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원도 삼척

언제쯤 눈이 내릴까? 계절은 겨울의 입구를 지난 지 한참이건만 강원도 삼척(三陟) 땅으로 향하는 12월 초순에도 첫눈은 휘날리지 않았다. 앞으로 며칠간 매운 바람을 맞으며 삼척 땅에서 지낼 터인데, 산간의 한겨울을 느낄 수 있는 눈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눈 내리는 겨울 바다는 금상첨화 아닌가. 화전민의 후예들이 사는 깊은 산속 굴피집에서 몇 날을 묶이거나 파돗소리 들려오는 민박집 창밖으로 눈보라가 휘날리는 광경만 바라보다 잠들더라도 차라리 대설주의보를 들었으면, 하고 떠난 삼척 고을.

강원도 동남단에 자리한 삼척은 지리적으로 살핀다면, 백두대간 분수령과 정맥 분수령, 그리고 바다 이렇게 세 박자를 모두 품은 유일한 고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척’이라고 하면 첩첩 백두산간의 깊고 깊은 산골의 너와집 이미지와, 성난 파도가 거칠게 달려드는 바다의 풍광을 동시에 떠올리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금세기 들어서 ‘동굴의 왕국’이란 이미지가 보태졌으니, 외로운 오지였던 삼척은 어느새 ‘삼척동자’도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고을이 되어버렸다.

화전(火田)으로 기억되는 삼척 민초의 삶은 깊은 산속에서 이루어졌고, 사서에 기록된 삼척의 역사와 문화는 대부분 동해안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삼척 백성을 다스리는 치소(治所)가 대대로 오십천(五十川)이 동해로 몸을 섞기 직전에 빚은 구릉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엔 오십천 벼랑 위에서 삼척의 천 년을 지켜온 죽서루(竹西樓·보물 제213호)가 있다. 그래서일까. 삼척 땅에 첫발을 내디딘 방문객들은 열에 아홉은 죽서루를 먼저 찾는다.

언제부터 이곳에 정자가 있었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죽서루의 명성은 고려시대에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13세기 중엽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이미 이곳에 걸려 있던 누군가의 시를 차운(次韻)해 지은 시엔 “이 고을은 높은 누각 때문에 매우 유명해졌구나” 하는 구절이 보이고, 조선시대엔 삼척 발전에 공헌이 많은 삼척부사 허목(許穆·1595-1682)도 ‘죽서루기’에서 “관동팔경 중에 죽서루가 으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죽서루는 조선 초기에 중창한 후에도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해 진주관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맞아주던 아리따운 삼척 명기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고, 죽서루에 올라 시 읊는 나그네도 드물다.

죽서루엔 언제나 방문객들이 많다. 중학생쯤 된 아이가 아버지인 듯한 남자에게 묻는다.

“관동팔경 중에 어디가 짱이예요?”

“글쎄….”

남자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지만, 일찍이 관동팔경에 관심이 많았던 조선 숙종은 울진의 망양정이 관동팔경 가운데 제일 낫다고 하여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편액도 하사했다. 그러나 사실 관동팔경은 모두 나름대로의 미학을 간직하고 있어 어느 게 으뜸이라고 말하긴 쉽지 않다. 남자도 아마 그래서 대답을 선뜻 못했을 것이다.

관동팔경의 여느 정자와 달리 강가에 서있는 죽서루는 죽서루만의 아름다움으로 내로라 하는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기본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해색(海色)이 없어도 오십천 휘돌아 가는 벼랑에 자리한 정자 난간에서 백두대간 산줄기를 감상하는 맛이 제법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난간에 기대지만, 죽서루를 감상하는 최고 포인트는 오십천 건너편의 강언덕에 있다. 관동팔경을 화폭에 남길 때도 변화무쌍한 구도를 즐겨 사용했던 겸재 정선(鄭敾·1676-1759)도 맞은편 강둑에서 죽서루를 그렸다. 그래서 죽서루를 찾았을 땐 천재 화가가 인정한 최고 포인트에서 죽서루를 감상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삼척 해안엔 경치 좋은 곳이 아주 많아요.”

