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있기에 생명체는 존재한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당연히 우리 인간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다. 태양을 기원의 대상으로 삼아 소망을 빌기도 하고, 어려움에 빠졌을 땐 날마다 어김없이 뜨는 태양을 보며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래서 일출이 아름다운 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한반도 작은 땅덩어리 어딘들 태양이 솟지 않으랴. 하지만 사람들은 일출이라 하면 대부분 동해 바다를 떠올린다. 동쪽 끝으로 달려가 단 1분이라도 먼저 태양을 보고 싶다는 조급함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바다의 태깔을 시시각각 바꾸는 감동적인 연출을 감상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른바 오메가(Ω) 현상을 목격하고픈 소망도 있을 것이다.
강원도 동해안의 강릉과 삼척 사이에 자리한 동해(東海)라는 고을은 기실 일출 덕에 제법 유명해졌다. 산기슭에 있는 두타산 무릉계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명색이 ‘동해’라는 완장을 차고서 널따란 망상 해수욕장 하나만 가지고 어깨를 으쓱거리기엔 아무래도 쑥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20여 년 전 석회석 단 하나만 믿고 시(市)로 독립할 때 해안선 가장 남쪽에 있는 추암을 삼척에게 넘겨주지 않은 것은 정말로 천행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추암이 없었다면 요즘 동해가 자랑하는 ‘해오름의 고장’이라는 목소리도 공허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이런 동해는 어촌인 묵호읍과 농촌인 북평읍을 합쳐서 만든 고을이다. 벌써 사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도 동해란 지명은 귀에 설다. 승격 초기만 해도 주민들은 자신을 동해 사람이 아니라 북평 사람이고 묵호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사이 세월이 흘렀을까. 어느덧 주민들은 현실을 서서히 받아들이면서 자부심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해바다 전체를 대표하는 듯한 ‘동해’라는 지명이 제법 괜찮기도 했을 것이다.
동해시 해안선의 북단은 망상(望祥)이다. 영동고속도로 망상 나들목에서 곧바로 연결되니 교통이 아주 편리할 뿐만 아니라 고운 모래가 깔린 해안은 넓고도 길다. 그래서 저 유명한 강릉의 경포 해수욕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인기도 높다.
망상의 옛 이름은 마들, 망성이, 마루뜨루. 한자로는 마상(馬上), 마평(馬坪), 마상평(馬上坪)이라고 했다. 군사들이 말을 기르고 말달리기 훈련을 하던 널따란 들판이란 뜻이라 한다. 이 지명은 마상천(馬上川)이라는 냇가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자로는 전혀 연관지을 수 없는 지금의 망상(望祥)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관동별곡’을 지어 영동지방과 친숙한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연애담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강은 관동지방을 순유하던 중 삼척에 들렀을 때 수청들던 젊고 아리따운 기생 소복(小福)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송강은 나중에 다시 삼척에 왔을 때 소복을 찾았다. 그런데 송강은 그녀가 강릉의 마들(현재의 망상동)에 사는 유생 최곤축에게 시집갔다는 말을 듣고 장탄식을 하였다. 드디어 강릉을 지날 때 송강은 마들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상서로움(詳)을 바라고(望)’ 찾아온 마을에서 지난날의 추억을 떠나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지척선아일망상(咫尺仙娥一望祥)
벽운미해신망망(碧雲迷海信茫茫)
여금회답진주로(如今悔踏眞珠路)
착사행인야단장(錯使行人也斷腸)
지척에 어여쁜 여인을 바라보니
구름 덮인 저 바다 믿기가 망연하구나
이제 보니 진주(삼척의 별칭)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어이하여 나그네 애간장을 태우느뇨
송강이 소복과 꿈꾸던 망상(望祥) 같은 사랑을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모닥불로 날아드는 부나비의 망상(妄想) 같은 애욕에 들떠있는 것일까. 이 드넓은 여름 바다엔 파돗소리 따라 들리는 남녀의 웃음소리 요란하다. 그래서일까. 여름바다는 카메라 렌즈를 대기 어려울 정도로 뜨겁다.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파를 헤집고 어렵사리 망상을 빠져나오니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해안도로를 따라 남으로 간다. 망상 이후의 해수욕장들은 대개 마을 단위의 아담한 규모다. 제법 너르다 싶은 해수욕장도 망상에 고객을 모두 빼앗겨 적막감만 감돌 정도였다. 노봉이 그랬고, 대진이 그랬다. 어달은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아 보였다. 하평·가세·감추에 딸린 해수욕장은 규모는 보잘 것 없으나 도보로 기찻길을 건너서 찾아가는 맛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동해를 가장 동해답게 해주는 항구, 묵호항에서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동해 사람들에게 있어서 묵호항은 고향의 대명사다. 산제당길을 통해 올라간 언덕 위의 등대에서 내려다본 항구는 참으로 정겨웠다.
