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원도 고성

▲ 고성의 대표적 관광지인 화진포는 이승만 별장과 김일성 별장이 자리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몇 해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지로도 인기 높다.

고성으로 간다. 그 고을로 가려면 인제와 원통을 지나게 마련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로도 벅차던 그 길이 왕복 4차선 도로로 뻥 뚫렸으니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하던 군복 입던 시절의 쓸쓸한 우스갯소리도 이젠 전설이 되고 말았는데, 고성 가는 길에 이 얘기를 떠올리게 된 건 이 고성땅만큼 남북분단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살이라는 게 언제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군사분계선으로 갈라진 남한땅 동북쪽 끝자락을 찾아가는 나그네는 백두대간 줄기가 가까워지면서 적어도 두 번의 갈등을 겪는다. 44번 국도와 46번 국도가 갈리는 한계리 삼거리, 그리고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리는 용대리의 ‘바람도리’ 삼거리는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결국 세상에 잘 알려진 한계령·미시령·진부령 길 중 어느 길을 택하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이번엔 출발 전에 이미 미시령을 먼저 넘기로 굳게 결심한 터.

▲ 1.미시령의 울산바위 전망대. 누구나 한번쯤 들러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다. 2.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 3.5월 초순에도 미시령 정상에는 잔설이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미시령의 원래 이름은 미시파령(彌時坡嶺)이다. 이 고개는 인근 큰 고개들과 함께 옛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그래봤자 당시엔 괴나리봇짐 지고 겨우 지날 만한 오솔길이었다. 차도 드나들 수 있는 큰 길이 뚫린 건 1960년대에 들어서다. 20세기 중반에 동족끼리 박 터지게 싸우느라 못 가게 된 금강산의 빈 자리를 채워주던 설악산 가는 길이 많이 단축되어 그 갈증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어디 대청봉(1,708m)만이 설악이요, 비로봉(1,638m)만이 금강이겠는가. 예전엔 이 미시령 북쪽의 신선봉(1,204m)도 금강의 품에 속했다. 이 고개 북쪽에 있는 진부령에 안긴 건봉사도 ‘금강산 건봉사’요, 미시령 품에 안긴 화암사도 ‘금강산 화암사’란 현판을 달았으니 한반도 제일의 명산인 금강의 오지랖이 넓기도 참 넓다. 또 미시령 남쪽의 백담사와 신흥사는 들어앉은 곳을 설악산이라 여기니, 옛사람들은 이 미시령을 경계로 금강과 설악을 나눴던 것이다. 그래서 미시령 넘는 길은 왼쪽 어깨엔 금강을 얹고 오른쪽 옆구리엔 설악을 끼고 가는 길이기도 하다.

남녘은 벌써 철쭉도 지고 여름이 문턱으로 들어서려 서성이는데, 이 고갯길엔 아직도 겨울의 그림자가 남아있다. 참나무의 연둣빛 새싹과 연분홍 벚꽃과 붉은 진달래꽃이 옹기종기 모여 소곤거리는 한쪽 응달엔 아직도 겨울의 하얀 옷자락이 드리워져 있으니 동북아의 작은 땅덩어리, 그것도 반으로 동강 난 이 한반도를 너르다고 해야 하나….

미시령 고갯마루에선 언제나처럼 거센 바람이 제일 먼저 나그네를 맞이한다.

‘아 바람 / 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 / 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포기 하나 / 경전(經典)의 글귀 하나 없이 / 미시령에서 흔들렸다 //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 설악산이 흔들리고 / 내 등뼈가 흔들리고 / 나는 나를 놓칠까봐 /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황동규 시인의 ‘미시령 큰 바람’ 중에서)

몸을 날려버릴 듯한 그 세찬 바람에 옹색한 가슴에 담겨있던 미움이나 허욕 같은 세속의 녹(綠)을 실어보낸다. 백두대간을 끊은 총부리도, 상처만 남기는 이념도, 황철봉 너덜지대에 숨어있는 반달가슴곰의 쓸개를 탐내는 밀렵꾼들도 이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

미시령을 넘어서면 곧 고성땅이다. 높새바람을 안고 바다로 내려가는 굽잇길에 만나는 울산바위. 단일 바위덩이로는 남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바위다. 조물주가 금강산 빚을 때 멀리 울산서 올라왔으나 마감시간에 맞추지 못해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의 바위다. 그래서 한때 울산서 소유권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현재 울산바위는 고성과 속초의 경계를 이룬다. 어쨌거나, 만약 이 미시령에 ‘설악의 울타리’ 같은 저 울산바위가 없었다면 미시령은 정녕 바람만 가득한 외로운 고갯길이었을 것이다.