죽서루와 박물관, 동굴신비관 등이 자리한 엑스포타운을 돌아보면서 알게 된 젊은 아르바이트생은 이방인에게 ‘죽서루가 강가에 자리했다고 해서 삼척 바다 풍광이 민숭민숭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삼척의 바다는 아름답다. 비록, 1980년 행정구역이 분리될 때 애국가 배경지로 유명한 추암을 동해시에 내주긴 했어도 삼척엔 아직 자랑할 만한 절경지가 많다. 젊은 친구가 지도를 보고 찍어준 곳은 삼척항 북쪽의 새천년해안도로, 맹방해수욕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한재, 장호항 안쪽의 ‘고래무덤’이라는 갯바위, 그리고 해신당이 있는 신남항 등이었다. 이런 곳은 어느 계절, 어느 시간에 찾아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미덕이 있다.

이튿날, 삼척 해안을 감상하기 위해 이른 아침 삼척항에서 곰치국으로 숙취를 달래고 새천년해안도로를 휘돌아본다. 아쉽게도 먼 바다에 구름이 많이 낀 탓에 첫날은 해면(海面)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만나지 못했다.

길손을 위로하느라 “바닷가 어민들도 제대로 된 일출을 보긴 쉽지 않다”는 주민 말을 뒤로하고 7번 국도를 따라 남진하다 한재 고갯마루 근처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동쪽을 바라본다. 삼척10경에 꼽히는 맹방 명사십리다. 끝 모르게 이어진 백사장이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두 눈을 압도한다.

이어 마읍천을 건너면 이름도 무시무시한 ‘살해치’.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두 왕자가 살해됐다는 곳이다. 근처에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은 공양왕,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 공양왕이 묻혔다는 능(陵)은 이곳 삼척의 궁촌을 포함해 경기 고양시 원당동, 강원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이렇게 세 곳이다. 나중에 삼척문화원에 들렀을 때 “공양왕이 교살된 후 신원 확인을 위해 목을 잘라 머리만 가져가고, 몸은 이곳에 묻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성군 간성의 무덤은 공양왕의 최측근이던 홍문관 박사 출신의 함부열(咸傅說)이 왕의 시신을 수습해 간성으로 옮겨 묻은 것이라 한다. 함부열의 후손들은 현재도 왕씨 일가와 함께 공양왕릉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고 하니 600여 년이나 이어져온 의리가 눈물겹다.

이렇듯 각 지역의 공양왕릉은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어 전문가들의 고민거리이기도 한데, 사실 여부를 떠나 나라 잃은 임금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왕릉을 벗어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황영조 선수의 고향인 초곡 마을을 지나면 갯바위 풍광이 뛰어난 용화·장호항 해변 전망대에선 시간이 짧다. 장호항 안쪽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태양의 남쪽’ 촬영지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비경지. 이곳 갯바위에서 감상하는 일출은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마다 영화나 드라마 배경지가 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의 배경지라는 사실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 적지 않다. 이런 매력을 아는 지방자치단체에선 서로 촬영세트를 지어준다, 편의를 제공한다며 부산을 떨고 있다.

물론 삼척도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봄날은 간다’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영화팬들의 발길이 잦아지긴 했다. 당시 영화 주인공들은 근덕면 동막리 민가에선 대숲소리를, 근처의 신흥사에선 눈 덮인 산사의 풍경소리를, 그리고 맹방 해수욕장에선 파돗소리를 채집했었다.

그런데, 삼척을 비롯한 울진, 강릉 등의 고을에서 오래 전부터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있다. 바로 <삼국유사>의 ‘헌화가’와 ‘해가사’의 배경지라는 타이틀이다.

대박 터트린 드라마 하나가 지방자치단체의 관광수입을 좌지우지하는 게 현실인 요즘, ‘헌화가 배경지’라거나 ‘백성들이 해가사 노래를 불렀던 해안’이라는 수식은 모두 욕심낼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헌화가’의 무대로 묘사된 “곁에 있는 돌 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하는 풍광이 이 동해안에 어디 한두 곳이던가.

삼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명 고찰을 곁들여 “헌화가는 울진과 호산 사이, 해가사는 임원과 용화 사이의 해안이 유력하다”고 주장해왔다. 시를 상징하는 꽃도 철쭉으로 정할 정도로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런데, 얼마 전 강릉에서는 강릉의 강동면 심곡항과 옥계면 금진항을 잇는 해안에 드라이브 코스를 만들고 학자들의 고증을 거쳤다며 과감히 ‘헌화로’라 이름을 지었다.

길손은 어느 곳이 ‘헌화가’의 진짜 무대인지는 모른다. 허나 강릉이든, 삼척이든, 울진이든 정확한 논리로 유서 깊은 노래의 무대가 제대로 밝혀진다면 영동, 아니 이 관동지방 나들이에 즐거움이 하나 더 보태지는 것임은 틀림없지 않은가.

