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최고의 설국은 어디일까. 대관령을 끼고 있는 평창, 단군에게 제사지내던 산이 있는 태백, 설악의 한계령이 굽이도는 양양이나 인제, 아니면 바다 건너의 울릉도? 모두 눈 하면 결코 빠지지 않을 정도의 명성을 지니고 있는 고을들이다. 또 중부 이남에선 지리산을 끼고 앉은 고을들이나 남해 건너 한라산이 버티고 서있는 삼다도 제주 역시 충분히 이름값을 하고도 남는다.
거기에 지난해 2010 동계올림픽 유치권을 놓고 ‘한국 동계레포츠의 메카’라 불리는 평창과 ‘맞짱’을 떴던 이력을 지닌 덕유산(德裕山·1,614m)의 무주(茂朱) 역시 명단에 꼭 넣어야할 고을이다.
몸은 본능처럼 덕유산 자락으로 자석처럼 끌리지만, 가장 맛있는 떡은 맨 나중에 먹기로 하고, 무주 동북쪽을 살짝 적시고 흐르는 금강 기슭으로 방향을 잡는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마침 무주장날이라 남대천변 무주장터엔 무주 주민들이 하나둘 몰려들고 있다. 무주장은 2001년 새로 단장하면서 이름도 ‘반딧불이장터’라 해놓으니 왠지 더 정감이 간다. 더불어 무주 산골 사람들의 넉넉한 정을 느끼기엔 더없이 좋다.
겨울이라 싱싱한 나물류는 없지만, 간밤에 잡은 듯한 싱싱한 돼지고기며, 보기만 해도 군침 넘어가는 말랑말랑한 곶감에 온갖 조개와 굴, 싱싱한 생선도 눈길을 끄니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시골장이다.
서로 안부 인사에 장터는 시끌벅적 생동감이 넘치고, 물건 사라 외치는 장돌뱅이 아저씨 목소리도 정겹다. 어디 그 뿐인가. 깍쟁이 도시 아줌마들이 흥정만 하고 물러나도 산골 할머니들은 순박한 미소를 잃지 않고, 오히려 엄마 손잡은 아이에게 가면서 먹으라고 과자 하나 집어주니 그 아주머니 돌아서서 과자 한 봉을 산다.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 해도 시골 노인들은 5일장 보는 순간만큼은 시름을 잊는 듯하다.
경상도 말씨와 전라도 말씨와 충청도 말씨가 뒤섞여있는 건 무주장만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이 장터만 해도 무주 주민들은 물론 인접한 진안군 동향면, 안천면, 장수군 계북면, 충북 영동군 학산면, 충남 금산군 부리면, 재원면 주민들이 찾아와 물건 사고팔며 인간사를 엮어가곤 했다. 흥정하고 군것질하느라 금강 주변을 둘러보려는 계획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푸근하고 넉넉해진다.
장터가 있는 남대천 물길을 따라 3~4km만 내려가면 남대천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자리잡은 대차리 서면 마을. 지금은 초등학교도 폐교될 정도로 한산하지만, 한때는 금산과 무주를 잇는 나루터가 있던 큰 마을로 일제 때까지는 대촌(大村)으로 불릴 정도였다.
망풍루라는 누각까지 있던 이 마을은 낙동강의 삼강나루만큼은 아니어도 호남 내륙의 선비나 장사꾼들의 애환도 싣고, 금산 오가는 손님까지 나르던 역할을 했지만, 2km쯤 하류에 국도로 이어지는 용포교가 생기면서 급속하게 쇠락했다.
마침 장날이라 막걸리 한 잔 하러 나섰다는 할아버지는 40~50년 전까지만 해도 저 나루에 배가 다니던 나루터가 있었던 기억을 들려준다. 콘크리트 다리 하나에 나루터가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몇 년 전 저 금강에 용포교보다 몇 배 길고도 높은 다리가 놓이면서 뚫린 고속도로는 무주의 전통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무주는 워낙 산악이 많은 고을인지라 현재까지는 전통이 잘 남아있는 편이다. 마을 공동신앙 중 가장 중요한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동제를 아직도 지내는 마을이 적지 않다. 대부분 새마을운동 때 잠시 중단하긴 했으나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는 걱정에 폐지했던 동제를 다시 올리기 시작할 정도로 전통 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무주 지역의 마을 수호신은 마을 뒷산에 모시는 산신과 마을 입구 길가에 모시는 서낭신, 장승, 솟대 등인데, 산악지형인 까닭인지 동제를 산신제라 많이 부른다. 그리고 무주를 포함한 진안과 장수, 곧 무진장이라 불리는 이 고을들은 누석단이라 불리는 돌탑신앙이 특별한 곳이다.
