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있다. 반공(半空)에 걸린 ‘돌불꽃(石火星)’은 금방이라도 높푸른 하늘을 태워버릴 듯 세차다. 불꽃 송이송이 모여 빚어낸 줄기는 하늘의 울타리. 가파른 바위턱엔 금강초롱 삼지구엽초가 하늘거리고, 암릉의 왕자인 산양이 고고한 자태를 자랑한다. 수만 년 세월이 흐르면서 쌓인 너덜과 이끼 덮인 고사목 지대엔 어딘가에 숨어있을 반달가슴곰이 점찍어둔 겨울 잠자리가 있다. 설악산이다.
강이 있다. 심산유곡을 지나온 물줄기는 옥빛 뱀처럼 원시의 생명력이 넘친다. 높다랗고 가파른 벼랑을 휘돌 때마다 새하얀 물꽃들이 방울방울 튀며 그려낸 산수화는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비밀지도. 그 맑은 물 속엔 열목어 산천어 어름치가 노닐고, 강물의 왕자인 수달이 미끈한 몸매를 뽐낸다. 내린천이다.
설악산과 내린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산과 강이다. 이 산천이 모두 인제 고을에 걸쳐 있으니, 복도 이런 복이 없다. 만약 자연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대회가 있다면 적어도 남한에선 으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제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행복하다. 두엄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했는데, 승용차 타고 반나절만 달리면 내설악과 내린천을 만나볼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인제-. 언제 불러 봐도 청정하게 다가오는 이 고을은 그러나, 워낙 넓고 험한 산악지대라 구석구석을 단 며칠만에 돌아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시간을 두고 틈날 때마다 찾는 게 최고다. 평생 애인인 셈이다.
서울서 인제로 갈 때는 흔히 44번 국도를 탄다. 예전의 좁은 비포장도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왕복 2차선 포장이 되었다가 21세기가 된 지금은 인제 지나 원통 한계리 삼거리까지 왕복 4차선 포장공사가 거의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멀고도 멀어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라는 군생활의 넋두리는 ‘인제를 떠나가면 언제 다시 올까,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긍정적 의미로 바뀌었다. 또 주민들은 이렇게 바꿔서 자랑하기도 한다. “인제 가면 좋을씨고 원통에서 살자꾸나.” 이런 자신감은 모두 설악과 내린천에서 온 것이다.
양평 홍천 지나면서 44번 국도를 따르다 인제 군계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잔잔한 소양호를 만난다. 겨울이라면 할 말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빙어낚시터. 한반도 전역에 겨울마다 일고 있는 빙어 바람은 이곳서 시작됐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호반의 잔잔한 물살이 점차 끝나가면서 물결이 강의 형세를 갖춰 가면 인제 읍내로 들어선 것이다. 인제는 제법 유서 깊은 고을이다. 그런데 읍내엔 별다른 역사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향교가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 지난해 지은 산촌민속박물관은 그냥 지나치게 만들던 인제 읍내를 잠시나마 머물게 만든 공이 있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가 근처에 있다.
