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승순위 요동친다

한국 바둑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치열한 다승(多勝) 경쟁이 1년 내내 계속되고 있다. 숨가쁜 레이스 속에서 자고 일어나면 선두권 순위가 요동친다. 금년 일정을 3분의 2 가량 소화하는 동안 선두가 바뀐 것만 여덟 번이고, 공동 1위는 무려 12번이나 나왔다. 현 시점에서 누가 올 시즌 다승왕에 오를지를 점치기란 마치 복잡한 퍼즐 풀기처럼 난해하다. 한국기원 집계에 따르면 5일 현재 다승 선두권 랭킹엔 7~8명의 기사가 간발의 차로 몰려 있다. 선두 최철한은 45승(21패)으로 박영훈(43승 22패), 박정상(43승 16패), 조한승(43승 18패)에게 단 2승을 앞서 있을 뿐이다.
그 뒤를 42승의 이영구(17패)가 추격하고 있다. 강동윤(41승 12패)까지 무려 6명이 40승 고지를 넘었다. 39승을 기록 중인 이세돌(14패) 원성진(15패)도 여차하면 선두권으로 진입할 기세다.
올해 다승 랭킹 추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얼마나 팽팽한 레이스가 거듭돼 왔는지 실감난다. 시즌 초반은 박영훈의 페이스. 2월 5일 10승, 4월 4일 20승 고지를 맨 먼저 밟으며 질주하는 듯했으나 5월 22일 박정상이 첫 1위에 나섰다. 이후 6월 23일까지 두 기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처절한 접전을 전개한다. 6월 30일에 접어들자 이번엔 원성진이 치고 나와 박정상과 공동 선두(35승)를 이뤘다.

7월에서 8월 초순까지 선두는 박정상. 여기에 이번엔 이영구가 스퍼트하면서 8월 19일 3명이 공동 1위가 됐다. 그 이튿날 이영구가 42승으로 단독 선두에 나섰고, 또 다음 날엔 최철한·이영구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최철한이 8월 24일 43승으로 올해 처음 단독 1위에 나서자 30일 조한승이 다시 따라잡는다. 최철한이 9월 1일 십단전과 4일 바둑리그서 2승을 보태 단독 선두에 나가 있는 것이 현재까지의 전말.
다승(多勝)은 프로기사의 활동상을 말해주는 지표다. 예선과 본선을 많이 올라야 도전무대도 열리며, 그 과정에서 판 수가 늘어나 승수를 축적할 수 있다. 야구 투수 성적을 평가할 때 승률보다 다승을 우선시하는 것과 흡사하다. 꾸준하고 굴곡 없는 페이스를 요구하는 점에선 마라톤을 꼭 닮았다.
하지만 4관왕 이창호(33승·10위)의 예에서 보듯 보유 타이틀 수가 워낙 많다 보면 대전 기회 부족으로 승수가 뒤처지기도 한다. 다승이 절대적 성적표는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역대 연간 최다승 기록은 이창호가 1990년에 작성한 90승. 상향평준화 추세 속에 상위권 저변이 크게 두터워진 오늘날엔 좀체 경신되기 어려운 ‘마의 기록’이다. 지난해 최다승은 61승에서 결정됐으며 최철한이 차지했다.
2위 이세돌은 53승. 최철한은 2003년에도 65승으로 2위 박영훈(53승)을 여유 있게 제압, 다승왕에 오른 바 있어 올해 다승 3연패(連覇) 가시권에 들어섰다.
하지만 사방은 안개에 덮여 있고 골인 지점은 아직도 멀다. 100미터 경주처럼 접근전이 펼쳐지고 있는 올해 레이스에서 스타디움에 가장 먼저 얼굴을 드러낼 ‘마라토너‘는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