마을 앞이 허(虛)하기 때문에 이를 보강할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쌓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구천동 집단시설지구 입구의 설천면 삼공 마을과 무주리조트 입구의 월곡 마을을 비롯해 무풍면, 적상면, 안성면과 무주읍 등에도 아직 많이 남아있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데는 돌탑을 포함해 장승과 솟대 등의 신앙 대상물을 복합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가끔 솟대를 전봇대 정도로 착각하는 웃지못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특히 돌탑이나 장승과 어우러진 게 아니라 솟대 혼자 서있는 경우라면 이런 일은 흔하다.
이 길손도 금강 안쪽의 내도리 산의 마을로 솟대를 보러갔다가 마을 할아버지에게 “젊은 사람이…” 하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듣기도 했다. 허나 영동으로 넘어가는 길가에 서있는 그 솟대 옆에 전봇대가 가깝고, 솟대 위쪽으로 전깃줄이 지나니 누구라 해도 영락없는 ‘작은 전봇대’로 여겼을 것이다.
이 산의 마을에선 솟대를 짐대라 부른다. 긴 나무 위에 까마귀를 만들어 올려놓은 것으로 옛날 마한 사람들이 천신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 신줏대인 것이다. 정월 초사흘부터 보름 전후에 당산제를 지낸 후 이곳으로 와서 거리제라고도 부르는 짐대제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을 빈다. 경로당에 있던 할머니들은 마을 입구에 짐대가 있어 마을에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소중한 것을 전봇대라 착각했으니….
다시 금강을 건너와 무주로 들어서면 시가지 남쪽에 우뚝 솟은 적상산(赤裳山 1,029m)이 손짓한다. 가슴 뜨거운 길손이 어찌 ‘붉은 치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랴.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적상산은 조금은 칙칙한 ‘흰 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적상산의 본색을 볼 수 있는 가을이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이 적상산은 그런 겉치레가 아니어도 충분히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닌 산이다.
커다란 덩치의 덕유가 백두의 적통다운 권위로 무주 고을을 지켜봤다면, 덕유에서 갈라져 나온 적상은 무주 고을 가까이에서 늘 무주를 지켜보면서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그래서 무주 주민들은 덕유의 백련사보다 적상의 안국사가 더 정겹고, 먼 빛의 덕유보다 가까운 적상을 더 사랑했는지 모른다. 전쟁 때 이들이 숨어살던 산성도 거기에 있고, 섬나라나 대륙에서 침략자들이 건너왔을 때도 적상은 늘 피난민들을 보듬어줬다.
적상산은 언뜻 보아도 천혜의 요새다. 정상 부근엔 너르진 않아도 병기와 건물을 짓고 숨어있을 분지도 있다. 또 여느 산성보다 수량도 많아 옛기록을 보면 연못이 4군데요, 샘이 23곳에 이른다 했다.
고려 말 최영의 눈에 띄어 전략 요충지로 처음 인정을 받은 뒤 세월이 흘러 결국 석성이 세워졌다. 그 후 성안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도 세워지고, 절집도 들어앉았건만, 이런 매력 때문에 20세기 말엽엔 한반도에 태어난 이래 최고의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무주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만든 적상댐이 그것이다. 북창 마을로 흘러내려가는 협곡만 막으면 낙차 수백 미터의 댐이 하나 뚝딱 생기니 개발론자라면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이 ‘지엄한’ 국립공원 지역이든, 역사 깊은 유적지든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환경영향평가도 받았겠지만 대체 국립공원 구역 안에서 개발을 위한 환경영향평가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긴 백성들에게 필요한 전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명분이 있는데 이까짓 선원각 주춧돌 몇 개가 대수였겠는가. 적상산사고를 보호하고 민초들을 지켜주던 석성이 상부댐 영역을 알려주는 돌담으로 전락해버렸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런데도 우리는 산정에 호수 하나 생겼다고 자랑하고, 그 호수를 구경하러 간다며 돈을 내고 있다. 이 길손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어쩌면 이게 우리 시대의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어쨌든 이곳에 상부댐을 막고 적상호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많이 변했다. 승병의 안식처로 지어졌던 안국사는 물이 들어차게 되자 위쪽의 호국사지 근처로 옮겨갔고,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지도 자리를 호수 위로 이전했다.
