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은 백두대간을 품고 있는 고을치곤 이방인들에게 인기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북쪽엔 백두대간 큰 고개인 죽령의 풍기·영주가 있고, 동남쪽엔 영남대로에 속하는 새재(조령)의 문경이 있는데, 그 두 길에서 약간 빗겨나 있기 때문이다. 또 동쪽으론 하회마을의 풍산이나 도산서원으로 유명한 안동 같은 이 나라 최고의 양반고을이 버티고 있는 탓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그래서 그럴듯한 ‘선비의 고장’이나 ‘한국 전통 문화의 중심’이란 자랑은 일찌감치 이웃 영주나 안동의 몫이 되어버렸다.
예천은 그러나 이러한 고을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화적 저력을 지니고 있다. 양반문화면 양반문화, 불교문화면 불교문화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풍부하게 지닌 고을인 것이다. 또 백두대간서 발원한 깨끗한 물을 들이키고 내성천·낙동강 맑은 물에 멱을 감고 사는 예천 사람들은 한결같이 순박하고 친절했다.
조선시대 같으면 한양서 예천 갈 때는 출발하기 전에 ‘죽령을 오를까, 새재를 걸을까’ 궁싯거렸을 테지만 금세기 초에 개통된 중앙고속도로 덕에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실제로 안동·풍기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힘겹게 하던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 죽령 고갯길이 4.6km의 직선 터널로 뻥 뚫려 천리마보다 빠른 승용차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으니 예천 고을이 한결 가까워진 건 사실이다.
아쉬운 건, 굳이 밀란 쿤델라의 ‘느림의 미학’을 빗대지 않더라도 여행의 진수는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타박타박 걷는 데 있는 게 아니겠는가. 만약 그랬더라면 때 안 묻은 선비의 고을인 예천의 맛이 지금과는 또 다르게 다가왔을 터인데….
역설이다. 정작 이방인들을 예천으로 불러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윤장대를 비롯한 나라의 보물이 네 점이나 있는 용문사 풍경 소리도 아니요,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부자 소나무 석송령의 세금명세서도 아니요, 저 남도의 담양 소쇄원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초간정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누천년간 예천 사람들의 젖줄 역할을 해온 내성천 물줄기가 빚어놓은 물도리동 회룡포(回龍浦)였다.
회룡포는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물도리동이라 할 수 있다. 직선거리로 20km쯤 떨어져 있는 낙동강 줄기의 하회마을은 물도리로만 치면 여기에 명함도 못 내민다. 또 강원도 영월의 동강도 이 나라에서 제법 알아주는 사행천이지만 이만한 물도리는 아니고, 내린천 물굽이도 여기선 꼬리를 내려야 한다. 하회마을 지형이 버선의 목처럼 폭이 넓다면 내성천 물줄기가 350도 휘돌아가는 회룡포는 규모는 작아도 학의 목줄기처럼 가늘고 길게 매달려 있다. 회룡포의 목은 수면에서의 높이가 약 15m, 폭은 약 80m에 불과하다.
장안사 뒤 비룡산(240m)에 있는 회룡대는 한반도 최고의 물도리동을 감상할 수 있는 절묘한 포인트. 여기서 내려다보면 둥그스름하게 생긴 반도(半島)가 한눈에 들어온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백두대간의 지맥을 이었고, 그 끝엔 정겨운 논밭이 사방으로 둥글게 퍼져나간다. 그리고 눈부시도록 새하얀 모래밭이 널따랗게 이어지다 강물로 잦아든다.
너무 새벽 같이 서둘렀나. 이른 아침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는 바로 앞의 나무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짙은 강안개에 갇혀 있었다. 오르는 길에 장안사 경내를 몇 바퀴 돌아보고 왔건만 발 아래 강마을은 그 때까지도 흰 장막 너머에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가끔 개 짖는 소리, 마을 사람들이 두런대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들려와 아래에 마을이 있음을 깨닫는다. 부지런 떤 길손들 몇몇이 팔을 휘저어 안개만 걷어내다가 훌쩍 떠나고나서도 한참을 지나서야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거의 정오 무렵이었다.
