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의 어느 고을이나 이방인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이 힘이 세면 ‘굴뚝 없는 공장’이라는 관광 산업이 번창하는 것이요, 약하면 외지인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집중호우와 태풍으로 농부들의 시름이 많았던 계절이 지나고 찾아온 가을. 산은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들녘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계절에 이 땅에서 가장 끌리는 고을은 어디일까.
내장산 단풍으로 유명한 정읍은 자력이 센 고을 중 하나일 것이다. ‘내장산 단풍을 보지 않고 가을 단풍을 논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정읍=내장산=단풍’의 등식관계가 성립했다. 하지만 정읍엔 내장산 단풍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가사가 전하는 백제가요 ‘정읍사’가 있고, 부조리에 항거하기 위해 들불처럼 일어선 동학 농민군들의 함성 들려오는 너른 평야도 있다.
올벼는 누렇게 익었지만 늦벼는 이제야 이삭이 패는 계절, 호남평야의 유서 깊은 고을 정읍으로 간다. 정읍의 입구라 할 수 있는 호남고속도로 태인 나들목에서 신태인을 거쳐 지방도를 타고 이평쪽으로 향하면, 500m쯤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강을 연달아 건넌다.
먼저가 호남정맥(湖南正脈) 묵방산에서 발원해 산외·칠보·태인면의 산과 들을 적시고 온 동진강이요, 그 다음이 내장산에서 시작해 정읍 시내를 적시고 흘러온 정읍천이다. 둘 다 강이라 하기엔 좀 작지만, 바로 힘을 합쳐 덩치를 키운 후 부안의 백산과 김제의 부량, 곧 호남평야의 중심을 적시며 황해로 흘러든다.
정읍의 첫 번째 여정인 만석보터는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근처에 있다. 고향이 호남땅이 아니거나 호남땅을 여행한 경력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만석보터로 오면서 눈동자가 커지게 마련이다. 특히 백두대간이 지나는 강원도나 영남땅 산골에서 자랐거나 남도 출신이라 해도 호남정맥 산간 지역에서 자란 이라면 분명 카메라를 꺼내 그 끝없는 지평선을 찍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논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인 배들평야!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에 자리하던 만석보는 한국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온 건 1892년 5월. 1889년 4월에 부임했다가 3개월만인 같은해 9월에 모상(母喪)으로 물러났으니 두 번째 부임인 셈이었다. 조병갑은 부임하면서 ‘배들평’에 새로운 보(洑)를 세웠다.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배들평 널따란 들녘을 풍년들게 하는 예동보(禮洞洑)가 이미 있었음에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보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새로 보를 쌓은 탓에 큰물이 들었을 때 강물이 넘쳐 상류 들녘이 오히려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병갑은 보의 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하였으니 농민들의 원성은 높았다. 결국 농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나 관아로 몰려가 항의를 했다. 이때 귀 기울여 들었으면 큰 탈이 없었으련만 조병갑은 주동자들을 잡아 가두고 매질까지 했다.
이 사건 후인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되면서 불씨는 잦아드는 듯했다. 허나 이후 12월 한 달 동안 다섯 명이 군수로 발령이 났으나 조병갑의 농간으로 부임하지 않다가 1월 9일 다시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유임되면서 마침내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한겨울의 찬바람 불어대는 1894년 1월 10일 밤. 전봉준을 선두로 분연히 일어선 농민들은 배들평으로 몰려가 만석보를 때려부숴 버린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며칠 뒤면 추석인데도 절기가 예년보다 이른 탓인지 배들평은 아직 푸른 빛깔로 눈부시다. 바라볼수록 정말로 너른 옥토다. 사실, 소도 쟁기질 못하는 강원도 비탈밭이라면 차라리 나을지 몰랐다. 이런 옥토에서 힘들여 농사 지어 갖고 제 식구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빼앗겨버리면 대체 누구라서 죽창을 들지 않겠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대는 것이다.
건너편 뚝방으로 오토바이를 탄 농민이 지나간 뒤 가을 바람에 벼들이 살짝 누웠다 일어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런거리는 소리. 돌아보니 비석 하나가 서있다. 비석엔 1975년 YWCA에서 ‘겨울 공화국’이라는 시를 낭독한 사건으로 교사직에서 파면 당한 경력이 있는 양성우 시인이 지은 시 ‘만석보’가 정성스레 새겨져 있다.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눈 쌓인 고부들판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머리 짙은 안개 속에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중략)
-<양성우 시인의 ‘만석보’ 중에서>
시를 읽다말고 ‘만약에 당시 조병갑이 만석보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단정하지만, ‘만약에…’라는 반사실적 조건문은 일반에겐 아주 흥미로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전문가들도 이런 가정을 은근히 즐기는가 보다.