묵호의 옛 이름은 ‘새나루’다. 까마귀 같은 까만 새가 많이 모인다 하여 한자로는 오이진(烏耳津)이라 했는데, 뒤에 까마귀가 흉조라 해서 ‘까마귀 오(烏)’ 자를 ‘오동나무 오(梧)’ 자로 바꾸어 썼다.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조선 말기인 순조 때다. 당시 해안에 큰 해일이 일어나 많은 가옥이 떠내려가고 배까지 파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피해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가 “이곳은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으니 먹 묵(墨) 자를 써 묵호(墨湖)라고 하는 게 좋을 듯 하다”고 하면서 묵호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주민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토록 푸른 바다를 두고 검다 하다니?’ 그러나 실제로 20세기 중반에 도계, 태백 등지의 석탄을 옮겨와 배로 실어낼 때는 석탄가루가 바닷물을 늘 검게 물들여 고을 노인들은 묵호라는 지명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묵호항은 과거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한적한 포구가 되었다.
요즘은 오징어가 한창이다. 항구 한쪽엔 수천 촉의 집어등을 매단 오징어배들이 도열해 있다. 출항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철이 되면 묵호항 앞바다는 화려한 꽃밭으로 변한다. 꽃밭은 밤새도록 스러지지 않는다. 이윽고 밤샘 조업을 마친 배들이 하나둘 뱃고동을 울리며 포구로 돌아오는 새벽 항구는 생명력이 넘친다. 고단한 어부가 실어내는 바닷고기는 싱싱하다. 경매에 열을 올리는 상인들의 손길과 눈길도 분주하다.
올해에는 오징어가 몇 년만의 풍년이라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 오징어 20마리가 평일에는 10,000원, 주말에는 20,000원 정도 한다. 일행 두엇이 10,000원어치만 사면 회 떠서 소주 안주를 하고, 회덮밥을 해먹고, 이튿날 해장국 삼아 오징어국을 끓여도 남을 정도의 양이다. 관광객들은 “와, 싸다!”를 외치지만 선장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그래도 항구엔 싱싱한 활력이 넘친다.
묵호항을 벗어나면 해안도로는 폐항처럼 스산한 동해항으로 이어진다. 몇 년 전 금강산으로 떠나는 유람선이 뜨면서 항구엔 인파가 넘쳐났고, 횟집이 줄지어 들어서는 등 동해의 경기가 반짝 활성화하기는 했으나 속초항에 유람선 출항의 자리를 내준 지금은 썰렁하다 못해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묵호항은 그나마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바닷고기 같은데, 동해항은 파도에 떠밀려온 해파리처럼 무기력하기만 하다. 한때 북방교역의 중심지로 도약하려던 돌고래 같은 생동감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동해항을 지나 전천(箭川)에 걸린 북평교를 건넌다. 동해항 지으면서 경치가 많이 상한 만경대와 호해정을 들렀다가 일출 명소인 추암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북평공단을 통과하는 이 길은 가끔 헷갈린다. 몇 년 전 겨울에도 길을 잃고 서너 바퀴를 돌다가 겨우 빠져나온 적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공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굴뚝 서있는 공장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1993년에 조성된 이 북평공단은 저렴한 공장용지와 동해항을 끼고 있는 국제물류 시스템 구비에도 불구하고 전국 산업단지 가운데 30% 내외의 낮은 분양률을 기록하고 있다. 낙후된 입지여건 때문인데, 국가산업단지 중 분양률이 최하위라는 오명도 얻었다. 다행히 올해 들어서 희망찬 소식들이 들려왔다. 세계 최고의 실외 조명기구 제조회사인 벨기에의 슈레더사가 입주한다는 것이다. 또 인천의 목재업계도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원목 물류비를 줄이자며 동해로 대거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지난해 4차선으로 넓혀 개통된 동해고속도로 덕분임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드디어 추암(湫岩)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촛대바위, 칼바위, 형제바위 같은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동해 추암은 애국가 첫 소절의 일출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바다에서 뜨는 일출 감상을 위해 동해안을 찾는다면 단연 추암이 0순위에 들 정도로 그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빼어나다.