미시령 내려가는 길은 울산바위 보려 한눈팔기 십상이라 늘 조심스럽다. 한번 보면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울산바위 구경하기가 이 고갯길에선 마땅치 않지만, 한 뼘도 아쉬운 판에 전망 좋은 곳에 간이주차장을 마련해놓은 건 운전자들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울산바위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토성면 신평뜰에 서면 고성땅에 태를 묻고 종내는 설악의 품에 안긴 이성선(李聖善·1941-2001) 시인이 그리워진다. 자연과 대화하며 선(仙)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시단의 평을 듣는 시인이 원하던 그 세상은 모두 저 설악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설악의 시인’으로 부른다.

‘나뭇잎 하나가 //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 툭 내려앉는다 //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 너무 가볍다’(이성선 시인의 ‘미시령 노을’)

신평뜰에 앉아 신록으로 물드는 울산바위에 취해 있는데, 산새 한 마리 포로롱, 하고 울산바위로 날아오른다. ‘새는 산속을 날며 /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는 이성선 시인의 짧은 시 ‘새’를 곱씹어보며 울산바위를 뒤로한다. 신선봉(1,204m) 자락의 화암사 들렀다 나오면 길은 시인의 생가와 비석이 있는 성대 마을 나지막한 언덕을 돌아 바다와 만나는 7번 국도로 이어진다.

신선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이 동해와 만나는 지점의 절벽 위에 자리한 청간정(淸澗亭). 그 난간에 기대 정겨운 파돗소리를 듣는다. 옅은 저녁 안개 사이로 들려오는 파돗소리와 멀리 서남쪽으로 수묵화처럼 아스라한 펼쳐진 울산바위. 하지만 속절없는 시간 따라 해는 어느덧 백두대간 머리에 걸려 있다. 곧 어둠이 찾아오고 이어 방파제의 빨간 등대에도 길 잃은 배를 이끌어줄 등불이 켜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관동팔경의 하나인 이 청간정을 다녀갔다. 1520년에 처음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정철(鄭澈·1536-1593)이 ‘관동별곡’을 지을 당시인 1580년에도 여기에 정자가 있었을 텐데, 정철은 이 청간정을 고성 삼일포 이야기에 섞어서 은근 슬쩍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정철이 여기서 동해와 울산바위가 어우러지는 풍경을 관심 있게 보았다면 분명 한 수 읊었을 텐데….

그 후 1662년 중수할 때는 당시 금강산에 머물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들러 친필로 ‘청간정’이란 현판을 걸기도 했다. 지금은 1955년 보수를 지시했던 이승만 전대통령의 현판이 걸려있고, 그 옆에는 재보수를 지시했던 최규하 전대통령의 시판이 걸려 있으니, 20세기 말에도 제법 끝발을 날린 셈이다.

땅거미 덮이는 청간정을 내려와 아야진 선창가를 기웃거리다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탁주 한 잔 들이킨다. 해가 뜰 때까지 갯바위에 앉아 있고 싶었지만, 5월 초순의 바닷바람이 제법 매섭다.

▲ 1.갯바위에서 노니는 아이들. 2.해안 덕장에 널어놓은 이면수어 너머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아름답다. 3.거진읍 '쌔비촌'은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수동면 사비리에서 살다가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허름한 민박집에서 밤새 뒤척이다 조우한 이른 아침의 아야진(我也津)항. 이곳은 눈빛처럼 새하얀 등대와, 아이들도 앉아 놀기 좋은 갯바위와, 거기에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가 정겨운 항구다. 아야진은 이런 소박한 풍광뿐만 아니라, ‘이면수어(속칭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잘 잡히는 곳이기도 하다. 갯바위엔 낚시꾼들이 죽 늘어서 있다. 트렁크에서 낚싯대를 꺼낼까 궁싯거리다 그냥 구경만 한다.

