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향토기행] 전라남도 강진

봄이다. 아니, 봄이 오고 있다. 아지랑이 아른대는 산하에 새싹과 함께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우리 인간은 비로소 막막하기만 하던 빙하기가 계속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어두컴컴한 동굴이나 차가운 땅속에서 절망에 사로잡혀있던 원시인들에게 꽁꽁 얼었던 대지가 풀리는 봄은 분명 경이로운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건 인간복제까지 가능해진 21세기에도 마찬가지다.

2월 중순, 며칠 전에도 강원도쪽에선 폭설소식이 들려왔지만, 동백이벌써부터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이다. 눈 덮인 겨울에 피어나 꽃봉오리째 뚝 꺾이고도 이끼 낀 돌 위나 마른 땅에서 속으로 눈물 삼키는 동백. 우리는 이 꽃에서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오는 계절의 징검다리를 본다. 남도에서 동백이 피지 않으면 이 땅의 봄은 대체 어디로 온다는 말인가.

서남해안 끝에 자리한 전라남도 강진은 동백의 고을이다. 만덕산의 백련사 동백림은 나라 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운해 할 정도로 오래 전부터 명성을 드날렸고, 월출산 금릉경포대계곡의 동백도 제법 운치가 있으며, 고을 어디서나 한 겨울에도 붉은 동백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을 푸근하게 해주는 푸른 보리밭과 흙내음 정겨운 황토도 좋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강진으로 떠날 때마다 이토록 심장이 뛰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엔 명주실 같이 드리워진 봄햇살 아래 수백 성상을 단아하게 서있는 무위사의 극락보전이 있고,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고려청자와 그 청자를 빚기 위해 고뇌하던 이름 모를 도공들의 예술혼이 넘쳐나며, 빈부에 상관없이 사랑 받던 옹기를 빚는 노인의 손길이 있다. 또 구강포에 서서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김영랑의 시심이 거기에 있다. 무엇보다 유배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학문의 탑을 쌓은 다산 정약용의 묵향이 없는 강진 땅을 어찌 생각할 수 있으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남도는 매양 비슷한 풍경만 펼쳐져 눈 밝지 않은 이들에겐 모두 어슷비슷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다 영암 땅에 들어서며 강진이 가까워지면 금새 토끼눈이 된다. 강진의 수문장 같은 월출산(809m) 때문인데, 남도의 산답지 않게 거친 암봉들로 이루어진 월출산은 파란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이다. 보는 각도와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산이 다르게 보인다. 오늘같이 옅은 봄안개라도 피어오른 날이면 아무리 강심장의 나그네라도 가던 길 멈추고 감탄사를 풀어놓게 된다. 이보다 아름다운 수묵화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풀치재 지나서 강진 월남리로 들어서면 돌불꽃은 어느새 천불(千佛)로 변해있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산줄기엔 월출의 웬만한 봉우리들은 모두 명함을 내민다. 국도에서 벗어나 곱게 굽은 길을 따라 들어가며 천불의 품에 안기면 월남사지(月南寺址). 월출산 남쪽에 있어 ‘월남사’라는 현판을 달았겠지만, 고려 때 진각국사가 창건했고, 임진란 당시 주변의 절들이 불탔을 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역사는 알 길이 없다. 대숲과 동백나무 그늘엔 상처 입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와 삼층석탑(보물 제298호)만이 돌보는 이 없이 빈터를 지켜왔다. 진각국사비에서 나지막한 돌담을 두른 골목길을 돌아 대숲 사잇길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나지막한 돌담을 두른 골목길 안쪽에 석탑이 있다. 탑 너머로 월출산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바위불꽃이 화사하다.

강진과 영암을 오가던 옛길은 지금 13번 국도가 뚫린 풀치재가 아니라, 풀치재와 천황봉 사이의 누릿재(황치)였다. 지금 누릿재 길은 흔적이 희미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해남 우수영(右水營)을 거쳐 강진 월남 마을(月南院)~영암~천안~한양으로 이어지는 ‘해남로’의 일부였던 큰 고개다. 제주도로 유배 가던 추사 김정희와 강진으로 귀양 온 다산 정약용이 이 길을 따라와 저 누릿재를 넘었던 것이다.