박물관의 투막집을 둘러보고 길을 나서면 합강정 갈림길. 드디어 본격적으로 고민(?)이 시작되는 첫번째 장소다. 여기서 계속 44번 국도를 따르면 내설악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회전해 31번 국도를 타면 산 깊은 내린천의 품에 안기게 된다. ‘어디로 갈까.’ 허나 어디로 가든지 청정한 자연이 반겨주니, 인제에선 갈림길에서의 고민조차 늘 행복하다. 첫 목적지를 내설악 백담사로 확고히 정하지 않았으면 아마 이 산천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사연 많은 합강정 이야기는 내린천을 들른 다음에 듣기로 하고, 한계령 가는 44번 국도를 따른다. 인제를 지나면 곧 원통이다. 이곳에선 흔히 놓치는 길이 있다. 예전엔 금강산 가던 길목이었고, 지금은 생태적으로 중요한 대암산 용늪, 펀치볼(Punch Bowl)로 불리는 유명한 해안분지로 접근하는 453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 인북천(麟北川)이다. 이 물줄기는 철원의 한탄강, 화천의 북한강 상류와 함께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몇 안 되는 하천이다. 인북천 수계의 서화면 지역은 1945년 당시엔 북한에 속했다. 38선 이북 땅이기 때문이다. 그 후 1951년 수복됐지만 군작전지역이라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그러다 1955년 5월 원통과 가까운 남쪽의 천도리와 서흥리에 민간인이 처음으로 들어갔고, 1958년 3월엔 서화리에도 민간인이 살게 된 것이다. 분단의 상징으로서 민통선 북쪽에 있다는 뜻을 가진 서화리의 민북(民北) 마을은 조금 더 나중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 이북의 가전·서희·심적·이포·장승리는 미수복지구로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고 겨우 세 개 마을만으로 면을 이루고 있다. 인제 최북단의 서화면은 이렇듯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축약시켜놓은 듯한 불완전한 고을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군사분계선으로 단절됐으나 하천의 물고기는 남북한 양쪽에 살고 있다. 가끔 홍수가 나면 북한 주민들의 물건이 떠내려오기도 한다는 게 주민들의 증언이다.
대동여지도에도 나오듯 인북천은 원래 서화천으로 불렸는데, 언제부턴가 ‘인제 북쪽에 있는 강’이란 뜻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분단 상황을 염두에 두면 ‘북한에서 인제로 흐르는 강’이란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언젠가는 저 인북천에 사는 물고기 ‘쉐리’(인제 사람들은 쉬리를 이렇게 발음한다)처럼 우리 한민족도 남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빌어본다.
서화는 산마을답지 않게 다방, 식당, 단란주점 등 유흥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다. 휴가나 외출 나온 군인과 군속들을 위한 시설이다. 가까운 원통이 1980년대의 ‘군인 특수’를 극복하고 ‘설악 특수’에 힘입어 흥청댈 때 이들은 여전히 ‘군인 특수’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는 10월 처음으로 열리는 ‘인제 산악전우 평화축제’라는 행사가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실을 맺기를 기원해본다.
서화에서 원통으로 되돌아와 북천을 10리쯤 거슬러 오르면 44번 국도와 46번 국도가 갈리는 한계리 삼거리가 나온다. 다시 고민이 되지만 백담사는 눈 딱 감고 좌회전이다. 그리고 조금만 달리면 남교리다. 탕수동이라 불리는 비경의 십이선녀탕계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벌써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으리라. 여기엔 탕수동뿐이 아니다. 백담계곡, 수렴동계곡, 가야동계곡을 비롯해 서북릉에 용아장성까지 정말 여기서 산(山) 욕심을 부리면 며칠이 걸릴 지 가늠이 안 된다. 일정 빡빡한 길손은 속으로 외친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남교리와 용대리 사이, 맑은 북천 물가엔 ‘만해마을’이 있다. 만해의 일생과 사상을 되짚어볼 수 있는 이 공간은 지난 여름에 지어진 뒤 내설악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내설악에 웬 만해마을?’ 하며 내설악과 만해의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하는 분은 백담사와 오세암을 생각하면 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중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시인은 1925년 이곳 백담사에서 저 유명한 불후의 명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했던 것이다. 만해는 백담사를 사랑했다. 18세 때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몸을 피해 찾아온 백담사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25세 때 다시 백담사로 돌아와 이듬해 출가했고, 그 후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백담사로 들어와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만해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이곳 백담사를 즐겨 찾았다.