이면수어는 새치의 다른 이름으로, 큰 놈은 이면수어, 작은 놈은 가리쟁이라 나눠 부르기도 한다. 이 특이한 이름은 한 어민에게서 유래한다. 옛날 관북지방의 바닷가에 한 어부가 있었는데, 그는 고기잡이를 나가기만 하면 매번 이 고기를 많이 낚아왔다. 그러나 아무도 이 고기의 이름을 몰라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임연수가 낚은 물고기’로 부르다가 나중엔 그냥 ‘이면수어’라 했다고 한다.

이면수어는 고등어처럼 식탁에 자주 올라오는 어종인데, 군대생활을 해본 남자들이라면 고개를 저을지 모르나, 소금구이를 하거나 기름에 튀기면 껍질 맛도 좋고 살코기는 비린내도 없어 ‘민간인’들은 아주 좋아한다. 군복 입던 시절에 이면수어가 왜 맛이 없는지 궁금했는데, 당시 주방에 있던 동기는 “요리맛은 솜씨와 양념이 좌우한다. 그런데 대량의 반찬을 정해진 시간에 맞춰야만 하는 군대에선 솜씨 발휘하기가 어렵고, 양념도 소금·마늘·고춧가루·파·양파 정도가 전부인데다가 쪄서 익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니 21세기 ‘민주 군대’의 이면수어 맛은 어떨지 참 궁금하다.

갯바위의 낚시꾼들에게 눈인사로 작별하고 아야진을 벗어나면 곧 교암리 천학정(天鶴亭)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신록조차 부러워할 바닷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자그마한 정자 위를 굴러다닌다. 정면·측면 각각 두 칸짜리 천학정은 1931년 처음 지었으니 역사가 길지도 않거니와 거창한 유적지도 아니다. 그래도 노송과 어우러진 벼랑에 자리잡은 덕에 3km쯤 남쪽에 있는 청간정과도 어깨를 맞댈 만큼 바다 풍광이 좋다. 무엇보다 ‘정자(亭子)’라 하면 왠지 양반문화의 잔재로 여겨져 ‘큰 기침’이 더 어울릴 듯한데, 이 천학정은 지어질 때부터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요, 바닷가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로 역할을 톡톡히 하니 볼 때마다 정감이 간다.

천학정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7번 국도를 따라 북진하면 곧 물 맑은 송지호(松池湖)다. 호숫가로 다가가자마자 투명한 물속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혹 전설의 금방아라도 발견하면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된 것보다 낫지 않을까?

인근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1,500년쯤 전에 이 호수는 모두 정거재(鄭巨載)라는 영감의 문전옥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영감이 얼마나 포악한 구두쇠였던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지는 못할망정 괴롭히기까지 했다. 결국 구걸하러 같다가 영감의 잠을 깨웠다고 매만 맞고 쫓겨난 장님 부녀의 사정을 들은 노승이 해결사로 나섰다. 영감은 그러나 노승의 마지막 시험인 시주를 거절했고, 노승은 쇠절구를 논 한가운데에 던지고 사라졌다. 그러자 그곳에서 물이 콸콸 솟아나기 시작해 결국 이 호수가 됐다는 것이다. 지금도 맑은 날 오봉산에 올라 송지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자집의 누런 금방아가 보인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 금방아가 탐이 나서 호수에 뛰어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수백 명이나 된다고…. 아무려나 금방아가 목숨보다 중할까? 그렇다면 발 둥둥 걷어붙이고 재첩이나 몇 마리 건져 저녁에 시원한 국이나 끓여먹을까? 논에서 써래질 하던 노인이 나그네를 물끄러미 보며 말하길, “재첩은 여름이 돼야 잡을 수 있지” 한다. 그렇다면….