올 초에 서점에 나온 <만약에>(스티븐 앰브로스 등 공저)라는 책은 저명한 역사가들이 세계의 역사를 바꾼 주요 사건을 ‘만약에 당시에 이러이러 했다면’ 하는 추론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요컨대, 만약에 알렉산더 대왕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하는 식이다. 이 책이 서점가에서 제법 성적을 거둔 것을 보면 반사실적 조건문을 풀어나가는 추론 과정이 흥미로운 건 사실인가 보다.
그 내용대로 ‘만약에…’라는 가정을 해본다. 만약에 조병갑이 만석보를 세우지 않았다면, 세울 때 노역시킨 농민들에게 막걸리 대접하고 임금을 제대로 지불했더라면, 자신 부친의 선정비를 세울 때 자기 돈으로 해결했다면, 황무지를 개간한 농부에게 약속대로 5년간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이른바 ‘전봉준 공초(供草)’에서 밝혀진 조병갑의 횡포가 애초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고부향교엔 조병갑의 선정비가 세워졌을 테고, 전봉준은 조소마을의 평범한 훈장으로 일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시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크게 승리해 금강을 건너고 아산, 평택을 지나 한강을 넘어 광화문에 도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한국사는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당시 성공했다면 프랑스대혁명처럼 ‘동학대혁명’이라 불렸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만석보터에서 나와 아쉬운 가정의 역사를 상상하며 5리쯤 가면 이평면 소재지의 말목장터다. 1894년 1월 10일 밤 동학농민군이 예동 마을에 집결한 뒤 고부관아로 진격한 곳으로, 고부 점령 후 이곳은 농민군 진지가 되었다. 장터 사거리엔 전봉준이 모여든 농민들에게 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런데, 조금 과격하다는 평가를 듣는 벽화만 눈에 들 뿐 감나무가 뵈지 않는다. 분명 이태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여기 서 있었는데…. 두리번거리다 사거리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갈비탕 한 그릇 시키는데, 주인장이 외지인을 알아보았는지 ‘감나무 보러 오셨는가?’ 하고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는 직감에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장은 매우 섭섭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그 감나무 얼마전 비바람에 부러져 부렀어.”
그렇다. 농민전쟁의 현장을 지켜보며 녹두장군의 체온도 느껴보았을 유서 깊은 감나무는 지난 8월 25일 새벽 3시 30분쯤 거센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던 것이다. 수령은 180년쯤 되었다 하니 1894년 1월 고부봉기 당시에도 70~80살쯤 먹었을 것이다. 감나무 치곤 나이가 제법 든 편이지만 어찌 이런 일이….
감나무에 이상 징후가 발견된 것은 3년쯤 전이라 한다. 당시 정읍시는 전문가들과 여러 차례 살펴보았지만 마땅한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고, 올 5월엔 밑동도 썩어버려 이미 재활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원래 이 감나무는 약간 경사진 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 집을 신축하느라 옹벽을 치고 흙을 돋우는 바람에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빠르게 썩어들어 갔던 것이다. 정읍시와 관련 단체들은 쓰러진 감나무를 줄기 밑동과 위쪽 가지 부분을 두 토막으로 나눠 잘라 약품처리한 후 황토현전적지에 건립중인 동학농민혁명전시관에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천막으로 덮어놓은 감나무는 마치 전투에서 사망한 농민군의 시체처럼 보인다.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잔가지들은 농민군이 흘린 피인가? 자그마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든다. 살아있을 땐 만져보지도 못했건만…. 나그네는 이 젓가락 만한 나무로 무슨 기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솟대를 만들기로 했다. 기다림과 희망의 상징인 솟대! 정읍에서 돌아온 후 한 뼘쯤 되는 크기의 솟대를 만들어 현관 앞에 세워놓았는데 아담한 방안 풍경과 너무 잘 어울려 흡족했다.