장관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긴 동굴을 지나 발견하는 낙원 장면처럼 서서히 드러나는 회룡포. 파란 하늘과 푸른 물빛, 하얀 모래밭, 그리고 누렇게 물든 논, 물빛보다 푸른 얄망얄망한 산줄기…. 지난 여름 그토록 잔인하던 빗줄기도 꿋꿋이 견뎌내고 누렇게 물든 들판 사이로는 정겨운 마을길이 뻗어있다. 가장 한국적인 색조는 모두 갖춘 풍광이 안개의 연출로 효과가 극대화된 셈이다. 만약 때맞춰 장안사 범종 소리만 들렸더라면 나그네는 필경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회룡포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전경도 좋지만, 그 마을로 직접 들어가 걷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몇 년 전 개포면에서 의성포 가느다란 목줄기쪽으로 차도가 뚫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회룡포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의 작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강변을 걷기도 하고 의성포 마을도 다녀온다.
회룡에서 의성포 마을로 들어가려면 주민들이 ‘아르방다리’라 부르는 좁은 철다리를 건너야 한다. 어설퍼 보여도 제법 쓸모가 있어 의성포 주민들이 회룡 마을로 해서 용궁면 소재지를 드나들 때나 학생들 통학할 때 제법 요긴하게 쓰인다. 허나 아쉽게도 지난번 큰 비에 철판이 떠내려가 버려 건널 수 없었다.
“바지 벗고 조심해서 건너가면 돼요.”
아까 회룡 마을 담뱃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나그네에게 한 말을 되새기며 바지를 벗고 팬티바람으로 건너려다 그만두고, 대신 바지를 둥둥 걷어붙여 보지만 무릎까지밖에 안 올라간다. 포기하고 강변의 백사장에 발자국을 만들며 왜가리처럼 피안(彼岸)을 기웃거린다.
예전 의성포 주민들은 큰물이 지면 꼼짝 못했다. 물이 조금만 불어도 학생들은 등교를 포기했고, 장보러 가는 일도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산등성이를 타고 개포면으로 걸어서 돌아가면 되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날씨가 조금만 나빠지면 생필품 등을 바리바리 챙겨두었다고 한다.
이런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조선시대엔 유배지로 쓰였고, 난리가 일어나면 피란민들이 바글댈 정도로 십승지 중의 하나로도 꼽혔다. 온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6·25전쟁 때도 이곳엔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총 든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전란도 피해가는 길지(吉地)인 것이다.
이 회룡포 물줄기는 비룡산을 끼고 돌아간 다음, 문경을 적시고 흘러온 금천을 받아들이자마자 낙동강에 몸을 섞는다. 그 곳은 세 개의 강이 만난다는 풍양면 삼강나루. 회룡대에서 나지막한 봉우리 몇 개만 넘으면 바로 나루가 보이지만, 세 개의 강줄기가 만나는 곳이라서 그런지 접근이 만만치 않다. 용궁에서 문경의 영순면을 거쳐 들어가든, 용궁에서 개포·지보면을 거쳐 풍양면으로 들어가든 시속 60km로 달리는 승용차로도 30분이 넘게 걸리니 게으르거나 일정에 쫓긴 길손들은 삼강나루를 곧잘 빼먹기도 한다.
삼강나루는 단지 ‘세 개의 강이 만나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70여 호 2백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 앞길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문경새재와 연결된 영남대로의 원줄기였다.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선비나 장꾼들은 이곳 나루서 숨을 고른 뒤 문경새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두대간을 넘는데 죽령이 아니고 새재를 택했을 경우엔 반드시 이 나루터를 건너야 했다.
지금은 나룻배도 없어지고 뱃사공도 떠났으며 뱃길도 끊긴 지 오래된 삼강나루엔 1,300리 낙동강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주막이 전설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60년 전 이곳으로 시집왔다는 유용녀 할머니(87)는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아직도 혼자 마루에 앉아 손님을 맞는다. 손님이래야 바로 옆의 삼강마을 노인들뿐이고, 가끔 답사 나온 학생들이 관광차에서 우르르 내렸다가 곧 떠날 뿐 적막하다.
주막 위쪽으로는 곧 개통될 삼강교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길을 만든 인간은 위대하지만, 새로운 길이 생길 때마다 기억에서 사라지는 옛길의 처지는 얼마나 서글픈가. 삼강나루 주모 유 할머니가 지나온 세월을 되짚는다.
“우리 영감이 가고 난 다음부터 주막을 시작했지. 그게 벌써 한 오십년쯤 됐나봐. 한창 때는 주막이 이 집까정 시(세) 군데나 되었어.”