▲ 1.배를 타고 미역을 따러 나가는 초도 해녀들. 2.봄농사 준비에 한창인 왕곡 마을 주민. 송지호 서쪽에 자리한 왕곡 마을은 북방식 전통한옥인 양통집 20여 동이 유일하게 밀집 보존되어 촌락을 이루고 있다. 3.이른 새벽에 화진포 해안에서 투망을 던져 전어를 잡아가는 어부. 4.싱싱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대진항의 이른 아침 풍경.

이 송지호엔 금방아와 맛 좋은 재첩도 있고 천연기념물인 고니도 여기서 겨울을 나지만, 진짜 보물은 따로 있다. 바로 송지호를 끼고 있는 주변 마을에 남아있는 북방식 전통가옥인 양통집들이다. 죽왕면 삼포리의 어명기 가옥, 인정리의 이덕균 가옥, 오봉리의 함정규 가옥 등이 모두 송지호 반경 2km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삼포리 순포 마을의 어명기 가옥으로 들어서는 솔밭길은 20~30m쯤으로 비록 거리는 짧아도 꽤 정감이 넘친다. 집주인의 안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꾀꼬리 지저귀고 송홧가루 떠도는 솔밭 사잇길을 들어서면 영동 북부지방의 부유층 가옥이 나타난다. 집도 깔끔하고 낡은 화장실과 방앗간을 최근 보수하는 바람에 ‘급조된 생가’ 냄새가 조금 풍기지만, 디딜방아의 닳은 흔적에서 250여 년 세월의 더께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집은 역사만큼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1946년 토지개혁 때 북한은 이 집을 몰수하여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이용했고, 한국전쟁 때는 국군 제1군단사령부 병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명기 가옥에서 오봉산과 송지호를 에돌아가면 왕곡 마을이다. 양통집 2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통마을답게 들어서는 입구에 솟대라도 서있었을 법한 솔밭에서 마을의 유래가 느껴진다. 대부분 19세기를 전후해 건립한 것들이라 하니 적어도 200년 내외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송지호로 흘러드는 실개천을 끼고 양쪽으로 자리잡은 집들은 거의 남향. 담장도 높지 않고 마을길과 연결되는 앞뜰이 개방적이며 시원스런 데서 우리 전통 마을의 인심을 살필 수 있다.

산자락 고추밭에서 고추모종을 심는 할아버지와 텃밭에 손수 농약을 뿌리는 할머니도 보인다. 새로 집을 짓고 짚으로 엮은 이엉을 지붕에 얹는 노인들은 신이 나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웬만한 지역에선 이엉 잇는 기술이 벌써 끊겼지만, 왕곡 마을은 아직 이 기술을 가진 노인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 1.미시령 정상에 있는 박제된 반달가슴곰과 기념사진을 찍는 아이들. 2.짚으로 엮은 이엉을 지붕에 얹는 왕곡 마을 노인들. 3.왕곡 마을엔 굴뚝 위에 항아리를 얹는 전통이 전해져온다.

그런데, 초가집이나 기와집이나 모두 굴뚝에 항아리를 얹은 게 특이하다. 굴뚝은 대부분 사랑방 측면 벽 가까이 붙어 있는데, 전체적으론 1.2~1.5m쯤의 높이로 밑이 넓고 위가 약간 좁은 원통형이다. 재료는 작은 자연석이나 기와를 흙과 함께 섞어 차곡차곡 쌓아 매우 정감 있다. 그리고 굴뚝 맨 위엔 커다란 항아리를 얹어놓아 보기에 제법 좋다. 주민들은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이렇게 굴뚝에 항아리를 쌓는 전통이 전해왔다고 말한다. 유래를 묻자 개울 옆에 사는 아주머니는 비 맞지 말라고 얹은 거라 하고, 큰길가에 사는 할아버지는 연기 잘 빨아들이라고 올린 거라 하는데, 별 이유는 없다는 게 중론이다. 맨처음 굴뚝에 항아리를 얹은 이는 분명 미적 감각이 아주 뛰어난 분일 것이다.