만해가 머물던 백담사. 요즘은 늘상 사람들로 붐비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백담사는 내설악 깊은 산골의 자그마한 절집에 불과했다. 만해의 사연을 아는 문학도들이나 가끔 들를 뿐 많은 등산객들도 만해와 백담사의 인연을 잘 알지 못하고 그냥 스쳐갔다. 그러다 1988년 11월23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전대통령이 이곳으로 쫓겨와 25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부터 만해와 백담사의 인연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90년대 중반에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발족하고, 만해상이 만들어지고, 만해축전 등이 열리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1988년 당시 어느 날, 학생운동에 열중하던 학교 후배가 물었다.
“형, 백담사가 어디에 있어요?”
“그건 왜?”
“아니, 뉴스 못 봤어요? 전두환이 백담사로 간다는데, 어디 있는 절이예요?”
“설악산에….”
“잡으러갈 수 있겠어요?”
“글쎄….”
백두대간에서 가장 험한 공룡릉과 그 지맥인 서북릉, 용아장성 같은 바위산이 첩첩이 감싸고 있는 백담사를 어찌 찾아낼까. 게다가 마등령이나 희운각 길목을 막고, 백담계곡 초입만 틀어막으면 말마따나 1개 사단 병력으로도 침투하기 어려운 천혜의 요새가 아닌가.
하고 많은 절 중에 하필이면 백담사였는지 몰라도, 이후 몇 년간은 설악을 찾을 때 백담계곡으로 코스를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길목을 지키는 전경들 때문에 아주 번거로웠다. 그나저나 아쉬운 일은, 당시 경호 병력이던 전경들이 북천과 백담계곡의 열목어를 씨가 마를 정도로 잡아먹었다는 사실이다. 주민들은 당시 그들이 잡아먹은 열목어만 최소 수천 마리가 넘을 것이라 귀띔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백담계곡 깊은 소에서 헤엄치고 가파른 여울을 거슬러 오르는 팔뚝만한 열목어떼를 쉽게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사회나 동물사회나 폭력을 당하면 어떤 형태로든 큰 상처를 남기게 마련인가 보다.
변화는 백담사에도 닥쳤다. 백담사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이곳에 머물기 전만 해도 내설악의 쇠락한 절집이었다. 비만 오면 떠내려가는 섶다리와 자그만 채마밭, 퇴락한 당우 몇 채만 겨우 버티고 서 있던 백담사는 그 이후 참 많이도 변했다. 경내에 여러 불사가 이루어졌고, 부속암자인 오세암과 봉정암도 더 이상 초라한 제비집이 아니다. 용아장성과 어우러져 소박한 맛이 넘치던 봉정암 사리탑도 이 무렵 거창하게 단장했다.
허나 경내에 만해시비와 흉상이 건립됐고, 만해기념관도 개관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만해의 사연 깊은 절집이면서도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했다는 극락보전 앞의 ‘화엄실’ 외에는 6·25전쟁통에 만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기 때문이다. 이 화엄실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머무르기도 했다. 여기서 사람들의 호기심은 둘로 나뉜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심은 매운 정신을 발휘하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지었던 만해의 환한 빛을 말하면서도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자의 흔적에 분노한다.
그래도 단풍나무숲이 고스란히 남았으니 참 다행이다. 길은 수렴동에서 오세암으로 이어진다. 아직 푸른 단풍나무숲에 투명한 가을 햇살이 쏟아진다. 이 길은 만해가 오세암을 드나들면서 거닐던 길이요, 바로 시에서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이라 노래한 그 길인 것이다.
올해엔 예년보다 단풍 때깔이 훨씬 고울 것이라는 예보다. 남한의 가을은 설악에서 시작하고, 설악의 단풍은 대청에서 봉정암을 거쳐 수렴동계곡으로 내려온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이성과 역사를 보는 혜안을 두루 갖췄던 시인의 시심이 서려있는 듯한 이 길은 그야말로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단풍숲길이 될 것이다. ‘그때 다시 오리라.’ 아쉽게도 6·25 전쟁 중에 철저히 파괴된 오세암 어디에서도 만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만해가 도를 깨우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관음봉, 나한봉, 사자봉, 만경대로 이어지는 암봉들만이 돌로 만든 연꽃처럼 오세암을 감싸안고 있을 뿐.