장호항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드디어 해신당(海神堂)이다. 동해와 접한 삼척은 아직도 어촌의 독특한 민속이 남아있는 마을이 많은데, 특히 신남항의 해신당엔 지금은 이 나라 어디서도 보기 어려워진 남근(男根) 봉헌제의 특이한 전통이 남아있다.

우리나라 동해안 바닷가 마을엔 서낭당과 해서낭당이 공존하는 게 특징이다. 용화리, 노곡리, 갈남리 등 삼척의 바닷가 마을들도 대부분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과 바닷일을 관장하는 해서낭을 모두 두고 있다.

대체적으로 서낭신은 남신(男神)이고, 해서낭은 거의 여신(女神)인데, 예전 동해안의 많은 마을에선 해서낭에게 남근을 봉헌했다. 민속신앙에서 생식과 풍요를 상징하는 남근을 여신에게 바치는 것은 여신과 성교를 맺어 그 생식력이 다산과 풍요로 이어지라는 기원이다.

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속신앙이지만, 현재까지 이 풍습이 남아있는 곳은 이곳 갈남리 신남 마을과 강원도 고성군 망개 마을 두 군데 뿐이라 한다. 망개 마을에선 나무로 남근 세 개를 깎아 여근바위에 꽂아놓고 제사를 지내고, 신남 마을에선 나무로 만든 남근 5개를 굴비 엮듯 한 줄로 엮어 제물과 함께 진설하는 차이가 있다.

해서낭의 남근봉헌제 전통이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시대를 무사히 지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거친 바다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이 녹녹치 않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중한 전통이 20세기의 산업화사회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으니, 우리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고 사는 게 아닐까.

다행히 이곳 해신당은 21세기까지 살아남았고, 이는 앞으로도 소중히 가꿔나가야 할 전통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남근을 커다랗게 조각해놓은 공원에선 관람객들 일부는 쑥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당집 가는 길에 자리한 남근목 장승엔 사진을 찍는 연인들 모습도 보인다.

“나, 어때? 사진 잘 나오겠지?”

“오빠, 좀 창피하지 않아?”

“괜찮아. 여기 오면 다들 이렇게 하고 기념사진 찍는데, 뭘….”

그런데, 바다에서 안타깝게 죽은 처녀의 원혼을 남근으로 달랜다는 해신당 전설은, 왠지 조선 유학자들이 덧칠한 혐의가 있어 보인다. 그런 사연이 있은 후에 남근을 바친 게 아니고, 이미 그 이전에 여성성을 지닌 해신에게 남근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서낭제를 정월 대보름날과 시월의 첫 말날(午日)에 지내는 까닭도 12간지 짐승들 중에 말의 성기가 가장 크기 때문이라 우스개 삼아 말하지만, 원래 서낭신앙에서 항상 밀접한 관련을 맺고 숭배되는 동물이 바로 말(馬)이었다. 예전엔 전국 대부분의 서낭제는 거의 말날에 지냈다. 이는 말로써 호랑이의 피해를 방지하려는 상징성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은 서낭신의 사자(使者)로써, 또는 서낭신이 타고 다니는 이동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남에서 임원, 호산을 지나 가곡천 하류에 이르면 삼척의 바다와는 이별이다. 경북 울진과의 경계에 있는 고포 마을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한 마을 두 도’를 이룬 독특한 마을로 조선시대 왕실에 진상하던 미역이 유명하다.

고포 마을을 나와 낙동정맥 응봉산(999m) 품으로 드는 길. 그토록 아름답던 가곡천은 엉망이었다. 삼척을 비롯한 영동지역은 재작년 여름 태풍 루사에 이어 지난 여름 태풍 매미의 호우 강타로 엄청난 수해를 입었다더니 현장에 와서 보니 보통 물난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응봉산 용소골의 철다리가 다 떠내려가고, 근처의 가곡 자연휴양림도 수해 여파로 폐쇄될 정도였다. 지난 2000년엔 큰 산불이 휩쓸고 지나가더니….

응봉산 덕풍계곡에서 하룻밤 묵으려던 계획은 수해복구작업의 여파로 접근이 쉽지 않을 듯해 포기했다. 대신 밤새도록 귓전을 때리는 파돗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바다에서 하룻밤 더 묵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이튿날 아침엔 갯바위 너머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만날 수 있었고.