1277년에 창건됐다는 안국사는 700여 년 동안 머물던 보금자리를 떠나 1988년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1993년 칠월칠석날 새로운 금당에 부처님을 봉안하는 첫예불을 올렸다.
나그네가 10년 전에 들렀을 때는 절집에 현판도 달지 못했고, 여기저기 마무리 공사하느라 어수선했건만, 세월이 약이라고 하더니 어느새 제법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10년만에 이나마 자리 잡은 것은 극락전 주춧돌과 기둥 등 재료를 대부분 예전 것을 그대로 쓴 덕인지도 모른다.
절집은 보통 앉음새를 중요하게 여긴다. 안국사가 비록 경사면에 자리잡았다 해도 왠지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것은 정면의 덕유산에 무주리조트의 하얀 슬로프가 선명한 까닭일 터. 그래서 누각을 세워 가렸지만 그 바람에 절집 전망이 아주 답답해졌다.
게다가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비록 절집을 통하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절집 안에서 삼삼오오 몰려서 음식 냄새 풍겨가며 식사하고 있으니, 남의 집에 들른 손님이 갖춰야할 예의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게 아닌가. 등산로를 예쁘게 돌리면 모를까, 어떤 스님 말대로 공부할 절집은 아닌 듯하다.
안국사에서 서창쪽으로 길을 잡고 적상산성 서문지를 지나면, 최영 장군이 산세를 살피러 오르다가 칼로 내리쳤다는 장도바위가 길을 막는다. 탐라를 정벌하고 돌아가던 길에 적상산을 보고 그 견고한 산세에 반해 산성을 세우자고 상소했던 최영 장군.
그 후 이곳에 지어진 적상산성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조선왕조의 실록과 왕실족보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니 이런 게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보다. 산성에 쌓인 하얀 눈이 차갑다.
이제 무주구천동 찾아 덕유산으로 갈 차례다. 하지만 아무리 겨울 덕유산이 좋다해도 무주에서 여름 반딧불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차윤과 손강 두 사람에게서 유래한 형설지공(螢雪之功) 고사로 잘 알려진 반딧불이(개똥벌레)는 30년 전만 해도 이 땅 어디서고 쉽사리 볼 수 있던 곤충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산업화사회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반딧불이 서식처는 파괴됐고, 농약 같은 각종 오염원으로 수질이 나빠지면서 멸종 위기에까지 처하게 됐다. 그 결과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는 환경지표 생물인 반딧불이 불빛이 명멸하는 광경을 보기 매우 어려워졌다.
그나마 이 무주땅이 남한에서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으로 손꼽힌다. 1980년대 초 무주구천동을 찾았다가 온몸을 휘감을 정도로 많은 반딧불이를 보고 좋아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반딧불이 추억을 못 잊고 있는데, 무주에서 반딧불이축제를 한다기에 벼르고 벼르다가 지난 여름 축제현장을 찾았다.
읍내 한풍루 뒤쪽에 설치한 대형 돔 안으로 들어서니 임시로 지은 초가 안에 반딧불이를 풀어놓고 관광객들을 들여보내 구경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갔던 관광객들이 나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다음 팀을 들여보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 반딧불이를 볼 수 있지요?”
참지 못하고 진행요원에게 물었다.
“글쎄요. 반딧불이들이 스트레스 받아서 빛을 내지 않아서요. 한참 기다려야할 것 같은데요.”
“…….”
발광(發光)은 짝을 부르는 행위다. 수컷이 내는 불빛은 암컷보다 두 배쯤 밝다. 수컷은 암컷을 발견하면 더욱 강한 빛을 내며 접근하고, 암컷도 이에 호응하면서 빛이 강해진다. 애반딧불이는 초여름에 나타나는데, 풀숲에 붙어 약하게 발광하는 것이 암컷이고, 강하게 발광하면서 접근하는 것이 수컷이다.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가둬놓고 청혼을 하라니. 그러한 사랑의 세레나데가 흥겨울 리 있겠는가. 그러고도 스트레스 안 받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성질 급한 길손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죽으로 이른 저녁을 먹은 후 남대천 상류인 무풍쪽으로 달려 국도변에서 한참 벗어난 한 마을로 들어섰다.