다산의 시를 보면 당시 누릿재를 넘어와 이곳 월남 마을에서 쉬면서 월출산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던 모양이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우뚝 /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그러고 보니 월남에서 바라보는 월출산과 노원에서 바라보는 도봉산 줄기가 제법 흡사하다.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계곡은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 서쪽 이마께서 발원해 흐르는 계곡이다. 남쪽 사면의 계곡인 덕에 월출산에서 동백나무가 가장 많다. 평탄한 편이라 가족이나 연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거닐며 동백꽃을 감상하는 맛도 좋다. 수량이 조금 적은 게 아쉽긴 하지만, 집채 만한 바윗덩이들이 계곡을 뒤덮어 경관도 괜찮다. 들머리서 골짜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많아지던 동백나무는 1km쯤 들어간 계곡 중간쯤에서 절정을 이룬다. 꽃이 만개한 동백나무 아래 앉아 봄이 오는 소리를 듣다보니 시간도 잊을 지경이다. 산행이 아니라 동백꽃과의 만남이 목적이었으니 이쯤에서 물러 나와도 좋으리.

경포대계곡을 빠져나오자마자 무위사로 가기 위해 서쪽 언덕을 넘으면 20여만 평에 이르는 널따란 차밭이 반긴다. 현재 제다업계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태평양다원이 운영하는 차밭이다. 부드러운 곡선과 푸르름이 돋보이는 이 차밭은 월출산 암봉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바로 우리가 흔히 설록차라고 부르는 차가 여기서 생산된다.

아다시피 월출산 주변은 전통적으로 차의 명산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영암의 월출산을 비롯 나주, 강진, 무안, 함평 등에는 작설차, 고흥, 보성, 순천 등에는 차가 산출된다’고 기록될 정도로 예전부터 차로 명성을 드날렸다. 특히 도갑사, 무위사, 월남사지, 경포대계곡 주변은 여느 지역에 비해 차나무가 많이 야생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전까지 제다법도 전수된 곳이다.

이렇게 차밭을 감상하며 언덕을 넘어서면 드디어 무위사다. 월출산의 상징인 암봉을 거느리지 않고 조금은 펑퍼짐한 육산(肉山)을 배경으로 앉은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은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단아한 미학으로 유명하다. 정면서 극락보전을 보면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맞배지붕의 미학이 넘쳐난다. 처마 양끝이 조금씩 치켜 올라가고, 용마루선은 가운데를 처지게 만들어 서로 어울리게 하였는데, 용마루선 너머로 보이는 육산의 부드러운 산줄기와 참 잘 어울린다. 또 맞배지붕은 측면구조가 노출되므로 그 미관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전문가들은 ‘조화로운 면 분할로 단정한 맛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극락보전 삼존불에게 삼배하고 돌아서면 그 한쪽, 산신각과 나란히 자리한 자그마한 당우에 모셔진 석조미륵불이 이채롭다. 둥글납작한 얼굴에 두툼한 입술에서 풍기는 인상은 불상이라 하기엔 너무도 친숙하다. 마치 마음씨 좋은 동네 아줌마 같다. 첫 대면한 지 꼭 10년째인데, 그 세월에도 주름 하나 늘지 않고 언제나 수더분한 표정으로 반겨주니 볼 때마다 반갑다.

예전 같으면 무위사를 벗어난 발길은 곧장 강진읍으로 향했을 테지만, 그 전에 들를 곳이 있다. 바로 병영면(兵營面)이다. ‘병영’이란 지명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강진 동북쪽에 자리한 병영은 무려 조선 500년간 전라도 육군 전체를 호령하던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이 자리한 고을이었다. 원래 광산현(현재 광주시 송정동)에 있던 전라병영사영을 강진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전라는 물론 제주까지 총괄하는 본부였으니 소속 군인들과 몰려든 상인들로 제법 큰 고을이 되었고, 개성상인의 명성과 비교되는 ‘병영상인’이란 말도 나올 정도로 상권도 커졌다.

하지만, 한낮인데도 단층건물 짧게 늘어선 병영 중심가는 인적이 드물다. 가는 길 물을 주민도 없고, 강진의 여느 명소와는 달리 외지인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 한적한 시골 마을이 한때 전라도 육군 전체를 호령하던 고을이란 말인가. 거리 어디서도 그런 위세와 영화를 느끼기 쉽지 않다. 하긴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에 의해 병영성이 함락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후 지금까지 무려 100년 넘게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었으니…. 마을 한가운데 덩그마니 자리한 병영성은 현재 보수공사중이고, 그나마 조선 숙종 때 세웠다는 병영성 근처의 홍교(유형문화재 제129호)만이 비교적 온전한 채로 지나온 세월을 전해주고 있다.