태평양 한가운데 망망대해에서 떠오르는 태양도 장엄하겠지만, 육지에서 바다 일출을 감상한다면 주변의 무대 장치가 그럴 듯해야 한다. 기묘한 형상의 갯바위와 활처럼 굽은 해안선, 그리고 무엇보다 일출 감상하기 좋은 조망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추암은 이런 요건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물론 가까운 강릉의 경포대에 비하면 문화·역사적인 무게감이 적은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쨌든 추암은 새해 첫날은 물론이고 사시사철 일출을 감상하려는 사람들과 사진작가들로 붐빈다. 추암 일출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포인트는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뾰족한 추암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언덕이다. 추암은 굳이 일출이 아니어도 언덕 뒤쪽으로 돌아가는 해변에 석회석으로 된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어 제법 볼만하다. 강원도 관찰사로 왔던 한명회(1415-1487)가 관동팔경을 돌다가 이곳 경치에 반해 능파대(凌波臺)라는 이름을 따로 지었다는 내력이 말해 주듯이 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흡사 사람이 눕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한 것 같고, 또는 호랑이가 꿇어앉는 것 같기도 하고,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이 천태만상을 이루었으며, 소나무가 우거져서 그 사이로 비치니 참으로 조물주의 작품이라 하겠다. 강릉 경포대와 통천 총석정과 그 경치가 난형난제이며 기이한 점은 이곳이 더 좋다.’
그 앞에 자리한 해암정(海岩亭)이라는 정자는 고려 공민왕 원년(1352년)에 통천군수를 지낸 심동로(沈東老)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삼척 심씨의 시조인 그는 해암정과 삼척 죽서루를 오가며 시를 짓던 가객이었다. 뒤쪽의 철조망이 눈에 거슬리지만, 뒷문을 활짝 열면 기암괴석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예전엔 문짝도 떨어져서 폐가처럼 스산했었는데, 요즘엔 뜰에 잔디를 깔아놓은 덕에 깔끔해 보인다.
추암의 밤바다. 아담한 백사장을 맨발로 발이 시리도록 걷는다. 두 손 꼭 잡은 연인들은 “겨울연가의 준상과 유진이 처음으로 걸었던 바다고, 마지막으로 유진을 떠나보내면서 눈물을 쏟아 냈던 바다”라는 기억을 되살려낸다. 결 고운 모래밭에 발자국을 내면서 허연 거품을 물고 쉼 없이 달려드는 파도를 희롱하는 맛이 제법이다.
해안 덕장에 걸려있는 오징어에선 바닷가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사실 촛대바위 전체를 조망하기엔 추암 해수욕장과 바싹 붙어있는 증산 마을이 최고다. 여기에 서면 활처럼 휘어진 백사장 끝에 솟은 추암과 형제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지고 저녁 어스름이 되자 먼 바다에 불빛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밤바다가 먹물을 닮아갈수록 불빛은 밝아진다. 차안에 들어앉아 꽃밭 같은 불빛을 바라보다가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길손은 깨운 것은 파도였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도 들린다. 이제 곧 해가 뜰 것이다. 백사장에서 얼마나 서성거렸을까. 까맣던 바다가 검푸른 빛으로 변하더니 점점 푸른 기운이 많아지면서 시나브로 밝아온다. 그와 동시에 밤바다를 밝혔던 집어등 불빛은 서서히 세력을 잃어갔다.