개울 건너서 사과밭 지나고 콩밭 위쪽 펑퍼짐한 묵밭 근처까지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한참 뒤 일몰의 잔영조차 사라지고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고요. 먼데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벌컥 무섬증이 일었지만, 저 숲에서 사람만 안 나타나면 별일 없는 것 아닌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득 풀숲에서 불빛 하나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여린 불빛이 신호였을까? 잠시 후 수십 개의 불빛들이 숨 고를 틈도 없이 나타나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반짝거렸다. ‘마치 별이 내려와 춤추는 것 같군.’ 어떤 시에서 보았는지, 동화의 한 구절인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학창시절 여자친구에게 던졌던 감상적인 멘트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딧불이를 볼 때면 늘상 ‘천상의 별이 지상으로 내려와 춤추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은하수보다도 달빛보다도 아름다운 늦반딧불이가 부르는 한여름밤의 세레나데는 1시간쯤 계속됐다. 그러다 갑자기 반딧불이 불빛이 사라졌고 사위는 다시 어두운 장막만이 드리워졌다.
그 밤, 그곳이 그리워서일까. 길손의 승용차는 어느새 지난 해 여름밤에 반딧불이를 보았던 그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찬 바람이 옷 벗은 사과나무를 휘감는 겨울밤에 무슨 반딧불인가? 대신 반딧불이 불빛 같은 눈발이라도 날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와 반딧불이축제의 단맛을 알아챈 무주는 현재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길을 새로 낸다, 좁은 길을 넓힌다, 태풍으로 피해 입은 하천을 복구한다 부산을 떨며 여기저기 파헤치고 있는 무주는 현재 공사중이다.
그러나 근시안적 방법으로의 복구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훼손을 불러오게 마련. 최근 몇 년 간 무주에 반딧불이 서식지가 감소하는 바람에 천연기념물 지정구역이 변경되기도 했다는 기사라도 접하게 되면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높은 자리에 앉은 양반들은 무주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다 실패하면, 현재 설천면의 반딧불이자연학교 자리에 대규모로 짓고 있는 반딧불이테마공원이 불필요해질 때가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겨울에 눈 없는 덕유를 상상하는 게 어렵듯이 반딧불이 없는 무주의 여름을 어찌 그릴 수 있으랴.
이런저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무주의 겨울밤도 예전처럼 고즈넉하지 않았다. 화려한 복장을 한 스키어들의 웃음소리와 술꾼들의 고함소리에 구천동 칼바람도 숨을 죽였다. ‘구천 명의 생불(生佛)이 나올 정도로 깊고 그윽한 계곡’이라 해서 구천둔(九千屯)이라 불렸다는 전설이 여름 피서철뿐만 아니라 겨울에조차 무색한 밤이었다.
이튿날,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과 함께 오지의 대명사로 여겨져온 무주구천동 33경 중 첫 관문이라는 나제통문부터 짚어나간다.
나제통문(羅濟通門). 신라와 백제가 통하는 문이라! 누가 뭐라 해도 이름 하나 잘 지었다. 비록 삼국시대가 아닌 일제 때 뚫렸고, 높이 3m, 길이 10m의 작다면 작은 바위굴이지만, 무주의 비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고 이야깃거리도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여름 성수기엔 나제통문 양쪽에 신라와 백제 검문소도 설치해놓고 깃발도 세워 옛 국경 분위기를 연출한다.
본래 무주구천동 본류인 원당천 물줄기와 나란히 달리는 암릉인 석견산(石絹山)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고, 그 능선으로는 설천과 무풍을 잇는 나제통도(羅濟通道)라는 고갯길이 있었다.
이 능선을 경계로 동쪽의 무풍은 신라 무산 땅이었고, 서쪽의 설천·적상면과 무주읍 등은 백제 적천 땅이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석견산에 굴이 뚫렸다. 처음 이름은 설천면에 있는 굴이라 하여 설천굴(雪川窟). 그러다 이곳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는 유래에 착안해 나제동문(羅濟洞門)이나 나제통문 등으로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나제통문으로 굳어졌다.
설천과 무풍 사이의 석견산이 국경으로 확정된 것은 서기 3~4세기 무렵이라 한다. 이때부터 백제가 망할 때까지 300년쯤 이 일대는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됐고, 후삼국 때에도 견훤의 군사가 이곳을 공격할 때 신라가 왕건에 군대를 청하면서 혼전을 거듭했으니 이 지역은 삼국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뤘다.