백담사, 수렴동, 오세암을 다녀왔다면 이젠 한계령이 남았다. 인제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한계령(寒溪嶺) 길은 상큼하다. 차로 드나드는 고개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 왼쪽으론 설악의 서북릉이 따르고 옥녀탕, 하늘벽, 장수대, 대승폭포, 소승폭포, 상투바위, 귀때기청…. 우측으로 주걱봉 가리봉 능선도 반갑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기암괴석과 맑은 계류를 이렇듯 수월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한계령 정상에서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하고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을 흥얼거리며 양양쪽으로 500m만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필례약수 가는 길이 나온다. 행락철에 한계령 길이 막힐 때는 이 길로 해서 현리~상남~철정을 지나면 적어도 한두 시간은 충분히 벌을 수 있는 지름길. 허나 길손이 이 길을 사랑하는 까닭은 호젓하고 풍광이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원시의 충만한 생명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귀둔, 곰배골 같은 진짜 깡촌들을 지나면 드디어 내린천. 강 자락에 띄엄띄엄 자리한 강변마을들은 다행스럽게도 평화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좀더 오지마을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도로에서 갈리는 마을길로 조금만 들어가 보자. 꼭 유명한 진동계곡, 조경동계곡, 미산계곡, 개인동계곡이 아니어도 좋다. 가재 숨어있는 계류가에 물봉선, 각시취 같은 들꽃이 만발한 한국의 가을이 나그네를 반가이 맞이할 것이다.
1970~80년대에 걸어서 내린천을 들쑤시고 다녔던 한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는 내린천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20여 년 전 내린천을 따라 도보여행을 하던 중 길을 잃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리저리 헤매던 그는 겨우 한 계곡에 도착했는데, 그 마을에선 조선시대 복장을 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넉살 좋은 그는 당황하기보다 그곳에서 잘 얻어먹고 이튿날 마을을 빠져 나왔다. 그 후 얼마 뒤 다시 그 마을을 찾아 나섰지만 아무리 뒤져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다. 도보여행 중에도 늘 술을 달고 살던 그였기에 취중몽상으로 치부하려해도 그 진지한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선배가 갔던 곳이 무릉도원이었을까. 어쨌든 내린천 주변엔, 생로병사가 없는 무릉도원과는 개념이 좀 다르긴 해도 흉년도 없고, 전염병도 번지지 않고, 전쟁의 환란도 피할 수 있는 한국적인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바로 지난 8월호 ‘홍천’ 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정감록>의 피장처 ‘3둔4가리’다. 그 3둔은 달둔(達屯) 살둔(生屯) 월둔(月屯)이요, 4가리는 아침가리, 곁가리, 적가리, 연가리를 말한다. 3둔이 내린천 최상류인 홍천쪽에 있다면, 4가리는 인제쪽 방태산 북쪽 기슭에 숨겨져 있다.
‘둔’은 산속에 숨어 있는 평평한 둔덕이라는 뜻이고, ‘가리’는 겨우 밭을 갈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땅이다. 21세기인 현재 ‘둔’에선 그나마 몇몇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것과 달리 ‘가리’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1970년대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불편한 유토피아를 빠져나온 주민들은 ‘둔’보다 ‘가리’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당시 지형도를 놓고 보니 선배가 헤매던 지역은 연가리골 주변 어디쯤이었지만, 현재 여행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계곡은 적가리골이다. 수량이 풍부하고 폭포와 바위들이 어우러진 적가리골은 지형도를 보면 넓적한 그릇을 닮았다. 그래서 아주 오랜 옛날 커다란 운석이 떨어져 생긴 운석분지라는 의견도 있다. 적가리골 안에는 ‘이폭포저폭포’라는 멋진 2단 폭포가 있다. 계단폭포라고도 하지만 길손은 개똥이, 언년이 같이 순박한 ‘이폭포저폭포’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여기는 사시사철 좋다. 하지만 10월 중순에 오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환상적이다.