태양이 뜨기 직전에 바다와 하늘 전체에 드리워진 붉은 장막은 태양이 자신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선물이다. 만약 해를 가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히 옅은 해무라면 일출의 최고 경관이라는 오메가 현상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오메가 현상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바닷가에 사는 어민들도 1년에 겨우 두어 번밖에 볼 수 없다는 희귀한 현상 아닌가.
어쨌든 장마 뒤끝인 탓에 구름이 많아서 수평선에서 직접 솟는 태양은 볼 수 없었으나 구름 위로 솟는 태양만이라도 보았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넓은 망상 해수욕장에서 노닐고 추암 일출까지 보았으니 이젠 산으로 들 때가 되었다. 동해 주민들이 묵호항 다음으로 아끼는 북평장에 들러 국밥 한 그릇 말아먹고 전천(箭川)을 거슬러 오른다.
강릉에 남대천이 있고 삼척에 오십천이 있듯이 동해에는 전천이 있다. 모두 그 고을을 대표할 만한 젖줄이다. 백두대간 분수령인 두타산(1,353m)과 청옥산(1,403m)에서 흘러내린 물이 동해로 흐르는 전천을 거슬러오르면 거기에 무릉계(武陵溪)가 있다. 맑은 계류를 따라 펼쳐진 널따란 반석과 조물주의 장난인양 기이한 모양으로 우뚝 선 바위들, 그리고 쌍폭과 용추폭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폭포들….
그러나, 무릉계 찾아가는 길목에서 방문객을 반기는 것은 복숭아나무도 아니요 솔밭도 아니다. 언제나 기대감과는 이질적으로 드러나 있는 벨트 컨베이어(belt conveyor)다. 가슴이 탁 막혀 둘러보면 커다란 시멘트공장이요, 온통 채석장이다.
무릉계 가는 길목의 삼화동 주변이 우리나라 최대 석회석 매장지요, 생산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하더라도,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왠지 사이보그가 지배하는 황량한 미래도시를 보는 것만 같다. 다행히 그 너머로 보이는 두타·청옥의 백두대간 연봉은 언제나 포근하게 감싸주긴 해도, 그 품안에 무릉도원이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가보면 무릉계는 늘 거기에 있었다. 석회석 공장을 지나 짙은 숲으로 둘러싸인 반석 위로 흐르는 맑은 계류를 보면 ‘드디어 무릉계가 가까워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전 사이보그 도시는 어느덧 까맣게 잊게 된다. 참으로 간사한 게 인간의 마음이다. 석회석공장도 들어서지 않았고, 진입로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던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이곳은 진짜로 무릉도원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金孝元·1542-1590)은 무릉계의 매력에 푹 빠졌던 인물이다. 그는 7일 동안 무릉계 일대를 다녀와서 남긴 ‘두타산일기’에서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을 두타산으로 꼽고 있다.
삼척 출신인 최인희(1926-1958) 시인의 ‘낙조(落照)’라는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와 한일합방으로 향교가 폐교되자 금란계원 유생들이 일제에 항거한 모임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금란정(金蘭亭)을 지나 무릉반석으로 내려선다.
1,000여 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암반의 크기는 무려 6,600㎡. 그 반석 위로 흐르는 물줄기는 언제나 맑다. 조선시대 삼척에서 강릉을 오가거나 백두대간의 백복령을 넘었던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흥에 겨워 시를 짓고 이름 석자를 새기곤 했다.
