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Screen] 섬진강 구담마을

▲ 아름다운 시적의 주무대였던 구담 망르 당산나무 앞 둔덕. 마을 주민 김옥순씨가 손주 준용군과 나와 앉았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말미암은 죽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그런 것으로 점철된 6.25 전후한 시절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다룬 한 영화의 제목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무슨 추억이든 오랜 세월이 지난 뒤면 아름다워진다는 기이한 시간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 때의 아픔을 다룬 영화의 제목을 아름다운 시절이라 한 것은 다분히 역설의 효과를 노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어떤 화면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비록 괴롭고 아픈 시절이었지만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고 감독은 정성들인 화면과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말하려 한 것 같다.

감독은 이 영화에 적합한 로케이션 장소를 고르기 위해 7개월 동안 스태프를 동원해 곳곳을 뒤졌다고 한다. 이렇게 각별히 정성을 들인 덕으로 1998년 영화학과 교수인 이광모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영화라는 이 ‘아름다운 시절’은 대종상의 작품상 감독상 등 6개 부문, 도쿄영화제 금상 등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었다. 이 영화의 핵심 배경지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의 구담과 천담 마을이다.

실제로 가보면 조명효과를 보태어 찍은 원래의 영화 화면보다 못한 것이 대개의 영화촬영 현장이다. 그러나 이곳 섬진강변의 구담 마을은 영화 속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섬진강물 내려다뵈는 숲속 둔덕

섬진강, 하면 전남 구례~하동 간의 지리산 남쪽 기슭을 떠올리지만, 섬진강 줄기는 멀리 전북의 북쪽 구석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섬진강 상류부의 외진 강변에 구담 마을은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구담리 찾아가는 길은 우선 한갓진 멋이 있었고, 가까워지면서는 아름다워졌다.

전주쪽에서 27번 국도를 따라 구담 마을을 향해 남하하다가 섬진강 물줄기를 막아 만든 옥정호라는, 이름처럼 고운 호수를 만났다. 호수 중간에 걸쳐진 운암대교 옆에 차를 멈추고 한동안 호수를 바라보았다. 산릉이 깊거나 얕게 들이고 내기를 거듭한 호안과, 옅은 구름장을 투과해 수면에 밝은 재색의 막으로 내려앉은 햇살, 무수한 신록의 가지들을 화관인양 얹고서 찐빵처럼 붕긋하니 수면 위로 솟아오른 작은 섬-. 이들이 어울려 이룬 옥정호 풍경은 이제껏 보아온 이 땅의 그 수많은 호수들 중 압권이었다. 강이 아름다우면 그것을 막아 만든 호수도 아름다운 것인가.

▲ 구담 마을 당산나무 숲속에는 영화촬영 현장비석이 세워져 있다.

임실군 강진면 소재지에서 우리는 곧장 직진, 717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5km쯤 달려 이윽고 고인 호수 아닌 흐르는 강 섬진강을 만났다. 저 앞에 강을 가로질러 걸쳐둔 다리가 보였다. 그 다리로 강을 건너면 맞닥뜨리는 마을이 천담 마을. ‘아름다운 시절’의 주요무대였던 방앗간이 섰던 마을이다.

물레방앗간이 아니라 제법 큰 ‘근대식’ 기계방앗간이지만, 양철은 녹슬고 벽에 구멍도 난 오래된 방앗간으로서, 영화 속에서 창희가 자기 어머니와 미군 하사가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목격하는 현장이다. 그 후 방앗간은 그 미군하사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는 사이 불길에 휩싸이며 미군과 여자는 죽고, 창희는 사라진다. 줄거리가 이러하기에 천담 마을 방앗간은 불 타고 없다.

영화 속에서 방앗간으로 미군 지프차량이 달려가던 천담 마을에서 구담 마을까지의 강변 길은 비포장이었지만, 지금은 새까만색의 아스팔트로 말끔히 포장돼 있다. 가을이면 갈대밭이 바다처럼 뒤덮는다는 강변을 따라 도로 끝까지 간 곳-거기가 구담 마을이었다. 마을회관 옆에 승용차 여나믄 대는 댈만큼 널찍한 주차장까지 마련돼 있다. 거기, 마을회관 앞 길로 따라 들자 곧 아름다운 시절 속의 그 아이들이 놀던 공터였다.

당산나무를 비롯해 여러 그루 고목이 시원한 숲그늘을 드리운, 평상을 서너 개쯤 펼쳐놓아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넓고 평평한 둔덕 공터-. 거기서는 섬진강 상류를 이룬 강물 굽이가 푸나무서리로 내다보였다. 강 건너의 용골산 중턱으로는 솜사탕 구름이 걸려 머무르고 있다.

▲ 산비탈에 자리잡은 말끔한 분위기의 구담 마을.

구담(九潭)이란 마을 이름은 저 앞 개울에 여러 개의 소가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지명사전은 밝힌다. 그러나 초로의 어느 주민은 “저 앞 강에 자라가 유독 많아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담 마을이라 했고, 예전보다 많이 줄기는 했지만 지금도 자라들이 살고 있다”고 얘기한다.