지난해 6월 한반도 땅을 울리던 붉은 악마의 함성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 때 우리 곁에는 한 네덜란드인이 있었다. 바로 한국의 월드컵축구대표팀을 4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한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21세기 초에 이 땅을 찾아 한국인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그는 현재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병영 땅을 돌아보는 중에 다시 한 번 그의 골세리모니를 상상하며 또 다른 네덜란드인을 떠올린다.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1692). 그는 히딩크보다 350년쯤 전인 17세기 중반에 바다를 표류하다 뜻하지 않게 조선을 찾았던 사나이다. 그런데, 가장 한국적인 여정의 대명사로 꼽히는 ‘남도 답사 1번지’ 강진서 17세기 중반의 네덜란드인을 만나다니 어찌 된 일인가.

헨드릭 하멜은 1653년(효종 4년) 8월16일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좌초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스펠베르호의 기록담당 선원이었다. 당시 64명 중 생존자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해 제주에서 2년간 머물다 서울로 압송된 뒤 여러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그는 1666년 9월 다른 7명과 함께 여수에서 일본으로 탈출할 때까지 13년 28일을 조선에서 지냈는데, 그중 절반인 7년이란 세월을 강진 땅인 이곳 병영서 지냈다.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한 그는 기록담당 선원답게 조선의 지리와 풍속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난선 제주도 난파기(蘭船 濟州島 難波記)>와 부록 <조선국기(朝鮮國記)>, 곧 우리에게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책을 써 조선을 유럽에 알렸다. 하멜 일행 중 6명은 남(南)씨 성을 얻어 정착해 조선 여성과 결혼해 후손을 남겼다.

마을사람들이 ‘한골목’이라 부르는 마을길엔 수인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85호)가 눈에 띈다. 수령이 800여 년으로 추정된다니 병영성이 이곳으로 오기 전과 후, 그리고 폐영된 이후 지금까지의 고을 사연을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 은행나무는 하멜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군역도 하고 때로는 직접 밥벌이를 해야했던 하멜 일행은 처음엔 사람들 모여드는 은행나무 아래서 구걸을 하다가 노래나 춤을 보여주기도 했고, 자신들이 경험한 바깥 세계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근근이 연명했다. 또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거나 네덜란드식 나막신을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이 은행나무는 다양한 수단으로 살아가던 하멜 일행의 애환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돌을 빗살무늬식으로 세우고 층층으로 엇갈리게 쌓은 독특한 형식의 한골목의 돌담은 하멜 일행이 쌓은 것이라 한다.

마을에 전해오는 하멜 관련 이야기를 들려주던 한골목 촌로들은 “이곳도 이젠 남도답사 일번지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껄껄 웃는다. 그간 이곳이 전라병영성이 주둔하던 요지임에도 그리 주목받지 못해 조금은 섭섭했던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하지만 병영이 진정한 남도 답사 코스에 끼일 수 있는지 그 자격을 알려면 보수공사중인 병영성은 자세히 살피지 못하더라도 동쪽의 수인산(561m)을 올라가 봐야 한다. 거기엔 고려 때인 1377년경 산마루를 둘러가며 쌓은 수인산성이 있다. 능선 밖으로는 자연 성벽이고 협곡엔 돌을 쌓고 문을 냈는데, 그 안쪽 평지가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분지 안에는 커다란 멧돌, 적군을 유인할 때 사용한 인공굴, 식수로 사용했던 저수지 등이 남아 있다. 산성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어찌하여 전라병영성을 저 아래 평지 고을로 옮겼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병영을 벗어나 강진 읍내로 향한다. 하지만 직접 남진하는 814번 지방도를 이용하지 않고 면소재지서 835번 지방도를 타고 장흥으로 살짝 들어갔다가 탐진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푸른 보리밭을 훔쳐보면서 강진읍내로 들어선다.