왕곡 마을을 나서면 이제 고성 남쪽은 어느 정도 둘러본 게 된다. 7번 국도로 화진포로 향하다 간성에서 진부령쪽으로 길을 잡고 건봉사로 향한다. 이 절집은 돌아가는 길에 들르려했지만 새삼스레 오늘이 사월초파일임이 생각났다. 민통선 안에 자리한 건봉사(乾鳳寺)는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절집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 늘 통행이 가능하지만, 1989년까지만 해도 민간인들은 오늘 같은 사월초파일에만 출입할 수 있었던 절집이다.

▲ 저녁놀에 물들어 가는 화진포호. 김일성 별장 부근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지난 여름 홍수에 건봉사 앞으로 흐르는 북천이 대부분 엉망진창이 되었는데도 건봉사는 잘 있었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유일하게 재난을 피해 이 절집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불이문도, 보물로 지정되자마자 졸지에 닥친 물난리에 적잖이 당황했을 능파교(凌波橋)의 아리따운 자태도 여전했다.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를 친견한다. 어리석고 의심 많은 이 나그네가 양산 통도사에서도 볼 수 없었고, 영월 법흥사에서도 못 만나고, 정선 정암사에서도 찾지 못했으며, 평창 월정사에도 없었던 부처의 진신사리를 오직 이곳에서만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건봉사에서만 볼 수 있는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 8과. 치아사리를 지키고 있던 노스님이 들려주는 사연은 길다.

신라시대에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양산 통도사에 모셨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를 강탈해갔다. 사명대사는 정유재란 후인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이 때 사명대사는 진신사리도 다시 찾아와 이곳 건봉사에 모셨다. 그런데 통도사 스님들이 반환해줄 것을 청하자 진신사리는 통도사에 보내고, 이곳 건봉사엔 치아사리 12과를 모셨다.

한국전쟁 후엔 도굴꾼들이 모두 훔쳐갔으나 도중 그들의 마음이 바뀐 덕에 그중 8과는 되찾았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되찾은 8과 중 5과는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전시했고, 나머지 3과는 적멸보궁 깊숙이 모셔져있어 누구도 찾지 못한다.

건봉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사와도 관계가 있는 절집이다. 만해 스님은 한때 건봉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면서 <건봉사지>를 저술했고, 1906년 봉명학교를 세워 식민시대의 민족사상과 계몽교육의 꿈을 펼치기도 했다.

올 봄에 새로 출간된 <금강산 건봉사 사적>(도서출판 동산법문)은 건봉사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기록이다. 만해 스님이 1928년 건봉사 사적을 편찬한 이후 75년만에 나온 이 책에 의하면, 건봉사는 한국전쟁 전만 해도 766칸의 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만해 스님이 출가한 해가 통설로 알려진 20대 중반의 1905년 설악산 백담사가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1904년 건립된 ‘만일회연기비’ 탁본에 이미 만해 스님의 당호와 법명을 함께 적은 ‘용운봉완(龍雲奉玩)’이 기록돼 있다. 법명은 출가하면서 받지만 당호는 보통 큰스님에게 붙여지는 것이어서 이 비가 건립될 당시 25세였던 만해가 이를 받으려면 훨씬 전에 출가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 1.진부령 흘리에서 본 북녘 백두대간. 민통선의 칠절봉(1,172m)에서 향로봉(1,296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굳세다. 2.건봉사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 3.전망대에서 북녘 땅의 해금강을 바라보는 관광객들. 4.아야진 항구의 하얀 등대와 어린이.

봄 깊어 가는 사월초파일날 절집에서 세존과 사명당과 만해선사를 만나고 나서는 길에 기쁨보다 아쉬움이 남는 건 어찌된 일인가. 군인도 아닌 나그네가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절집을 잠깐 보고 나왔다 해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이 땅 허리엔 아직도 들어갈 수 없는 철조망이 견고하기만 한데…. 이 분단선이 만들어진 시대에 남북한 최고 권좌에 앉아있던 인물들이 여름에 쉬어갔다던, 그래서 아직도 그들의 별장이 남아있다는 화진포로 가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싶었다.