삼척은 바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곧바로 깊은 산골 풍광이 펼쳐져 언덕 하나만 넘으면 언제 바다를 떠나왔는지 아득하다. 지방도를 타고 가곡천을 거슬러 오르다 동활리에서 낙동정맥 속으로 들어서면 강원도 산골 가옥의 특성을 살필 수 있는 신리 너와집이 반긴다.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전통가옥은 주변에서 구하기 쉽고, 그 지역의 기후 환경에 적합한 자연 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알래스카 인디언의 이글루(Igloo)와 몽골의 겔(Ger)이 그렇다. 사계가 뚜렷한 우리나라도 지방마다 전통가옥의 특색이 있다. 화전민들이 많이 살던 강원도 산간벽촌은 너와집과 굴피집이 발달했는데,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깊은 산간의 삼척 주민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이런 데서 살았다.

하지만 굴피집, 너와집은 이젠 삼척에서조차 몇 채 안 남아 문화재로만 보존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삼척에서 이런 너와집과 굴피집을 볼 수 있는 곳은 도계읍 신리와 신기면 대이리 골말, 미로면 내미로리 천태밭골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나그네보다 먼저 도착해 너와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답사팀 가운데 한 여성이 인솔자인 듯한 사내에게 묻는다.

“비가 새지 않을까요?”

“예, 지붕이 저렇게 허술해 보여도 비는 안 샌답니다. 왜냐하면….”

전통가옥이라곤 초가집 정도만 봐왔던 사람들은 너와집이나 굴피집의 여기저기 물이 샐 것 같은 지붕과 바람 드나드는 허술한 판자벽을 보곤 의아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맑은 날 조금씩 틈이 벌어져 있던 지붕은 습기를 머금게 되면 부풀어서 물샐 틈 없이 완벽한 지붕이 되고, 겨울엔 눈이 덮이면서 그 무게에 눌려 틈이 없어진다.

허술한 판자벽도 겨울철엔 땔감으로 쓰는 장작을 뱅 돌아가며 쌓아놓으니 걱정할 게 없다. 맑은 여름밤에는 지붕 틈새로 반짝이는 별들도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자연친화적인 가옥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강원도 산골 사람들은 겨울에 뭐하고 지내요?”

“글쎄요. 눈이 지붕을 덮는 한겨울에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전엔 눈 오면 전통스키인 설매 타고 설피 신고 노루에다 멧돼지 사냥을 나갔답니다.”
괜히 공짜로 엿듣는 것 같아 멋쩍지만, 인솔자가 말을 구수하게 풀어나가니 자리를 뜰 수 없다.

“깊은 산골의 겨울은 예나 지금이나 단조롭습니다. 노인들 말에 의하면 음력 정월 한 달 동안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놀았대요. 그래서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을 청년들은 창을 들고 하나둘 모여들었죠. 지금도 집에 가보면 광에 이들이 예전에 사냥을 다니던 창이나 설피 같은 도구들이 남아있어요. 요즘은 장작불 대신 기름보일러로 바뀌고, 코쿨불 대신 형광등이 밤을 밝히지만, 노인들은 눈 내리는 날이면 밖을 내다보며 사냥 다니던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지낸답니다.”

인솔자는 사십 중반으로밖에는 안보였지만, 산골 사람들의 삶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언젠가 도계 산간 마을로 답사를 갔던 적이 있었어요. 삼척에서도 도계, 신기의 골짜기 깊은 마을에 가보면 싸리로 만든 식량저작용 채독이나 떡을 칠 때 쓰는 안반 같은 게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거든요. 그런데 노인 말씀이 어느 날 서울서 골동품상이 찾아와서 팔라는 걸 안 팔았더니 밤에 와서 몽땅 훔쳐 가버렸대요. 보면 여기 신리 너와집에 있던 것도 많이 없어졌어요. 여긴 사람도 살지 않는 빈집이잖아요.”

외로운 길손은 해박한 인솔자가 있는 이 답사팀과 코스가 같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러나 신리 삼거리에서 답사팀 차량은 동해쪽으로 가려는 듯 내가 조금 전에 거슬러온 가곡천을 따라 내려가는 바람에 길손은 아쉬운 마음으로 차를 서쪽으로 몰아야 했다.

삼척이 자랑하는 예쁜이 미인폭포를 지나면 낙동정맥 분수령 근처에 자리한 통리역이다. 행정구역으론 태백시에 속한다. 삼척과 태백의 시계가 갈리는 통리역 삼거리에서 도로공사가 한창인 38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향하면 곧 도계다.