방앗간이 이 영화를 팽팽한 긴장으로 이끌고 가는 장소였다면 구담 마을 당산나무 고목 아래의 평안한 공터는 긴장이 해소되거나 아니면 비밀을 나누는 장소였다. 창희가 밑둥 구멍에 라이터를 감추어 두었던 그 당산나무 앞에는 큼직한 밥상 크기의 돌제단이 놓여 있다. 이곳 당산제는 과거엔 풍악도 돌 정도로 컸지만, 지금은 모두 15가구에 주민이라야 거의 노인 20여 명뿐이라 정월 대보름 전날 정한수 한 그릇 모시는 정도로 끝낸다고 한다.

공터 한쪽에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영화촬영 현장비를 설치해두었다. 커다란 지구의를 반쯤 잘라놓은 것 같은 모양의 이 영화촬영 현장비석이 세워진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고전, 혹은 명작이라 할 만한 고래사냥의 남애항, 화엄경의 우도 등, 10여 개소에 불과하다.

검은 구름바위 아름다운 어치리 강변

▲ 어치리 섬진강변 가운데의 명물인 요강바위. 이곳은 워낙 아름다워 여러 영화의 배경이 됐다.

강변으로 오솔길 따라 곧장 내려가보려는 참에, 마을회관 안에서 모여앉아 쑥밀가루무침을 먹고 있던 할머니들 중 비교적 젊은 김옥순씨가 손주 엄준용군(5)과 나왔다. 이리로 가지 말고 차로 빙 돌아 저기 저 아래 용골산 모롱이 뒤로 가보면 요강바위, 구름바위도 있는 경치 좋은 계곡이 나온다고 일러준다. 하긴, 강이 아니라 계곡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곳의 섬진강폭은 좁다.

천담교를 되건너가 717번 지방도를 타고 700m쯤 남동진, 임실군에서 순창군으로 넘어서자마자 길 우측에 장구목가든 입구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뵌다. 콘크리트 포장이 된 좁은 길은 산릉을 넘어 강을 저만치 아래로 두고 달린다. 첫째와 둘째 갈림길서는 오른쪽, 세번째는 왼쪽으로 곧장 직진해 용골산 자락을 둥글게 감싸안고 지나자 이윽고 신록을 배경으로 검은 암반을 드러낸 절경의 하천이 펼쳐진다. 그 옆 강변 둔덕에 장구목가든이란 음식점이 섰다.

여기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내룡 마을의 섬진강에서는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스토리 전개상 중요한 소재로 몇 번 쓰인 ‘미군복 빨래’를 하는 장면이 촬영됐다. 창희 엄마는 미군복 빨래를 해주며 근근히 살아가는데, 어느 날 빨래를 몽땅 도둑맞고 만다. 이 일을 무마해주는 댓가로 미군 하사는 몸을 요구한다. 이러한 비참함이 예정되고 숨겨진 빨래터이지만, 한편 창희 또래들의 아름다운 추억이 어린 물놀이 장소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물살에 부대끼며 검은 암반은 온갖 기묘한 모습의 굴곡면으로 다듬어졌다. 크고 작은 구름 조각들이 강바닥에 내려앉은 그런 형국이라 해서 구름바위라 했을 암반지대가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이런 절경지가 숨어 있었구나, 하는 찬탄으로 강 풍경을 돌아보았다. 저기 암반 가운데 한 무리 남녀가 있어 가보니 거기 요강바위가 있다. 높이 2m, 지름 3m쯤 되는 검은 바위 한 가운데에 지름 1m 정도의 구멍이 깊이 뚫려 있는 모습이 흡사 요강 같다는 뜻이다.

“일본사람한테 팔아 먹으려구 누군가가 저기 임실읍내까지 실어내갔던 걸 주민들이 되찾아왔어요. 여기 앉으면 아들 얻는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이곳 풍광에 매혹되어 이미 10년째 여기 장구목가든에서 살다시피하며 그린 그림으로 작년 10월부터 내내 섬진강의 여울과 그 이웃들이란 전시회를 열고 있는 화가 안순덕씨, 그녀는 그렇게 이 바위에 얽힌 얘기를 들려준다.

물빛이 뿌연 것은 저기 상류쪽에서 공사, 농사일 하기 때문으로, 좀 지나면 맑은 색을 되찾는다고 한다. 그리 깊지도 않고 경치가 좋아서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적잖이 찾아든다. 아름다운 시절 뿐 아니라 드라마 허준, 춘향전의 일부 장면도 여기서 찍었다고 한다.

이 절경은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수몰될지도 모른다. 저 아래 적성면에다 댐을 세울 작정인데, 안순덕씨는 댐 건설 자체보다는 ‘기왕 수몰될 것이니 이 근처 기암들 캐내고 잘라내서 돈이나 벌자’는, 돈에 눈이 벌건 사람들의 무도한 착상에 더 몸을 떤다. 댐이 세워졌다가도 언젠가 필요가 없어져 다시 허물게 되면 그 때 이 풍경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녀는 절규한다.

우리의 아이들은 장차 어디서 무엇을 보며 살아갈 것인가.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아름다운 시절로 되새기며 노닐 아름다운 풍경들이 우리 주변에서는 너무도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글 안중국 차장 / 사진 허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