그러나 1934년 갑술년 대홍수 때 물이 넘쳐 주막이 다 떠내려가는 바람에 모두 떠났고, 이 주막만 외로이 남게 된 것이다. 홍수 후에 지었을 법한 10여 평의 흙벽집.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허름한 주막에서 옛 영남대로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주막 바로 앞에는 200살된 회화나무가 허름한 주막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찾아온 마을 노인들에게 소주와 김치를 건네준 할머니의 눈망울엔 마무리공사중인 삼강교가 맺힌다.
“저 다리 다 노이만(놓이면) 세 강 절경이 다 없어지지나 않을란가 몰라.”
이웃 문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문경새재를 복원할 때 포장하지 않고 흙길을 그대로 살려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그 새재와 더불어 영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던 삼강나루의 운명은 구슬프기만 하다. 지금 짓고 있는 다리가 완공되면 그나마 회화나무 아래서 낙동강 천삼백리 전설과 영남대로의 사연을 들려주던 이 주막은 극도의 부조화 속에서 상처받다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유 할머니의 넋두리는 예천을 다니는 내내 나그네의 귓전을 맴돌았다.
“나 죽으면 이 주막도 무너질끼라….”
예천에 붙박아 사는 향토사학자들은 말한다. 삼국시대에 신라 변경에 위치한 예천은 남하하는 고구려와 동진하려는 백제를 막아내는 전초지가 되었고 고구려가 백두대간 죽령을 넘어 영주 봉화를 점령하기도 하고, 동해안으로는 울진, 영덕까지 진출했지만 예천은 한번도 고구려나 백제에 정복된 일이 없었다고.
또 후삼국시대엔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영남에서 절대절명의 승부를 다툴 적에도 안동을 비롯한 여러 고을들이 왕건을 도왔지만 예천은 눈을 돌리지 않고 신라 백성이었음을 자부했다고. 예천은 이렇듯 외세를 항상 경계하고 자기를 고집스레 지키려는 우직함을 지녔으면서도 따스한 정을 잃지 않는 고장인 것이다. 삼강나루 주막도 그렇게 남길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1979년 서베를린에서 단발머리 여고생 양궁선수 김진호가 전해온 낭보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여자 개인종합과 거리별, 그리고 단체전을 포함해 무려 5관왕에 올랐다. 또 1982년 제1회 아시아 오세아니아주 선수권대회 5관왕, 1983년 세계대회 5관왕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동이(東夷)족의 후예로서 한국 활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갑자기 왠 활타령이냐 하겠지만 당시 세계 양궁계를 놀라게 한 김진호가 바로 이곳 예천 출신이다.
김진호로 인해 국내에선 예천이 활의 고장으로 단숨에 떠올랐지만, 예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의 전통 활인 국궁(國弓)의 본고장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그리고 그 중심엔 몇 대째 가업을 이어 활을 제작해온 궁장(弓匠) 권영학(權寧鶴·60·경북무형문화재 제6호)씨가 있다.
예천 토박이인 그는 읍내 남본리에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다. 2층은 그의 작업실. 부드럽고 유연하나 시위를 당기면 정확하고 민첩하게 활을 놓아보낸다는 평을 듣는 그의 활은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전통 활의 유려한 아름다움까지 갖추어 작품성도 인정받은 그의 활은 미국, 일본과 유럽 등지의 박물관도 소장하고 있을 정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 대부터 이곳 예천서 활을 만들었지요.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어릴 때부터 잔심부름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웠어요.”
그의 활은 무소뿔, 대나무, 소심줄을 접합하여 만드는 각궁(角弓)이다. 마디가 긴 통대나무를 쪼개 얇게 깎고, 그 밑에 역시 얇게 깎은 무소뿔을 붙이고, 그 위에 가늘게 찢어 말린 소심줄 여러 겹을 민어 부레풀로 접합한 것이 기본 재료. 여기에 가벼우면서 질긴 산뽕나무, 굴참나무 등의 부재가 쓰인다.
이 재료들을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굵기로 깎아 말리는 공정이 중요한데, 접합을 잘해서 심하게 탄력을 주는 신축작용을 계속 반복해도 떨어지거나 부러지지 않아야 한다. 현대의 접합기술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바짝 휘었다가 강한 탄력을 받으며 활짝 펴지는 작용을 반복하는 활대를 붙일 수 있는 재료는 재래식 부레풀이 최고라고.
활을 하나 만드는 데는 1년이 걸린다. 4개월간 재료를 준비하고, 8개월간 작업하니 꼬박 사계절이 지나야 하는 것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날씨가 선선해지는 추석 무렵부터 시작해 이듬해 5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활이 탄생한다.