사행천처럼 굽이도는 철로를 올라오는 열차의 숨소리가 힘겹게 들리는 건 당연하다. 영동선 열차를 타본 이라면 잘 달리던 열차가 이 근처에서 갑자기 뒷걸음질쳐 당황해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도계의 나한정역과 흥전역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스위치백 구간이다. 스위치백은 경사가 워낙 급해 열차가 단번에 올라갈 수 없을 때 지그재그형으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경사면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열차가 후진할 때에 위험이 많고, 고속운전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 단점. 그래서 얼마 전 철도청에선 이 구간에 루프식 터널을 뚫기로 결정했는데, 이 터널은 2007년 무렵 완공될 예정이라 한다.

이곳 통리역과 심포리역 구간은 처음엔 열차를 케이블로 묶어 끌어올리는 인클라인 방식을 이용했었다. 그래서 화차가 열차를 끌어올릴 때 승객들은 내려서 고개를 걸어서 올라야 했다. 그러던 것이 1963년 영동선의 전철화로 스위치백으로 바뀌었다. 선로에서 열차가 지그재그식으로 운행하는 스위치백에선 승객은 내릴 필요가 없었다. 이렇듯 영동선 통리역~도계역 구간은 인클라인식에서 스위치백을 거쳐 루프식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산악철도의 지형 극복 역사를 한눈에 짚어볼 수 있는 의미있는 곳이다.

노루꼬리처럼 짧은 게 겨울 해라지만, 백두대간 동쪽 기슭에 바싹 붙어있는 도계, 신기 땅은 오후 햇살 비끼자마자 산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어차피 길손들이 삼척에서 밤이슬 피할 수 있는 곳은 파도소리 들려오는 바다에 있든지 첩첩산골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 파도가 부르면 해안으로 나가면 되고, 산이 손짓하면 계곡으로 들어가면 된다.

오늘은 덕항산 깊은 산골의 굴피집 구들장에 등을 지져야겠다. 미리 전화를 넣어두었으니 걱정도 없다. 이제 눈만 내려주면 더 없이 좋으련만…. 골말로 찾아들었을 땐 이미 사위는 깜깜해진 뒤였다. 산골의 순박한 미소를 지닌 굴피집 주인 내외가 길손을 아들처럼 맞이한다. 대처에 나간 아들이 쓰던 방에 짐을 푼다. 벽 모퉁이엔 코쿨이 있지만 그을음은 없다. 하긴 쓸 일이 있겠는가. 굴피집은 천장이 낮은 덕에 위풍이 없고 오히려 아파트보다 아늑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것만 같다.

백두산간 지방에 너와집, 굴피집 즐비하던 1960년대 말, 당시 삼척 소속의 통리초등학교에 다니던 이 길손은 수업 빼먹고 들로 산으로 싸돌아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너와지붕까지 눈이 쌓이는 깊은 겨울엔 방에서만 뒹굴며 놀곤 했었다. 아까 통리를 지날 때 옛 학교가 잘 남아있는지 살펴보지 못한 게 왠지 아쉬워진다.

산채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뒤뜰로 나간다. 동쪽 하늘엔 어느새 살진 상현달이 두둥실 떠있다. 산골 노인의 손등처럼 울퉁불퉁 거친 굴피 지붕을 쓰다듬는 달빛은 맑은 공기에 깨끗이 걸러진 듯 한없이 맑다. 굴피 지붕 너머의 감나무엔 까치밥이 넉넉히 매달려있다. 뜰 한쪽엔 차곡차곡 쌓아 돌을 올려놓은 굴피 더미도 보인다.

굴참나무 껍질을 지붕에 차례로 포갠 굴피집은 물이 잘 빠지고 건조가 잘 되거니와 보기와 달리 수명도 길어 흔히 ‘굴피 천 년’이라 한다. 보통 굴피는 처서 전에 벗기는데, 그 이후엔 물이 말라서 잘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붕을 덮은 후 몇 년 지나면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쓰며, 보통 3년 주기로 썩은 조각들을 교체하고 보수한다.

덕항산(1,071m) 제일 깊숙이 자리한 골말의 굴피집과 너와집은 인근의 토박이 사진작가에 의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최근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이라는 환선굴(천연기념물 제178호)이 개방되면서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삼척에서 발견된 동굴은 모두 54개에 이른다. 특히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인 환선굴과 국내 석회암 동굴 중 가장 빼어난 미학을 자랑하는 관음굴 등이 있는 신기면 대이리 동굴지대는 ‘해안산간오지’인 삼척에게 ‘동굴의 왕국’이란 왕관을 씌워준 일등공신이다.