그러나, 최근 접한 소식은 절대 희망적이지 않았다. 우리 농촌의 현실은 비바람에 맞서다 결국 쓰러진 말목장터 감나무처럼 절망적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농촌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만성적인 농가부채가 사회문제화 된 지는 오래고, 농민의 수도 점차 줄고 있다. 결국 지난 추석 때엔 멕시코 칸쿤에서 WTO 각료회의 반대 시위 도중에 우리나라 이경해씨가 자살까지 했다. 언론은 그의 죽음을 우리나라 농촌이 처한 절박한 현실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말목장터를 벗어나 전봉준고택지와 황토현전적지, 동학농민혁명모의터 등을 둘러보고 주변의 들녘을 거닐면서도 쓰러진 감나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이렇게 둘러본 정읍천 서쪽의 고을들은 동학 관련 유적지가 매우 많다. 찬찬히 살펴보려면 하루 일정으로도 빡빡하다. 그래도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잘 잃는 ‘길치’가 아니라면 다니는 데 별 어려움 없는 편이다. 그러나 이곳엔 동학 관련 유적만 있는 게 아니다. 은선리3층석탑(보물 제167호), 천곡사지7층석탑(보물 제309호) 보화리석불입상(보물 제914호) 같은 보물급에서부터 장문리5층석탑, 용흥리석불입상 등 지방에서 지정한 문화재까지 석탑과 석불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이런 유적들이 동학 관련 유적지들보다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그네는 석불이나 석탑 등을 둘러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썼다. 큰 도로의 안내간판을 보고 꺾어 들어가지만 애매한 마을 갈림길에서 곧 길을 잃곤 했다. 이런 유적은 정읍시에서 발간한 행정 지도에도 위치가 정확치 않다. ‘주민이 가장 정확한 지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엔 시골서 사람 보기가 쉽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다. 정읍시 관계자는 예산 얘기로 말머리를 돌렸지만, 이는 마을 갈림길에 작은 나무팻말 하나만 세워놓아도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어쨌든 정읍은 ‘동학의 고을’인 것만은 확실하다. 모든 이정표는 황토현으로 통하게 해 아무데서나 어렵지 않게 황토현전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내장산 기슭에 ‘갑오동학100주년 기념탑’을 세운 건 내장산만 달랑 보고 갈 수밖에 없는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라 할 수 있다. 정읍의 자랑 내장산을 등지고 비록 인공이라 해도 적당한 규모의 호수를 앞에 두었으니 이런저런 눈맛에 제법 길손들을 잡아끌고 있는 듯하다.
탑은 배경으로 한 서래봉 바위들과 잘 어울린다. 탑 앞엔 세 영웅의 동상이 있다. 가운데의 전봉준 동상은 오른손에 무언가 높이 치켜들었고 죽창을 든 김개남이 그 오른쪽에, 몽둥이를 든 손화중은 왼쪽에 서있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왼 손에 펼쳐든 게 독립선언서라는데, 정읍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전봉준 동상은 무엇을 들고 있을까? 어떤 이는 전봉준이 훈장 출신이니 <천자문>이라고도 하고, 조금 관심 있는 이는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사발통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봉준의 손에 들린 건 동학농민운동 지도부가 만천하에 밝힌 거사의 대의명분이 응집되어 있는 ‘창의문(倡義文)’이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 뜻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중략)”
그러나 정읍의 들판에선 농민군의 함성만 울려퍼진 게 아니다. 정읍은 오늘날까지 가사가 유일하게 전하는 백제 노래 ‘정읍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는 어느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장사를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고개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애틋하게 불렀다는 일종의 망부곡이다.
나중에 이 여인이 서 있던 자리의 바위를 망부석이라고 불렀는데, <동국여지승람>엔 ‘발자취가 아직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덕천면 망제리라고도 하고, 연지리 죽림동의 죽지봉이라고도 한다. 그중 현재 정읍사 공원이 들어서있는 시기동의 아양고개가 가장 유력하지만, 최근엔 수성동 ‘괴바라기’가 망부석의 유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현(縣)의 위치가 현 정읍시라고 전제했을 때 ‘현 북쪽 10리에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괴바라기’의 어원을 살필 때 ‘괴’는 ‘유난히 사랑한다’는 뜻으로, ‘바라기’는 ‘바라본다’의 명사형으로 분석해 ‘어떤 그리움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젠 호남정맥이 지나는 동남쪽으로 갈 차례. 서쪽인 이평·고부·덕천면 등의 평야 지대가 동학유적이 집중되어 있고, 정읍시를 포함한 남쪽이 정읍사 전설과 노래를 짚어보고 내장산 단풍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면 호남정맥에서 발원한 동진강의 상류 지역에 속하는 산외·칠보·산내면은 정읍에서 산간지역의 풍광을 살필 수 있는 고을이다.