조선 4대 명필 중에 꼽히는 봉래 양사언은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台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이를 풀어보면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골짝’이란 뜻이다. 한눈에도 과연 틀림없는 명필이다. 반석에 새겨진 양사언 글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마모가 심해지자 1995년 이를 본뜬 석각을 금란정 옆에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무릉반석에 좋고 아름다운 사연만 새겨진 게 아니다. 그 이름들 속에는 조선시대 이 산에 숨어든 사람들을 잡기 위해 왔던 토포사(포도대장)들이 새겨 놓은 이름들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암울하던 군사정권 시대인 1981년, 무릉계에 들른 김지하 시인은 이 아름다운 무릉반석에서 귀곡성을 들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곳에서 죽어간 수천 목숨의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986년에 구술로서 펴낸 시집 <검은 산 하얀 방>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화사 너럭바위 입구에서부터 내 귀를 때리며 심장을 조이며 내 뇌수 전체를 뒤흔드는 총 소리, 포탄 소리, 비행기 폭음 소리, 아우성 아우성 소리, 그 중에도 견딜 수 없었던 그 어버이를 부르는 아이들 울음소리, 그리고 이상하게 떨리던 여인들의 귀곡성, 귀곡성, 귀곡성의 끝없는 환청. 머리 뒤를 잡아끄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 다리를 잡아당기는 물과 바위와 잡초들의 기괴한 엉킴, 숯처럼, 마치 썩어 가는 시체처럼 거무칙칙한 절벽에서 빛나는 음산한 햇빛, 검은 갈가마귀들의 불길한 울부짖음,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는 불에 타 죽은 시커먼 고목들, 나는 질려 버렸다.’
결국 시인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다시피 파쏘, 비린내골, 파소굽이라는 원한 서린 지명들이 떠도는 이 골짜기를 벗어났다. 당시 시인이 남긴 시 한 수를 들어보자.
‘…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 / 오십 개의 우물터가 있었다고 하더라 / 오천 명이 한 날 한 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 / 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 / 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김지하 시인의 ‘너럭바위 1’ 중에서)
세상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듯, 이토록 맑은 무릉계곡의 아름다운 풍경화 속에 기쁜 추억과 악몽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릉반석에서 다리를 하나 건너면 삼화사(三和寺)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연대라고 한 것이 이 절집의 시작이다. 이후 고려 태조 원년에 중창하면서 ‘삼국을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 하여 삼화사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그러나 삼화(三和)는 불교에서 이르는 근(根)·경(境)·식(識) 세 가지의 화합을 일컫는 말이니 여기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고려때는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가 머물면서 삼화사 불경을 빌려 탐독하기도 했다.
1577년 봄에 들렀던 김효원은 삼화사 모습을 ‘두타산일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적고 있다. ‘북쪽으로 비스듬히 돌아 삼화사 옛터를 찾으니 다만 돌담이 둘러쳐진 곳에 풀이 자라있고, 철불 두상이 허물어진 집안에 앉아 있었는데, 철불 하나는 오른쪽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
당시 그가 보았을 철불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상반신만 남아서 자그마한 당우에 모셔져 있었다. 이 철불은 삼화사 창건설화에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 불상이라고 전해왔다. 주민들은 마을에 돌림병이 돌거나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효험이 있다는 이 철불에 삼배를 올렸다. 주민들은 그렇게 철불을 약사불로 굳게 믿었다.
그러다 1977년 삼화사 일대가 쌍용시멘트 채석장으로 수용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고, 90년대에 들어서 사세를 확장하면서 철불을 모시기 위한 약사전을 짓고 옮기려다 놀랄 만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철불의 등에서 발견된 146자의 명문(銘文)에 따르면 철불은 약사불이 아니라 본존불 중 하나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이었던 것이다. 이 철불은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97년에 복원된 뒤 지금은 적광전에 주존불로 모셔졌고, 보물(제1292호)로도 지정되었다.
석회석으로 쌓은 삼층석탑을 우러러보면 산길은 삼화사를 벗어나 두타와 청옥 사이의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두타산은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따라 뻗어 내려오다가 태백산에 이르기 전에 동해를 향해 크게 한 번 용틀임하며 솟구친 산으로, 청옥산과의 사이에 무릉계를 품고 있는 산이다. 두 산의 형상은 매우 대조적이다. 두타는 날렵하고, 청옥은 완만하고 묵직하다.