언제 보아도 영랑생가는 정갈하다. 시인의 시심을 돋우던 사물들이 봄비처럼 가슴에 촉촉하게 적셔든다. 뒤꼍 언덕을 두르고 있는 대숲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모두 영랑의 주옥같은 시어로 들린다. 행랑채 들어서는 길의 돌담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항아리 들어선 장독은 ‘오메 단풍 들것네’를, 뒤꼍의 동백나무는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을, 앙증맞은 붉은 새싹을 띄운 모란은 유명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떠올리게 한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던 서정시의 대가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1903-1950). 그는 자신의 시심에 토대가 되었던 고향의 산하가 펼쳐지는 구강포 어귀에 서서, 모란이 피어날 찬란한 봄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모란이 필 때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

영랑의 집을 나서 다산을 만나러 가는 길. 좌우로 펼쳐지는 들판은 온통 짙푸른 보리의 바다다. 아직 2월인데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나른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남도 땅은 이미 보리싹이 제법 돋아나 있다. 남도 향토기행에서 이렇게 지평선으로 펼쳐진 푸른 보리밭을 만날 수 없다면 분명 허전할 것이다. 무위사 용마루처럼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끝없이 이어진 남도의 널따란 황토 들판. 그 붉은 색과 어우러진 푸른 빛깔의 보리밭. 청보리 내음 향긋한 밭두렁에 쪼그리고 앉는다. 저 풍요로운 푸른 물결에 돛대처럼 솟은 건 비료 뿌리는 농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학교 근처 보리밭을 발이 시리도록 밟던 기억은 아마 매운 바람에도 가끔 훈풍 걸려들던 이 무렵이었을 거다.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싱싱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보리밭. 한하운, 고은, 김용택 등 많은 시인들이 보리를 즐겨 시적 소재로 사용했다. 하지만, 시인들은 보리를 단순히 생명력 넘치는 작물로만 보지 않았다. ‘보리밭 가에서 조선낫이 / 목놓아 운다. / 작석(作石)더미 져다 부린 / 등 굽은 아버지의 지게가 / 부황난 황토 구렁에서 따라 운다.…아이들아 아이들아 / 청보리를 밟아라! / 밟으면 밟을수록 돋아나는 / 청보리를 밟아라”<임홍재 시인의 ‘청보리의 노래1’ 중에서>

청보리란 이삭 패기 전의 먹을 수 없는 보리로, 바로 보릿고개의 고통을 상징한다. 그토록 넘기 힘들었다는 보릿고개. 민초들은 전 해의 풍흉을 가리지 않고 이듬해 봄이면 그 가파른 고개를 넘기 위해 풀뿌리와 소나무껍질 등을 찾아 온 식구가 온 종일 산을 헤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정부는 벼농사를 말리고 있을 정도니….

보리밭에서 일어났을 땐 사위는 제법 어둑해졌다. 오늘 하룻밤은 다산초당 아래의 귤동 마을 주민이 되어보자. 강진은 자주 들르지만, 주로 읍내 여관 아니면 경포대계곡의 민박집에서 묵었지 다산초당과 이렇게 지척인 마을에서 눈 붙이기는 처음이다. 귤동 마을이 안긴 만덕산은 옛날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렸다 한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초당에 기거하고 있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다산에 사는 정씨’ 정도로만 알고 그렇게들 지칭했는데, 정약용은 다산을 아예 자신의 호로 삼았다.

푸른 댓잎에 무서리 앉은 이른 아침. 해송, 대나무, 동백나무 들어찬 숲은 어둑하다. 아침잠 없는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만 요란할 뿐 적막하다. 다산이 머물던 때도 이렇게 한적했으리. 오늘은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초당 한쪽에서 솟아나는 약천(藥泉) 물맛을 본다. 다산이 손수 수맥을 찾아 가꾼 옹달샘으로 좋아하는 차를 달일 때 쓰던 샘물이다. 뒤에 줄서서 기다리는 이 없으니 한 바가지 더….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시원한 기운에 정신이 맑아진다.

사람들은 다산초당에 와선 “참 좋다”고 말하지만 경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리라. 아마 의식하지 못해도 느끼게 되는 다산의 묵향 때문일 것이다. 빼곡한 나무숲에 시야 꽉 막힌 초당은 전망이 좋지도 않고 그리 아늑한 곳도 아니다. 그리고 현재 기와로 지붕을 올린 다산초당도 본디 초가였다. 이는 당시 교분이 있던 일지암의 초의선사가 다산과 함께 1812년 가을에 월출산 구경을 하고 오다가 그렸다는 ‘다산초당도’가 몇 년 전 발견되면서 확인되었다.