내장산을 벗어나 쌍암동에서 49번 국가지원지방도를 타고 고개 하나를 넘으면 칠보면(七寶面). 태인에서 임실·순창 등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교통의 요지인 칠보는 가사문학의 효시로서 봄의 정취를 노래한 ‘상춘곡(賞春曲)’의 고을이다.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은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지만,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에서 물러나 칠보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불우헌곡’과 ‘불우헌가’, ‘상춘곡’ 등을 지었다. 또 1475년엔 마을 친목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정 먼저 시행된 고현향약(보물 제1181호)이다. 마을 뒷산 은석동에 그의 묘소가 있다.
이렇듯 칠보는 옛부터 걸출한 인물들을 수없이 배출해 낸 인재의 고을이다. 조선조 가장 불운한 임금으로 꼽히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이곳에 태를 묻었고,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의 태조영정 등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겨 보존하는 데 공을 세운 손홍록(1537-1610)과 안의(1529-1596)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
콘크리트 포장된 마을길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비석과 사당 등이 눈에 띈다. 불우헌 정극인 문학비를 비롯해 정순왕후태생비, 손홍록과 안의의 위패를 모신 남천사(藍川祠), 최치원과 정극인 등의 위패를 모신 무성서원(武城書院)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외에도 송정, 후송정 등등 정자와 비석들이 수도 없이 많다. 또 마을길엔 최근에 입신출세한 사람들을 기리는 동상이나 비석도 자주 눈에 띄니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전통을 지닌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이 원촌 마을이 칠보의 여러 마을 중 유교문화가 흥했던 곳이라면, 산 너머 서쪽에 자리한 원백암은 토속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다. 두 마을에 칠보면의 보물이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원백암 마을은 ‘당산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에는 원래 24방위에 맞추어 세운 24개의 당산(堂山)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형태로 된 24개의 당산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졌지만 마을 주변엔 아직 여러 개의 당산이 남아 있다.
이중에 답사객들의 눈길을 끄는 건 입구의 남근석. 남근석은 세심하게 다듬어진 1m쯤 높이의 네모진 대석 위에 1.3m가량의 원통형의 남근 형태로 당산나무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마을 노인들은 마을 입구의 지세가 흐트러지는 형국이라 당산나무를 심어 보강했고, 건너편의 여근곡과 여근암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당산나무 옆에 남근석을 세우고 수문장 역할을 하는 돌장승도 세워놓았다고 일러준다. 또 남근석 옆 당산나무 둥치의 같은 높이쯤에는 길게 갈라진 틈이 있는데 이것은 남근석과 더불어 음양을 상징한다. 남근석을 비롯한 당산은 모두 300여년 전인 조선 숙종 때 가난한 사람 돕는 데 힘쓴 박잉걸이라는 사람이 세운 것이라 한다.
칠보 동북쪽의 산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김개남(동곡리 지금실)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동곡리 상두산 중턱에 김개남 장군의 묘가 조성되어 있지만, 김개남은 전라감영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기 때문에 묘가 확실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또 오공리 공동마을의 김동수 고가(중요민속자료 제26호)는 한옥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호남 상류층 가옥의 구조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목욕리 내목 마을엔 정읍에서는 유일하게 솟대신앙이 행해지고 있으며, 오공리 야정 마을에는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을 모신 사당이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터를 잡은 오공리의 김동수 가옥. 개울을 건너면 왼쪽으로 큰 연못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대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머슴집과 문지기방, 곳간, 뒷간이 있고 이어 안채, 사랑채, 창고, 사당, 하인집과 원래는 목수들이 집을 지을 때 쓰던 방이었으나 뒤에 외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주방을 겸한 집까지 88칸이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정조 시대인 1784년에 지어진 집으로, 김동수씨의 6대조인 김명관(金命寬)이 17세가 되던 해에 짓기 시작하여 10여년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대문을 여닫는 빗장이 자라 모양으로 되어 있고, 부엌의 창살도 멋을 부리는 등 꼼꼼히 살펴보면 주인이 집을 지으면서 한껏 여유를 부린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러나 인적 없는 빈집이다보니 답사객들에게 사랑받던 대문의 자라 모양 빗장을 누군가 뜯어갔다. 또 닭장과 뒤주 같은 것들도 도난 당했다고 하니, 이런 현실을 웃어야할지 울어야할 지 모르겠다. 괘씸한 양상군자 탓에 눈요기도 못하고….