조경동으로 알려진 아침가리도 재앙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살던 곳이다. 역시 비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인데, 특히 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하류의 십리 구간은 참 깨끗하다. 소(沼)와 아담한 폭포가 어우러진 계곡 풍광이 수려하고, 맑은 계류가 흐르는 암반의 자연스런 미도 마음의 눈을 현혹시킨다. 또 경사도 완만하며 중간중간 아기자기한 모래톱 등이 형성되어 있고, 열목어나 산천어 등도 쉽게 볼 수 있다. 화전민의 후예들이 투막집 짓고 살던 시절엔 아담한 초등학교까지 있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단 한 채만 남아있다. 주민들은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다 대도시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런 산악지대라는 자연환경은 주민들의 삶에 여러 빛깔의 무늬를 그려 넣었다. 그들은 울창한 삼림에서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물길로 한양으로 옮겼고, 궁궐에서 쓰이는 숯을 굽기도 했으며, 피나무 같은 나무를 베어 함지박, 남박 같은 기물을 생산하기도 했다. 또 그 깊은 숲엔 온갖 약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산삼과 약초를 캐는 심마니의 발길도 잦았다. 지금도 산에서 이들의 잠자리인 모둠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또 어떤 이는 숲에서 야생의 벌을 쫓으며 석청이나 목청을 따기도 한다. 이 중에 뗏목은 산과 강을 끼고 있는 인제의 지리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민속사라 할 수 있다.
인제 지역의 삼림은 나라 안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울창했다. 게다가 조선시대엔 이 지역의 황장목이 베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장금표(黃長禁標)를 세울 정도로 이곳 나무는 질이 좋았다. 이런 고품질의 자원을 바탕으로 인제 합강뗏목은 북한강의 대표적인 뗏목으로서, 남한강의 영월뗏목 그리고 압록강뗏목, 두만강뗏목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뗏목으로 꼽혔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가네 / 우수나 경첩에 물 풀리니 합강정 뗏목이 떠내려오네’
인제읍의 합강리, 기린면의 방동리 등 물가에 사는 상노인들은 지금도 막걸리라도 한 잔 들이키면 곧잘 인제 뗏목아리랑 한 구절을 읊조린다. 가락은 거의 강원도아리랑과 흡사하다. 목숨까지 담보한 힘든 노동이었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음율은 애조(哀調)를 띤다.
합강에서 뗏목을 타면 춘천까지는 하루가 걸렸다. 그러나 여울은 만만치 않았다. 뾰족한 바위 솟은 꿩의여울, 센 물살이 뗏목 동가리를 끊어버린다는 비투리, 집채만한 물더미가 머리 위를 지나는 호랑이여울, 개처럼 물어 당기는 개여울, 뗏목을 통째로 물속으로 잡아들인다는 망태여울….
아직도 노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여울들은 인생길만큼 험난했다. 춘천서 한양까지는 7일에서 15일까지 걸리지만, 그래도 합강에서 춘천까지의 물길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만큼 순탄한 여울이었다. 어쨌거나 뗏꾼은 위험하긴 해도 벌이도 제법 좋았고, 인기도 있었다.
그러나 1943년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물길이 끊어지고, 1945년 민족분단을 맞으면서 뗏목을 나르던 뗏꾼들은 그들이 부르던 아리랑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일반의 기억에서 떠나간 노랫가락이 다시 부활한 것은 40년이 지난 1985년. 오랫동안 잊혀졌던 뗏꾼들의 노랫소리가 생존자들의 고증을 거쳐서 ‘인제뗏목아리랑’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무를 베는 일은 어땠을까. “그 일도 쉽지 않았어.” 노인들은 벌목이 오히려 뗏목일보다 부상 위험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작업은 주로 겨울철에 했다. 눈이 윤활유 작용을 해 산에서 끌어내리기 쉬었기 때문이다. 구역이 정해지면 산치성을 드린 뒤 가장 노련한 벌목꾼이 소나무를 한 그루 넘기는데, 이때 톱을 쓰지 않고 도끼로만 한다.