두타(頭陀)란 머리를 흔들어 번뇌를 떨어뜨리고 수행 정진한다는 뜻이고, 청옥(靑玉)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의 일곱 가지 보석 중 하나다. 모두 불교에서 나온 지명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두타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현재는 삼화사와 관음암, 천은사만 남아 있지만,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에는 중대사, 상원사, 대승암, 성로암, 내화암 등 1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이 산속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산의 힘을 모아 빚어낸 물줄기를 따르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하다. 속세를 등지고 정진의 길을 떠난다는 두타행(頭陀行)과 딱 어울리는 산길이다. 속세를 벗어난 발길은 어느덧 학소대로 이어진다. 왼쪽은 벼랑이고 오른쪽은 거대한 암벽이 골짜기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바위벼랑엔 4단 폭포가 그림처럼 걸려 있고, 송림이 그 주변을 감싸듯 우거져 있으니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다.
학소대를 지나면 산길 왼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이 깊은 산중의 적막을 깨뜨린다. 두 개의 골짜기에서 두 줄기 폭포수가 쏟아지면서 음양의 섭리처럼 하나로 만나는 쌍폭포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과 거무튀튀한 암벽에 새하얀 모시를 걸어놓은 듯하다. 감탄하긴 아직 이르다.
쌍폭포 바로 위쪽엔 무릉계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용추폭포가 손짓한다. 청옥산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가 삼단으로 하얗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용추폭포는 무릉계곡 미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각 단마다 담(潭)이 형성되어 있는데, 맨 아래의 하담은 깊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깊다. 폭포 아래 하단에선 삼단 폭포의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가파른 철계단을 타고 3분쯤 올라서면 그제서야 길게 쏟아지는 삼단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삼척부사로 왔던 유한전이 폭포 오른쪽 하단 암벽에 ‘龍湫’라는 글을 새기고 제사를 올린 뒤부터 용추폭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릉계곡을 들어선 사람은 반드시 들렀다 가는 곳이고, 쌍폭과 용추폭포를 보지 않으면 비록 무릉반석에서 물놀이를 했다 해도 무릉계곡은 다녀온 게 아닌 셈이 된다. 그리고 등산이 목적이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포수 아래에서 발을 담그고 있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무릉계의 비경을 둘러보고 용추를 벗어나는 길. 누군가 자꾸 목덜미를 붙잡는 것만 같다. 돌아보면 초록의 향긋한 숲내음만 충만하다. 아니다. 그 향기에 섞여있는 화약 냄새, 피냄새…. 그래! 무릉반석도 좋고, 쌍폭과 용추폭포도 장관이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두타산에서 목숨을 버린 영혼들을 위로하지 않고 어찌 두타행이라 할 수 있겠는가. 길손의 발길은 어느새 두타산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 5,000명이 백두대간을 넘어 강릉을 거쳐 이 지방으로 쳐들어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두타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의병들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남북 15리 절벽에 도열시켜 적에게 위세를 보이자 왜군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백복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이들은 두타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마련하던 중 지금의 삼화동 소(沼)에서 빨래하던 노파를 위협하여 두타산 오르는 뒷길을 알아냈다. 왜군은 이기령을 넘어 우회 침공하였는데, 이것은 의병들의 치밀한 계략이었고, 왜군들은 대부분인 4,500명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병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아 의병과 피란민을 합쳐 모두 5,000여 명이 전사했다.
피아간 1만 명 가까운 인원이 사망하면서 당시 산성 아래 계곡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피내골은 그렇게 해서 생긴 이름이다. 피내골 핏물은 삼화동 소까지 흘러내렸으니 이 소를 피소(파소) 또는 피굽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이때 의병들이 쏜 화살이 수없이 떠내려온 냇가는 살내(箭川)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여기에 와서야 알았다. 두타의 무릉계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저 자연 풍광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릉계의 아름다움은 풍전등화 같은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선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먹구름 벗겨지는 두타의 미소가 밝다.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