이렇듯 정성 들여 만든 활을 평가하는 건 시위를 직접 잡아당기는 궁도인들. 그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궁도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부친께 활 제조법을 배워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스스로도 이 나라 최고의 솜씨를 지닌 궁도인이다. 환갑을 맞았음에도 호랑이처럼 형형한 눈빛과 꼿꼿한 자세엔 옛 무사의 강인한 기운이 철철 넘친다.
한창 때 23년간 전국 대회서 따온 금메달만 해도 16개에 이르고, 단체와 단독 우승까지 합하면 총 48회나 우승한 경력이 있다. 1983년엔 궁도협회의 공식 6단으로 명궁(名弓)이란 칭호를 얻었고, 그 전인 1979년엔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장원을 차지해 명무(名武)라는 칭호도 얻었다. 이렇듯 국궁계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궁장·명궁·명무라는 칭호를 모두 얻은 이는 우리나라에서 그가 유일하다.
그가 처음 활을 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궁도부에 들어가서부터. 처음엔 아들이 관직에 갈 것을 기대했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지도교사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궁사라는 말을 듣곤 소년 권영학에게 손수 만든 활을 내주었다.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준 활은 신력과 염력이 깃든 듯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았어요.”
그 활로 전국대회를 휩쓸면서 ‘예천에서 신궁 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소년기를 보냈지만, 아버지는 궁사로서의 아들은 인정하되 힘든 장인의 길을 걷는 일은 반대했다. 그러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부터 활과의 인연은 끊어진 듯 보였다. 그리고 자의반 타의반 치른 총무처 국가고시 4급에 덜컥 합격해 1년쯤 공무원 생활도 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게 운명의 힘이 아니던가.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고심 끝에 우리 전통 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로 결심했지요. 그 길로 바로 예천으로 낙향했어요. 며칠간 부친 앞에 무릎 꿇고 빌어 겨우 설득시킨 후부터 밤낮으로 활을 만지는 생활이 시작되었지요. 그 당시 아버님께서 내게 일러준 진정한 가르침은 활은 손재주로 만드는 게 아니고, 진실한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진리였죠.”
그의 활동은 단지 활을 만들고 쏘는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1970년엔 “예천에 무슨 양궁이 필요하냐”는 비판도 물리치고 예천여중고에 양궁부를 창설하는 데 힘을 쏟는 등 국궁과 양궁을 떠나서 궁도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또 어느 정도 양궁의 기반이 잡혔을 땐 양궁을 국궁에서 분리하는 데 앞장서 한국의 양궁이 급속도로 발전해 세계에 우뚝 서도록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장인으로서 궁도인으로서 또 궁도 행정가로서 활과 함께 한 60평생.
“한눈 팔지 않고 외길을 활과 함께 걸으며 살아온 인생, 결코 미련이 없습니다. 아마 다시 태어난다 해도 활을 만지고 있을 겁니다. 이곳 예천에서….”
예천엔 여느 지방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하나는 소나무요, 나머지는 팽나무다. 지방 소식에 밝은 이들은 벌써 ‘아, 세금 낸다는 그 나무!’ 하고 눈치를 챘을 것이다. 재산이 제법 두둑해 국민의 의무인 세금도 꼬박꼬박 내며, 마을회관 터를 위해 자신의 땅을 내놓거나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희사할 줄 아는 인격을 지닌 ‘그들’은 바로 감천면의 ‘석송령(石松靈)’과 용궁면의 ‘황목근(黃木根)’이다.
“아빠, 어느 나무가 더 부자예요?”
서울 말씨를 쓰는 소녀가 석송령을 구경하다 묻자,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글쎄….” 하며 입간판을 바라보다 한 마디 한다.
“아마 유명하긴 이 소나무가 더 유명할 걸….”
남자는 아마 석송령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렇듯 두 그루의 나무는 인격을 부여받은 덕에 호기심 많은 인간들에겐 좋은 비교거리가 된다. 호기심 먹고사는 나그네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에겐 ‘나이가 벼슬’이니 먼저 나이부터 따져보자. 둘 다 춘추는 수백 성상을 넘겼다. 인격을 지녔으니 존칭을 ‘분’이라고 해야하지 않나? 어쨌든 석송령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인 1982년에 600살이 넘었다니 2003년 현재 최소 621살쯤 되었고, 199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황목근은 그 당시 500살로 추정했다니 현재 505살쯤 먹은 셈이다. 둘의 나이 차이가 100년 이상 나니 석송령이 형님이다.