그런데, 발길은 고성에서 가장 큰 항구 거진항으로 먼저 끌린다. 명태로 유명한 항구 풍경 때문이 아니다. 거진항 뒤쪽의 산비탈엔 코딱지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이 있다. 바로 남과 북의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수동면 사비리에 살다가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사는 ‘쌔비촌’이다. 경치 좋은 남강 기슭에서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살던 수동면 사람들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서로 다른 운명을 택해야만 했다. 반쯤은 북에 남고 나머지는 바지게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건봉령 넘어와 대진, 거진, 간성 같은 고을의 산비탈 임자 없는 땅에 허름한 집을 짓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날을 기다려 왔다.

‘쌔비촌’ 사람들이 고향과 직선 거리로 15km도 안 되는 곳에 터를 잡고 오늘 내일 하며 기다린 게 벌써 5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명절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는 나그네가 어찌 알겠는가. 저 앞산 너머에 있는 고향을 못 가는 실향민의 한숨을-. 거진항 부두에서 명태를 나르면서도 기름진 땅 펼쳐진 고향땅 생각에 웃음을 잃지 않던 여유를-. 그리고 통일이 되면 꼭 선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그 심정을….

화진포에 도착했을 땐 저녁노을이 해당화 꽃에 내려앉고 있었다. 황금빛 물결 찰랑이는 호수를 끼고 돌면 거센 파도 몰아치는 해안이다. 고성이 분단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고을이기는 하지만, 김일성 별장과 이승만 별장이 남아있는 이 화진포는 백두대간의 마지막 고개인 진부령, 민통선 안의 건봉사와 금강산이 보이는 통일전망대, 최북단 명파 마을 등 고성땅에 드리워진 여러 비극들의 원인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곳이다.

솔밭 드리워진 고운 백사장을 거닐면서 호수와 바다의 멋들어진 조화에 감탄하다가도, 문득 이곳에 별장을 짓고 여유 부리던 그들이 미워진다. 화진포 노을이 사라지자 어둠이 해당화를 덮는다. 이젠 호수 갈숲에 몸을 숨기는 저 물새들처럼 잠자리를 찾아야 한다.

화진포 근처에서 소주 한 잔 들이키고 오징어 다리 씹으며 당시 최고 권력자들처럼 잠을 자볼까, 아니면 최북단에 있다는 명파 마을까지 내쳐 올라가볼까 고민하는데, 슈퍼 아주머니가 “바다도 가깝고, 일출도 잘 보이는 방이 있다”며 발길을 잡는다. 그러나, 이미 바다는 검은 커튼 뒤로 숨어버렸고, 이튿날 아침 일찍 눈을 떴는데도 날이 찌뿌둥해 일출도 볼 수 없었다.

초도 마을 해녀들이 새벽 같이 미역을 채취하러 나가는 광경을 보고 졸린 눈을 비비며 화진포 백사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거기엔 서울서 밤새워 달려온 듯한 두어 가족이 역시 졸린 눈으로 백사장을 거닐고 있다. 그런데, 백사장에 한 남자가 무언가를 둘러매고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바다를 주시하고 있다. 바다를 특이하게 즐기는 남자라 생각하며 그에게 다가가는데, 그가 갑자기 밀려드는 파도를 향해 무언가를 던진다. 투망이다. 부리나케 뛰어간다. 허탕이다. 그래도 한쪽에 있는 살림망에는 어른 손바닥만한 전어가 가득하다.

나그네는 투망 안에 전어가 와글와글 걸리는 장면이 보고픈데, 시간을 살피던 그는 잡은 전어를 둘러매고 어디론가 향한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대진항. 이른 아침의 대진항은 활기가 넘친다. 우럭, 아구, 쥐치, 도미, 청어…. 상인들에게 에워싸여 눈 깜짝할 사이 가격이 매겨지는 생선들은 눈을 꿈벅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성질 급한 숭어들은 대야에서 막 튀어나와 어판장에서 펄떡이지만,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그네도 덩달아 흥에 겹다. 마치 항구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한 마리 거대한 생선 같다.