나제통문 하류의 파리소(沼)엔 피 냄새 맡고 몰려든 파리떼가 들끓어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고, 백제가 망하자 의자왕의 딸이 복수하기 위해 무풍으로 숨어들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나제통문을 지나 무풍쪽으로 500m쯤 가다보면 오른쪽 길가에 커다란 분묘 하나가 눈에 띄는데, 실제로 이곳 이남(伊南) 마을 주민들은 마을 무덤들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신라 병사들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마을 사람들이 주변에 흩어져있던 신라병사 무연고 묘를 모아 대형 분묘를 세운 것이다. 대형 분묘 뒤로는 내력을 짐작할 수 있어 묘비도 함께 세웠다는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등의 분묘도 있다.
이렇듯 나제통문이 생긴 지는 100년이 안 되지만, 이 굴을 지날 때마다 1,2천년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현장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조카에게 나제통문의 유래에 대해 장황하게 일러줬더니, 녀석은 단 몇 마디로 나제통문을 표현해버렸다.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굴이네요.”
사실 이 굴을 지날 때마다 정말로 왠지 백제 땅에서 신라 땅으로 건너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물론 삼국시대부터 있던 굴은 아니지만…. 그러나 비록 이렇게 행정구역을 합쳤어도 아직도 양쪽의 언어와 관습이 다르다 하니 참으로 질긴 게 인습인가 보다.
1980년대 무주 지역의 언어를 조사한 책자를 보면, 무주의 방언은 무풍, 그리고 무풍 이외의 방언 사이에 두꺼운 등어선(等語線)이 형성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무주 주민들은 좀더 세세히 구분하고 있었다.
“여긴 면(面) 단위마다 말씨가 다 달라요.”
어쩌다 말동무가 된 택시기사는, 무주 읍내에 산다고 했는데도 확실한 영동 말씨로, 무주에는 다섯 개의 사투리가 있다고 했다. 그는 무주장에 가면 사투리의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말에 귀밝은 이들은 이웃의 군(郡)과 차이가 나는 고향 말씨를 구분할 수 있지만, 같은 군에서 이렇게 면(面) 단위마다 차이가 크게 나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무주가 국경지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쪽으로 진안군과 장수군, 북쪽으로 충남 금산군, 충북 영동군, 동쪽으로 경북 김천시와 경남 거창군에 접하는 접도 구역인 것도 큰 영향이 있다. 그러니 무주가 1읍 5면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인데도, 전북을 비롯해 5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택시기사의 설명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유일하게 신라땅에 속했던 동쪽의 무풍은 정감록 등 비결서에 십승지로도 손꼽혔다. 무주군에서 가장 오지로 통하는 구천동이 십승지가 아닌 게 다소 의외다. 그러나 구천동은 20세기 말엽에 들어서며 국립공원 지정이다, 무주리조트다 해서 많이 번잡해졌지만, 이곳 무풍만은 아직도 고즈넉하니 예언자들이 이런 변화를 미리 읽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봉황이 날개를 펴고 마을에 내려오는 형국인 무풍은 농사지을 땅도 의외로 넓어 나제통문만 뚫리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가히 몸을 숨길 만한 곳임에 틀림없다. 이 길손이 지난 여름에 반딧불이를 보았던 마을도 그곳에 있다.
나제통문의 역사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원당천을 거슬러 오르며 무주구천동의 정채(精彩)인 구천동33경을 구경하면 된다. 나제통문서부터 덕유의 정수리까지 36km에 걸쳐 펼쳐지는 기나긴 계곡은 깎아지를 듯한 바위벼랑, 거기에 뿌리박고 자라는 천년송, 바위벼랑을 휘감고 돌아가는 급류, 아기자기한 폭포, 그리고 문득 숨 고르는 푸른 담(潭)이 꼬리를 물고 얼굴 내미니 역시 백두대간에 이름 올린 산에 기댄 명승지답다.
새봄 연초록의 새순이 돋으면 참꽃과 개꽃이 산불처럼 타오르고, 덕유평전에 노란 원추리 피어나는 여름엔 시원한 계류 안고 도는 녹음 우거진 숲에서 뻐꾸기 울어대다가, 산하가 오색으로 물드는 계절이 되면 또 어떤가. 그런데, 그 좋은 계절 다 재껴두고 칼바람 휘몰아치는 동지섣달이라니….