골말을 벗어나면 길은 오십천을 따라 흘러간다. 주변은 수해복구작업을 하느라 어지러운데 곧 준경묘(濬慶墓)가 반긴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ㄴㆍㄹㆍ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조선의 개국을 합리화하고 통치자로서의 임무를 밝힌 이 영웅서사시 ‘용비어천가’ 첫 장에 등장하는 육룡의 첫번째 용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1274)는 이곳 삼척과 인연이 깊다.

전주에서 살던 목조가 산성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두고 다투다 사이가 나빠지자 도망쳐온 곳이 바로 처가가 있는 강원도 삼척이었던 것. 목조는 이곳 미로면 활기리 산골에 이주해온 1년 뒤 부친상을 당하자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을 남기고 현재의 위치에 장사지냈고, 모친이 사망하자 동산리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전주에 있던 산성별감이 삼척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을 듣고 추종자 170여 명과 함께 다시 함경도로 이주해 여진족의 천호(千戶)벼슬을 하였다.

삼척의 민간에선 처갓집 소를 잡아 산신제 제물로 쓰고 소를 돌려 줄 길이 없어 도피했다고 전한다. 또 당시 임기응변으로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이라고도 한다. 조선 왕실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1899년에 두 묘를 수축했지만, 이미 풍수의 약발이 떨어졌는지 얼마 뒤 나라의 멸망과 함께 조선 왕실도 무너지고 말았다.

허나, 경기도 광릉의 보물이 나무숲이듯 준경묘의 진짜 보물은 소나무다. 이곳 준경묘 둘레는 울진의 소광리 금강송림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혈통이 좋다는 금강송이 자라고 있다. 100년 이상 된 장대한 금강송 수백 그루가 하늘로 쭉쭉 뻗어 오른 광경은 더 없는 장관이다.

이곳 금강송의 혈통은 지난 2001년 5월8일 준경릉 솔숲에서 있었던 세계적인 결혼식으로 증명되었다. 우리나라 나무 중 가장 품위 있고 높은 벼슬에 오른 보은의 정이품송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신부감을 이곳 준경릉 솔숲에서 골랐다.

수원의 산림청 임업연구원이 지난 20여 년간 전국의 산과 들에서 확보한 우량 소나무 524본 중 수형, 체격, 생식력, 우수 형질유전 여부 등을 따져 울진 소광천에서 두 그루, 삼척 준경묘에서 두 그루, 평창에서 한 그루를 간택했는데, 이중 준경묘 미인송이 으뜸으로 꼽혔던 것이다.

이제 어느덧 삼척과 헤어질 때가 되었지만, 빼놓아선 안될 곳이 있다. 바로 두타산(1,353m) 기슭에 자리한 천은사 이승휴 유허지다. 고려시대에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국왕의 실정과 국왕 측근의 폐단을 10개항으로 간언하다 파직되자 이곳 용안당(容安堂)에 은거하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의 손자 이름은 단군일세.”

찾는 이 드물어 외로운 사당에서 민족문화와 민족사의 독자성에 대한 자부심을 기록한 <제왕운기>의 한 대목을 읊어본다.

산골의 겨울은 낮이 참으로 짧다. 어둑해지는 천은사를 벗어나 백두대간의 분수령인 댓재를 오른다. 하장 가는 길이다. 고갯마루를 넘어온 북서풍은 몸을 날릴 정도로 세차다. 백두대간 분수령 서쪽에 있어 한강 수계에 속하는 하장은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 본류인 골지천을 젖줄로 삼고 있다. 비록 하장이 삼척 땅이라 해도 분수령 동쪽 마을과는 당연히 주위 환경이 다르다. 오래 전 하장 토박이인 선배에게 백두대간 동쪽과 하장의 가장 큰 차이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하장은 겨울에 아주 추워요.”

고갯마루에서 하장 땅에 단 한 발만 들여놓았을 뿐인데 동쪽과는 달리 정말 너무 춥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은 언제쯤이나 쏟아질까. 올 겨울엔 눈이 많이 내린다던데.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그리고 동해….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정겨움으로 이루어진 삼척 땅을 다니는 내내 그토록 기다리던 대설주의보는 물가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하장 광동호를 지날 때도 발령되지 않았다.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