어느덧 입찰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이름도 좋은 만선호가 부두에 배를 대고, 다시 입찰이 시작되면서 상인들 사이에선 긴장감이 감돈다. “오늘은 도미가 많이 잡혔네.” 수확량이 많으면 좋지만 그만큼 또 가격은 조금 내려가게 마련. 그래도 봄햇살에 검게 그을린 어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 1.붉은 해당화 곱게 피어난 화진포호. 2.건봉사 능파교의 아리따운 자태. 2002년 보물로 지정됐다. 3.철로는 사라지고 상처뿐인 빈 교각만 썰렁하게 서있다. 명파 마을에선 분단의 아픔을 실감할 수 있는 이런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통일안보공원에서 출입신청서 쓰고 7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달린다. 금강산 가는 길이건만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더 이상 제 역할을 못하는 철로 교각엔 총알 자국이 패였고, 눈에 보이는 산기슭은 온통 철조망뿐이다. 통일전망대 검문소 직전에 있는 현내면 명파리는 남한의 최북단 마을에서 긴장된 마음을 잠시 늦춘다. 이 마을은 모든 게 ‘최북단’이란 수식어로 통한다. 명파초등학교는 최북단 학교요, 명파 해수욕장은 최북단 해수욕장이다. 또 식당도, 민가도, 슈퍼도, 공중전화기도….

나그네는 최북단 슈퍼에서 담배 한 갑을 사서 최북단 공중전화기 앞에 기대어 담배를 피운다. 언제나 이곳이 ‘최북단’이라는 수식어가 없어지고, 예전처럼 그냥 금강산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해안 마을이 될까. ‘최북단’ 주유소에서 72ℓ짜리 연료통에 기름도 가득 채웠다. 통일전망대까진 10km. 이 정도면 더도 덜도 말고 1ℓ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나그네는 남은 71ℓ로 온전히 이어진 7번 국도를 따라 오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하여 금강산 둘러보고, 원산항에서 회국수를 먹고, 북청 물장수에 청해 목을 축인 다음 두만강 만나면 노 젓는 뱃사공의 안부 묻고 강을 거슬러 거슬러 7번 국도의 종착지인 온성까지 바람처럼 달리고 싶다.

그러나 그건 아직 꿈일 뿐 길은 통일전망대에서 멈춘다. 눈앞으론 손에 잡힐 듯이 해금강이 솟아있다. 그 주변의 사자바위는 사자가 갈기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달리는 듯한 형상인데, 북한의 고성읍 근처에서 보면 말의 형태고, 바다에서 보면 코끼리를 닮았다 하여 만물상이라던가. 틈날 때마다 찾는다는 한 실향민의 손끝에 말무리반도, 해만물상, 현종암, 부처바위, 백바위가 줄줄이 걸려든다.

구선봉 아래쪽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로 유명한 감호(鑑湖)가 살짝 보인다. 아직도 그들이 거기에 있을까? 선녀에게 먼저 묻는다. “선녀여, 호숫물이 여전히 맑습니까?” 감호 물살이 잠시 흔들리는 듯하더니 어디선가 어여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물은 수정같이 맑으나 아직 목욕하긴 차가워서….” 다시 나무꾼에게 묻는다. “하늘나라에서 선녀와 행복하게 사시오? 아니면 지붕에서 우는 수탉이 되었소?” 호수 근처에서 들려오는 굵은 목소리. “직접 와서 보시오.”

고개 떨구고 앞을 내려다보니 비무장지대 안엔 동해선 임시도로에서 작업중인 포크레인 한 대가 열심히 땅을 파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9월엔 휴전선에 가로막혔던 이 도로를 연결하는 기공식도 열렸고, 지난 3월엔 사상 최초로 저 임시도로를 통해 북측 공사현장을 확인하는 방문단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도 남한쪽으론 공사차량이 번잡하게 드나들지만 정치상황이 시시각각 다르니 언제 저 길이 온전히 뚫릴지는 알 수가 없다.

금강산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 해안 철망에 걸리지 않은 바람이 육지에 닿자 백사장 키 작은 소나무에서 풀썩, 송홧가루가 날린다. 비무장 지대에도 봄이 왔는가? 선녀의 대답이 귓전을 맴돈다. “아직 목욕하긴 차가워서….”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