아니 몇 달을 사실지 알 수 없지만, 살아 계신 그날까지 만이라도 큰 고통 없이 편안한 삶을 살다가 가셨으면 하고 바랄 뿐인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이라 어머니 앞에선 제대로 표현 못한 말로 글을 마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