집터를 말할 때, 특히 이런 큰집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풍수 얘기일 것이다. 풍수가들은 이 집터를 평사낙안(平沙落雁·백사장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상으로 부귀가 끊이지 않을 곳) 형국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지네 명당’으로 보기도 한다. 이 고가는 지네의 두 이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뒷산은 지네의 머리고, 능선이 몸통이며, 대문 앞에 연못은 지네가 습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러 조성한 것이다.
아름드리 고목들도 습지를 좋아하는 지네를 위해 일부러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네는 먹이를 두 이빨로 물려고 할 때 기가 가장 강하다고 한다. 마을 이름도 원래는 ‘지네 오’ ‘지네 공’자를 쓴 오공리(蜈蚣里)였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감나무 고목이 들어찬 마당이 습한 건 관리가 허술한 탓이 아니라 이런 풍수 때문에 일부러 만들었던 것이다.
김동수 고가를 나와 호남정맥의 구절재를 넘는다. 칠보에서 산내면으로 넘어가는 이 고개는 남근석을 세운 원백암 마을의 박잉걸이 투자해 길을 넓힌 것이라 전한다.
잿마루를 넘으면 산내. 이 고을은 동진강이 아닌 섬진강 수계에 속한다. 이곳을 지나는 호남정맥 마루금을 분수령으로 해서 남동쪽 산사면에 떨어진 빗방울은 섬진강으로 흘러 광양만에서 남해로 빠지고, 북서쪽 사면에 떨어진 빗방울은 동진강으로 해서 호남평야를 지나 황해로 흘러간다. 같은 정읍을 적시는 빗방울도 이렇듯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운명에 휩쓸리는 것이다.
1965년 완공된 섬진강다목적댐은 유역변경식이다. 이 호수의 물은 호남정맥 서사면의 칠보면과 산외면으로 낙하해 칠보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든 후에 동진강 수로를 따라서 흘러가 농업용수가 되면서 신석정의 시정(詩情)이 서려 있는 계화도 간척지까지 연장된다. 베풀 줄 아는 섬진강의 넉넉한 여유를 여기서 배운다.
비가 한 줄기 쏟아진 후, 수채화 같은 호반도로를 느긋이 달려 맨 끝마을 종성리로 간다. 종성리의 둔헌 임병찬 창의유적지(遯軒 林炳瓚 倡義遺蹟址)는 전북 옥구 출신인 임병찬(1851-1916)이 의병을 훈련시킨 곳이다. 그는 낙안군수 등을 지내다가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함께 1906년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8,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2년간 감금되었다. 결국 최익현은 그곳에서 단식절명하였고, 임병찬은 1907년 1월 방환된 후에 다시 의병 활동을 하던 중 1914년 국권반환과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다 체포되었다. 거문도에 구금된 그는 단식으로 항의하다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정읍 답사 뒤풀이로 옥정호 붕어찜으로 입맛을 돋운 후 돌아가기 위해 구절재로 향하다 호수 끄트머리 능교리에서 잠시 멈춰 옥정호로 흘러드는 추령천을 바라본다. 머뭇거릴 사이도 없이 차는 어느새 방향을 틀어 추령천을 거슬러 오른다. 여기서 십 리만 가면 순창 땅인 쌍치면이다. 이는 정읍 경계를 넘는 일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어찌 녹두장군 전봉준이 붙잡힌 피노(避老) 마을을 들르지 않을 수 있으랴.
1894년 11월 9일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동학농민군이 27일 태인전투에서도 패배하자 전봉준장군은 몇 명의 부하를 이끌고 태인에서 호남정맥의 노령을 넘어 정읍 입암산성으로 에돌아 12월 2일, 옛 부하 김경천이 있는 이곳 피노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믿었던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에게 밀고했으며, 한신현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이 머물고 있는 집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담을 뛰어넘어 피신하다가 다리를 얻어맞은 채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파란만장한 최후를 마쳤다. 향년 41세. 죄명은 ‘반역죄’였다.
1894년 겨울 전봉준장군이 잡혀가는 모습을 찍었다는 한 장의 사진이 생각난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늠름한 기개를 잃지 않고 잔뜩 카메라를 쏘아보던 눈빛….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 불러주시던 구슬픈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며간다” 그 불타는 듯한 눈빛이 그립다.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 중에서>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