이렇게 거둔 나무는 일단 강가에 쌓아두었다. 그러다 날씨가 풀려 봄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면 나무를 띄웠다. 설악산, 대암산, 대우산, 향로봉 등지에서 벌채된 원목은 인북천과 북천을 흘러왔고, 가리산, 점봉산, 방태산, 개인산 같은 데서 벌채된 원목은 내린천 물줄기를 따라 흘러왔다.
이 원목들은 두 강물이 합쳐지는 합강에서 수거됐다. 낱개로 흘러 내려오는 원목을 거둬 강변 백사장에 쌓아놓고 뗏목으로 엮어 북한강 수계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비가 적당히 내리면 내린천·인북천~합강~소양강~춘천~한양 광나루~뚝섬~노량진~마포나루까지 운반했다. 운항시기는 3~10월까지였다. 합강에서 한양으로 내려가던 인제 뗏목은 양도 많고 질도 좋았기 때문에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남한강의 영월 뗏꾼들 사이에 유명했던 ‘미음’의 유명한 술집인 ‘석쟁이’가 인제 뗏꾼들 사이에서 불리던 ‘뗏목아리랑’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뗏목이 지나는 나루터마다 주막이 번창하고 술과 여자가 넘쳐 났겠지만,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미음’은 남한강 북한강의 뗏꾼들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색주가가 특히 붐볐다. 특히 석정네 주막은 들병장수가 8~9명이나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한강변 환락의 대명사인 ‘석쟁이’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한강으로 어우러지는 또 다른 모습이 아니겠는가.
합강에 아직 뗏목이 흐르던 시절, 우리는 합강 가까이에 태를 묻은 한 시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모더니스트 박인환(朴寅煥·1926-1956) 시인이다. 명동의 댄디보이.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을 한 시인의 별명이다. 시인은 술과 로맨티시즘에 젖은 보헤미안이었다. 한여름에도 정장을 하고 다녔으며, 한 푼의 돈이 없어도 늘 진한 커피를 마셨고, 멋지게 시가를 피워 물곤 했다. 그러다 30세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의 고향이 바로 이곳 합강나루 부근의 상동리였던 것이다. 합강정(合江亭) 옆엔 ‘세월이 가면’ 초고가 새겨진 시비가 서있다. 시인이 한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즉석에서 써내려갔다는 그 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 중에서
명동에서조차 박인환 시인의 흔적을 되짚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인제 땅 합강정에서 시인을 만나니 기분이 좋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잠들어있는 시인도 모르긴 몰라도 흐뭇해서 술 생각나지 않을까. 그런데 사연 많고 분위기 좋은 이 합강나루에 세워진 번지점프대는 폭력으로 다가온다. 왠지 척박한 문화의 단편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또 합강나루 옆엔 왜 그리도 높은 아파트가 있는지. 아름다운 풍광을 수도 없이 품고 있는 고을답게 여유를 가졌으면 동강의 아우라지 못지않은 정감 있는 합강나루로 가꿀 수 있었을 텐데….
합강을 떠나면서, 문단의 평가가 심하게 엇갈리는 시인을 생각한다. 전쟁 전엔 현실주의적이었고, 미래에 대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시인은 전쟁을 겪으면서 허무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시인은 지나친 예술지상주의의 모순에 빠지면서 자신의 목숨도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유년시절에 집 앞의 강물을 따라 흘러가던 그 뗏목들처럼.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 중에서
어쩌면 그 때 벌써 시인의 머릿속에는 ‘목마와 숙녀’의 시 구절이 자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시(詩) 맛 제법 당기는 계절이 벌써 다가왔다.
/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