초당 옆 연못의 살얼음 위에 떨어진 동백꽃송이는 마치 겨울이 봄과의 싸움에서 흘린 핏방울 같다. 아니, 다산의 식을 줄 모르던 학자정신인지도 모른다. 한겨울에 피는 동백(冬柏)은 ‘겨울을 견디는 꽃’이라 해서 내동화(耐冬花)라고도 부르지 않던가. 이런 동백꽃은 유배라는 고난의 계절을 지나면서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써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던 다산의 굽히지 않는 학자정신과도 닮았다. 다산은 초당 툇마루에 앉아 겨울에도 피는 동백꽃을 보며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곤 했는지도 모른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 초입의 산등성이는 초당에서 가장 전망이 트인 곳이다. 다산은 이곳서 흑산도에 유배된 둘째 형 약전(若銓)을 그리워하며 멀리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는 천일각(天一閣)은 최근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동녘이 점차 훤해질 무렵, 백련사와 통하는 오솔길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스님이 나타난다. 스님과 합장으로 인사하고 말없이 동쪽을 바라본다. 잠시 후, 도암만 건너에서 동백꽃처럼 붉은 햇덩이가 솟아오른다. 우리는 숨소리 죽이고 일출을 바라본다. 동녘의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난 뒤 스님과 동백을 놓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역시 동백은 흰 눈 속에 피었을 때가 제격”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본다.

스님보다 느린 걸음으로 백련사 넘어가는 오솔길을 따른다.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만나기 위해 오가던 길이다. 암수 서로 희롱하는 새소리에서 봄이 가까워졌음을 알겠고, 동백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도암만 풍경은 여전히 고즈넉하다. 예전 호젓했을 길은 이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 넓어지긴 했지만, 대나무와 차나무와 동백나무 어우러져 있어 사색하며 걷기에 더 없이 좋다.

왠지 모를 쓸쓸함을 가슴에 담고 백련사에 다다르자 붉은 꽃 숨어있는 동백숲이 기다린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절을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서 창취가 사계절을 통해 한결 같은 절경’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21세기인 지금도 유효하다. 부도숲 주변의 정취가 일품이다. 붉은 꽃송이조차 이파리의 진녹색에 파묻힌다. 아름드리 동백나무에 몸 기대면 마음도 온통 녹색으로 물드는 듯하다. 그래도 동백꽃이 품은 꿀을 좋아한다는 동박새의 요란하게 지저귀는 소리에 색깔이 있다면 분명 진홍색이리라. 이 동백숲에서 붉은 기운을 느끼려면 떨어진 동백꽃이 땅 바닥을 뒤덮은 3월 중순쯤에 와야 한다.

떨어진 동백 한 송이를 들고 백련사를 나서면 길은 다시 강진읍으로 해서 도암만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진다. 거기엔 청자와 옹기가 있다. 가늘 길의 갯벌 풍경도 강진 나들이에서 결코 놓칠 수 없다. 발목까지 빠지는 건강한 갯벌에서 마을 아낙들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삼삼오오 모여 바지락 따위를 잡는 모습이 보인다. 강진의 저 청정 갯벌에선 이 외에도 참고막이나 대합 등도 난다.

특히 진상품이었을 정도로 맛좋은 대합은 강진 것이 단연 으뜸으로 꼽혀 ‘강진원님 대합자랑’이라는 말도 전해온다. 당시 대합의 주산지로는 강진읍의 덕남 마을, 칠량의 구로·봉황 마을, 도암의 만덕 마을들이 손꼽혔지만 간척사업 등으로 생산량이 많이 감소되어 이제는 매우 귀한 품목에 든다.

갯벌 풍경에 오른쪽 가슴이 뿌듯해질 즈음, 청자 도요지보다 칠량 옹기마을이 먼저 손짓한다. 예전 이 마을 사람들은 코흘리개 아이서부터 꼬부랑 노인까지 모두 옹기를 빚었다. 이들이 만든 옹기는 칠량항을 출발해 남해안 일대는 물론이고, 서해 뱃길을 따라 충청·황해도까지 올라갔고, 동해 뱃길로는 포항을 거쳐 강릉까지 팔려나갔던 명품이었다. 이곳이 옹기마을이 된 이유는 부근에 찰진 흙이 많고 뱃길로 제품을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과 세라믹 등의 재료를 이용한 그릇이 나온 이후 옹기산업은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지만, 발효식품이 발달한 한민족에게 적합한 옹기는 음식을 보관하고 알맞게 익혀 담아내기에 가장 효과적인 그릇이다.