겉으로 보이는 풍모도 다르다. 큰길가에 서있는 석송령에선 깐깐하고 자존심 강한 영남 선비 집안의 장손 같은 품위가 느껴지고, 논 한가운데 자리해 일손들의 쉼터 역할도 톡톡히 해내는 황목근에선 논밭 일구며 고향 지키는 순한 농부의 땀 냄새가 난다. 또 둘 다 제사 때 술을 받으면 사양하지 않으니 술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석송령은 늘 술냄새가 풍기고 다니니 주량은 석송령이 더 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석송령은 막걸리를 좋아해서 매년 행사 때마다 마시는 막걸리를 합하면 모두 10말이 넘는다고.
이제 가장 궁금한 재산 상태를 알아보자. 속물근성이 보인다고 나무라는 분들도 있겠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자세한 재산 내역을 담당 공무원에게 문의했는데, 다행히 “사생활 침해라 불가합니다” 운운하지 않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가옥 3채와 현금도 500여만 원이나 지니고 있는 석송령의 땅은 모두 자신이 터를 잡은 천향리에 있다. 네 군데의 전답을 모두 합하면 면적이 총 5,087㎡에 이르고, 종합토지세는 2002년에 8,860원, 2003년에 8,850원을 냈다.
한편, 자신이 서 있는 부근의 토지 약간과 마을회관 땅 등을 소유한 황목근의 재산은 바로 앞에 보이는 산과 대지 등을 합쳐 총 12,899㎡에 이른다. 황목근은 2002년엔 10,300원, 2003년엔 10,690원의 토지종합세를 납부했다. ‘선비’보다는 ‘농부’가, ‘형님’보다 ‘아우’가 조금 더 부자인 셈이다. 나그네 손목 잡고 황목근 소유 땅을 친절히 알려주던 한 농부는 “농촌에서 이 정도 세금 내면 부자에 속한다”고 일러주었다.
자신이 기르던 애완동물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뉴스가 가끔 해외토픽을 통해서 전해오거니와 이렇게 식물에게까지 재산을 물려 준 경우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 것이다. 나무에게 인격을 부여해 재산을 넘겨주고 또 그걸 즐기는 여유! 예천 사람들은 참 대단한 성품을 지닌 게 틀림없다. 아마도 이는 예천의 중심을 흐르는 내성천처럼 꾸준히 이어온 상부상조의 전통, 그리고 따스한 인정이란 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각 고을마다 이런 일이 유행처럼 번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이 정도면 예천의 웬만한 건 거의 살펴본 셈이다. 그러나 서둘러 예천을 떠날 일이 아니다. 예천 땅에 발을 디뎠다면 반드시 들러야할 필수 답사지가 아직 남아있다. 바로 백두대간 기슭의 용문면이다. 예천 양반의 자존심이랄 수 있는 예천권씨 집안에서 남긴 건축물과 보물급 저작물이 있고,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불교문화유산인 불경 전용 책꽃이와 목탱화가 있는 용문사가 터를 잡은 이 고을은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들르고 싶은 곳이다.
예천읍에서 서쪽으로 난 지방도로를 타고 금곡천을 거슬러 오르면 아래쪽 강마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산마을이 펼쳐진다. 지척이 한반도의 근간인 백두대간 본 산줄기니 그럴 만도 하다.
용문 고을은 백두대간이 멀지 않으면서도 금곡천을 끼고 제법 널따란 들판이 펼쳐져 있어 넉넉한 고을이라는 느낌을 준다. 특히 예천권씨 종택(중요민속자료 제210호)이 자리한 죽림리 마을 주변은 산촌답지 않게 적당히 풍요롭다.