무주가 아무리 손꼽히는 설국이라 해도 얼어붙은 계류를 구경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래도 33경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6경 일사대(一士臺)는 그나마 방문객이 가끔 찾아든다. 그 물가에 자리한 서벽정(棲碧亭)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들어와서 공부하던 곳이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니 배의 돛을 닮은 창암(滄岩)이 연재의 옹고집처럼 이 계절에도 홀로 고고하다.
이렇게 외구천동인 14경이야 말 그대로 설렁설렁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다 해도 내구천동이라는 15경부터는 발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9천 명의 성인이 숨어살았다는 깊은 계곡은 20세기 후반 이후 숨어 살 곳 없을 정도로 낱낱이 드러났지만, 이런 한적한 겨울이라야 그나마 예전의 운치를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달빛 아래서야 제빛을 드러낸다는 월하탄(月下灘)은 물방울 튀면서 얼어붙는데, 인월담, 사자담, 다연대 지나니 눈도 얼음도 점점 많아진다. 구천폭포 고드름 감상에 어느덧 발길은 백련사 스님들이 몸과 마음을 씻던 백련담 지나는데, 이내 산문(山門)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일주문이 반긴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9천의 승려가 있다던 구천동 절집의 내력을 증거하는 부도밭이 눈속에도 정겹다.
세속의 번뇌를 잊고 일심으로 부처와 진리를 생각하라는 일주문에서 길손은 잠시 세속적인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도 중에는 안국사 극락전 후불탱화 조성에도 참여했던 매월당(梅月堂) 설흔(雪欣 ?-1784) 스님의 부도가 있다. 그런데, 설흔은 생육신 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호가 같아 이 부도가 한때 김시습의 부도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지금도 인터넷을 보면 잘못 인용된 자료들이 떠돌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 주요사찰의 후불을 모시는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추대될 정도로 법명이 높았던 설흔 스님과 김시습의 입적은 무려 291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째 이런 일이 생겼을까. 향토학자들은 매월당이라는 아호(雅號)뿐만 아니라, 김시습의 설잠(雪岑)이란 법호(法號)와 설흔(雪欣)의 법호가 한자로 비슷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구천동의 25번째 경치인 안심대(安心臺)에 전하는, ‘김시습이 급히 몸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을 하다가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는 전설도 혼란을 부추기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아니, 그 반대로 안심대 전설은 이 부도가 김시습의 것이라 짐작하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매월당 김시습은 말년에 머물던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했고, 부도와 영정도 그곳에 있다.
두 분 매월당의 명복을 빌고 사바세계와 연을 끊는다는 이속대(離俗臺)를 지나면 백련사(白蓮寺) 풍경소리에 마음이 정갈해진다. 구천동33경 중 제1경인 나제통문과 제32경인 이 백련사를 빼곤 모두 조물주의 작품이다.
대웅전 들러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33번째 절경 향적봉 만나려 잰걸음이다. 스님들이 계율의식을 행하던 백련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지나면 산길은 마음만큼 가팔라진다. 대부분 겨울 관광객들은 이곳서 발길을 돌리지만, 여기서 향적봉 정수리까지는 1시간 30분만 발품을 팔면 된다.
산길에 자라고 있는 주목 허리 어루만지다보면 드디어 돌탑 서있는 향적봉 정상. 동쪽을 바라보니 파란 이내 낀 화폭에 가야산(1,430m)이 손에 잡힐 듯하고, 남쪽으론 지리산(1,915m)이 아련한데, 정상 부근의 어떤 주목도 눈꽃을 피우지 않았다.
며칠 전 향적봉 주목을 뒤덮었던 눈꽃은 벌써 떨어졌고, 어제 산 아래서 볼 때 모시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던 주능선의 서리꽃도 아침나절에 다 사그라졌던 것이다.
사흘도 못 가는 봄꽃만큼 허망한 게 없다지만, 어찌 하루살이 인생인 겨울 눈꽃과 서리꽃에 비길까. 그러나 눈꽃이 졌다고 어찌 칼바람을 탓하겠는가. 겨울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저 멀리 금강과 남대천에서 물안개 피어오르는 날, 향적봉엔 눈꽃과 서리꽃이 또다시 활짝 피어날 것이다. 무주의 겨울을 축복하듯이….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