이런 옹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건 아마도 빈부격차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평등정신일 것이다. 굳이 같은 흙으로 빚은 청자와 비교한다면, 청자는 큰 맘 먹어야 찾아갈 수 있는 북녘의 금강산 혹은 남녘의 설악산으로, 옹기는 할아버지 할머니 잠들어 계신 고향의 뒷산으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옹기를 좋아한다. 정선의 된장마을이나 광양 섬진강 매화마을의 수천 개에 달하는 옹기를 감상하는 맛도 특별하지만, 그래도 제일 좋은 풍경은 눈 쌓인 고향집 뒤꼍 장독대다.

고향의 ‘뒷산’을 다녀왔으니 이번엔 ‘설악’으로 갈 차례다. 옹기마을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20리쯤 달리면 세계에 이름 드날린 고려청자 도요지다. 강진에서 제작된 고려청자는 우리나라 미술을 대표하는 문화재다. 지금 강진 내에 국보는 무위사 극락보전 딱 한 점뿐이지만, 여기서 생산되어 다른 곳에 가있는 국보급 고려청자는 청자어룡형주자(국보 제61호), 청자과형화병(국보 제94호) 등 어림잡아도 수십 개가 넘고, 일본이나 유럽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된 것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추측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렇게 대우받는 예술품이 모두 이곳의 흙과 불로 빚은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밟고 있는 황토조차 가벼이 보이지 않는다.

강진이 이렇듯 주요한 청자 도요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해상왕 장보고의 영향이 컸다. 동북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그는 중국의 청자 기술이 청해진과 가까운 강진 땅에 자리잡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강진 청자 요지의 핵심은 대구면의 용문천 일대다. 용문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해안부터 상류 정수사 밑 운곡 마을까지 도요지는 산재해 있다. 이름 없는 도공들을 위해 세운 비석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동백 몇 그루 꽃을 피우고 있다. 비석을 쓰다듬으니 돌은 차갑지만 그들의 뜨거웠던 예술혼이 전해오는 듯하다.

청자는 흙과 불로 빚은 예술품이다. 물레 앞에 앉아 정성으로 빚은 도자기를 초벌구이하고 거기에 문양을 새겨 넣은 뒤 1,200~1,400℃쯤 올라가는 뜨거운 가마 앞에서 도자기가 완성되기를 진지하게 기다리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보잘 것 없던 흙이 도공의 손을 거쳐 뜨거운 불로 달구어져 아름다운 도자기로 탄생하는 과정은 경이롭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신비스런 비색이 나오지 않아 모두 깨버린 후 상심한 마음으로 찾아갔을 그 절집이 바로 용문천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정수사(淨水寺)다. 거창한 유물은 남아있지 않아도, 백배 천배로 치성 드리며 마음 정갈하게 갈무리하던 도공들의 고뇌가 서린 절집이다.

다시 용문천을 되짚어 내려가다 바다와 만나 남쪽으로 달리면 강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마량항이다. 수군진이 있을 당시 제주도·노화도·완도·소안도 등 주변의 섬에서 기른 말을 이곳에서 받아 한양으로 올려 보냈는데, 배에서 내린 말들에게 먹이를 주던 곳이라서 마량(馬良)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번창했었고, 현대에 와선 주변 섬들을 오가는 해상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강진에서 일출 구경이 다산초당의 천일각이라면, 일몰감상은 마량으로 꼽힌다. 까막섬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는 강진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저 붉은 노을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기엔 이번 강진에서 만난 모든 게 담겨있는 듯하다. 무위사 극락보전 측벽의 황톳빛 같기도 하고, 초당에 머물던 다산의 식지 않는 학구열 같기도 하고, 백련사에서 가슴에 담았던 동백꽃 같기도 하고, 재벌구이 하느라 온도를 맞추는 화목가마의 불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영랑이 애타게 기다리던 봄날의 그 모란꽃 같기도 하고….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