예천권씨 종택은 건물 자체로도 볼거리가 많은 집이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의 조부인 권오상이 지은 별당(보물 제457호)과 권문해가 지은 안채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사대부 집안의 품격이 잘 드러나 있다는 평이다. 보존 상태도 좋아 조선 중기 건축의 구조와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곳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권문해의 <초간일기> 등의 보물급 저작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이 집은 풍수상 학자가 나올 명당으로 이름이 나있어 길손의 호기심을 끈다. 풍수가들은 집터를 둘러보곤 ‘반달 모양의 주산은 낮은 구릉을 이루며 마을을 받쳐주고, 청룡인 매봉산과 백호인 백마산이 좌우를 감싸 안은 명당’이라 평한다. 결국 배산임수에 동향으로 자리잡아 물이 잘 빠지고 일조가 양호하여 장원급제하는 학자가 나와 번창할 땅이라는 것이다. 권오상이 당시 집터를 잡을 때 일부러 만석꾼터가 아닌 학자터를 알아보고 잡았다는데, 여기서 만석꾼보다 학자를 더 쳐주었던 영남 문화의 분위기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권씨종택에서 다시 지방도로 빠져 나와 금곡천을 끼고 조금 달리면 초간정이 나온다. 백두대간의 지맥인 사부령에서 발원한 물이 고만고만한 논밭을 만들며 흐르다 문득 90도로 꺾이는 물도리를 만들었고, 그 안쪽 아담한 벼랑에 서있는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누정 많은 영남권에서 큰 강이 지닌 절경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도 이토록 아기자기하면서 정감 넘치는 정자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초간 권문해는 학자로서의 경륜뿐만 아니라, 경관을 알아보고 정자를 앉히는 안목도 겸비했던가 보다.
개울과 어우러진 초간정 솔숲을 거닐기도 하고 노랗게 물들어 가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서도 노닐다보니 짧은 가을해가 어느새 백두대간 마루에 걸린다. 그리고 이내 몰려드는 땅거미. 아쉬운 마음을 접고 용문사로 향한다.
용문사는 초간정에서 승용차로 5분이면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지척이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가 수령 1,100년이나 된 은행나무로 잘 알려졌다면, 고을 출신의 두운대사가 870년에 창건했다는 예천 용문사(龍門寺)는 불교 전경신앙(轉經信仰)의 표본이 되는 윤장대(輪藏臺)로 유명한 절집이다. 이는 장경(藏經)을 돌리(輪)는 대(臺)라는 뜻으로 회전식 불경보관대다.
아까 초간정부터 나그네와 코스가 같았던 소규모 답사객 중 한 명이 안내인의 긴 설명 끝에 한 마디 한다.
“결국 회전식 불경 책꽂이라 할 수 있네요.”
“그렇죠. 그리고 윤장대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서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진다고 전해옵니다. 아마 이런 전경신앙은 글을 모르는 중생들이 경전 읽는 효과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윤장대 손잡이엔 하얀 백지에 정갈한 글씨체로 ‘사용금지’라고 씌어 있었다. 대신 윤장대 문을 장식한 화려한 꽃살무늬가 반갑다. 잘 알려진 부안 내소사의 꽃창살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솜씨다. 눈을 돌리면 목각삼존불과 목각후불탱화가 미소로 반긴다. 대추나무을 깎아 조각한 솜씨와 구도는 문외한이 봐도 감탄할 만큼 정교한데, 겉에 누런 금가루를 입혀 더없이 화사하다.
이 목각삼존불과 목각탱도 보물이요 윤장대도 보물이며 이들을 품고 있는 대장전 또한 조선 초기 사찰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귀한 보물이니, 시쳇말로 앉은자리에서 ‘1타 3피’의 눈요기를 하는 셈이다. 또 예천권씨 종택에 보관한 권문해의 저서들처럼 직접 볼 순 없어도 1457년(세조 3년)에 왕이 경상감사에게 ‘절을 잘 보호하고 잡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고 용문사에 내린 친필 수결도 보물로 지정되었으니 이 크지 않은 절집에 나라의 귀한 보물이 무려 4점이나 있는 것이다.
산신각 앞 계단에 앉아 예천 산하를 바라본다. 점차 어둠 속으로 잠겨 가는 예천 땅이 참 아늑하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백두대간을 넘어온 구름이 서서히 사위를 감싼다. 가을비가 내리려는 걸까, 아니면 밤안개라도 덮이는 걸까.
풍경소리 듣다가 산바람에 떠밀려 일어나 산문(山門)을 나선다. 예천을 처음 찾던 날 이른 아침에 반겨주던 안개가 이번엔 떠나는 길을 배웅한다. 짙음과 옅음의 차이가 있어도 올 때는 강안개요, 갈 때는 산안개라! 문득, 예천은 백두대간 기슭에 터를 잡은 산촌(山村)과 내성천 낙동강에 기댄 강촌(江村) 이미지인 산안개와 강안개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고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과 강 사이에서 예천의 가을이 시나브로 깊어가고 있었다.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