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이 배우면 더 좋죠

영화를 선택할 때 가장 안전한 기준은 역시 배우. 그러나 이름이나 얼굴만 보고 골랐다간 눈만 즐겁지 영 내용이 부실한 경우도 많다.
올 추석 연휴엔 휘황찬란한 스타는 아니어도 개성 넘치는 배우와 그들의 맛깔스러운 작품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모두가 좋아하는 스타 말고, ‘나만의 별’을 발굴하는 데 도움이 될 비디오-DVD 10편. 1. 조승우 + ‘후아유’ 예고편 ‘후아유’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생활과 고민을 밀착된 호흡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청춘보고서. 게임 개발자 형태 역을 맡은 조승우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이몽룡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청춘스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2년 월드컵에 ‘발맞춰’ 개봉하는 바람에 그 응원의 뜨거운 열기가 이 영화에는 고스란히 찬서리가 됐다. 지금은 ‘백만불짜리 다리’ 초원이(‘말아톤’)로 백만불짜리 연기자임을 인정받았지만 이 영화가 성공했더라면 조승우는 일찌감치 백만인의 청춘스타가 됐을지도 모를 일. 극중에서 직접 부르는 ‘형태의 라이브 메들리’는 뮤지컬에서도 주가를 올리고 있는 조승우의 노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 존 쿠색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존 쿠색은 외모와 연기력을 함께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할리우드와 쉽게 영합하지 않는 비주류 감성의 소유자. 그의 개성 넘치는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각본과 제작에도 참여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이다. 30대의 음반가게 주인 롭은 애인이 결별을 선언하자 옛 애인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차이는 이유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좋아하는 노래를 뽑아 테이프를 만들고, 헤어진 여자 톱5 등 리스트 작성하기에 골몰하는 철없는 애어른 롭은 쿠색의 앳된 얼굴에 깃들어 있는 소년 이미지와 완벽하게 포개진다. 그 밖에 매니어적 취향을 뽐내는 음악광들의 갖가지 행태도 흥미로운 볼거리.

3. 다니엘 오테이유 + ‘금지된 사랑’
프랑스의 코 큰 국민배우로 제라르 드파르디유만 떠올린다면 매우 섭섭해 할 배우가 있다. 드파르디유만큼 코가 크고, 또 그 못지않게 국민배우인 다니엘 오테이유다. 우울한 역할에 강점을 가진 오테이유의 매력이 십분 발휘된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클로드 소테 감독의 ‘금지된 사랑’(1992). 악기제조가인 두 친구와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삼각 사랑을 다룬 이 작품에서 세상에 유리벽을 쌓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스테판을 연기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라벨의 소나타에 묻어나는 쓸쓸한 정취도 일품. ‘영화는 모름지기 분위기’라고 생각한다면 중고비디오가게를 뒤져서라도 꼭 봐야 할 수작이다.

4. 스칼렛 요한슨 +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예고편
혈관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상아빛 피부, 도,레,미 이상으로는 결코 올라갈 것 같지 않은 저음의 목소리, 입보다 훨씬 많은 말을 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 이 묘한 분위기의 신인 스칼렛 요한슨은 확실히 ‘아일랜드’ 같은 블럭버스터보다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처럼 섬세한 영화에 훨씬 잘 어울린다. 화가 베르메르의 걸작 ‘터번을 두른 소녀’의 모델을 두고 화가와 하녀의 은밀한 교감의 드라마로 풀어낸 이 작품은 장면 장면을 한 폭의 그림인 양 정교하게 마름질한 고혹적 영상이 황홀하다.

5.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젊은 시절 체 게바라의 남미대륙 횡단여행을 담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라틴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로드무비이자, 새로운 자아에 눈뜨는 한 젊은이의 성장담. 활력과 열정에 찬 23살의 의학도 에르네스토가 점차 혁명의 씨앗을 마음에 품게 되는 과정이 수려한 남미의 풍광과 함께 차분히 그려진다. 체 게바라 역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라틴의 떠오르는 스타. 이상주의적 혁명가의 젊은 날을 연기하기에 타는 듯한 눈빛을 지닌 멕시코 출신의 이 배우만큼 적임자도 없는 듯하다. ‘나쁜 교육’, ‘이투마마’, ‘아모레스 페로스’ 등 치명적 매력을 강렬하게 뿜어내는 그의 전작들도 필견!

6. 제프 브리지스 + ‘위대한 레보스키’
사이코 범죄자에서부터 자상한 아버지까지 연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제프 브리지스이지만(그가 1976년작 ‘킹콩’의 주인공이었단 걸 기억하시는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루저, 즉 인생낙오자 역할이다. 데까당한 매력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사랑의 행로’의 삼류 피아니스트 연기도 좋지만, 세상일에 초탈한 듯 볼링이나 즐기는 ‘위대한 레보스키’의 게으른 백수 역할도 딱이다. 이 작품은 레보스키와 그의 친구들이 납치사건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극으로, 희망과 목표가 사라진 90년대 미국 사회의 일면을 희화화한 코언 형제의 풍자적 시선이 돋보인다.

7. 미셸 파이퍼 + ‘불타는 태양’
‘나이를 잊고 사는 스타’, ‘할리우드의 최고 금발 스타’ 등등 각종 설문 상위권에 늘 랭크되지만 좀처럼 1등은 못하는 스타, 심지어 오스카상도 비껴간 배우, 미셸 파이퍼는 그렇게 늘 최정상의 바로 아랫자리에 머물렀지만 변함없는 모습으로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불타는 태양’은 그녀의 우아하고 지적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했던 80년대 후반 작품. 우정 범죄 로맨스가 칵테일처럼(원제도 Tequila Sunrise!) 어우러진 가벼운 영화지만, 할리우드에서 최고 대우를 받던 작가 로버트 타우니의 각본 및 연출 솜씨가 깔끔하다. 순정파 로맨틱 가이로 분한 멜 깁슨의 젊은 시절 모습도 반갑다.

8.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 ‘온리 유’
‘온리 유’는 ‘사랑은 운명’이라고 믿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가 엮어내는 깜찍한 로맨틱코미디. 결혼을 앞둔 페이스는 어릴 때 장래 남편감으로 점지된 ‘데이먼 브래들리’라는 이름의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고는 다짜고짜 그를 찾아 이탈리아로 떠난다. 결말은 물론 운명은 스스로로 만드는 것이라는 지당하신 말씀으로 귀결된다. 로마에서 데이먼을 사칭하며 페이스의 사랑을 얻는 피터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특유의 빠른 말투와 귀여운 제스처로 이 달콤한 영화의 당도를 한층 더 높인다. 한동안의 슬럼프를 딛고 일어선 다재다능한 실력파로, 최근엔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에도 출연했다.

9. 다이앤 레인 + ‘언페이스풀’
다이앤 레인은 386세대에게 ‘추억의 갈피’ 같은 배우이다. 팬들은 ‘스크린’이나 ‘로드쇼’에 나온 그녀의 사진을 모으면서 이 청순한 아이돌 스타에 열광했었다. 오랫동안 이렇다 할 작품이 없던 그녀는 젊은 남자의 유혹 앞에서 몸과 마음이 돌풍에 휩싸이게 되는 ‘위기의 주부’로 열연한 ‘언페이스풀’(2002)로 올드팬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예전의 청순미에 성숙한 여성미까지 더해진 다이앤 레인의 매혹적인 자태는 ‘나인 하프 위크’의 감독 에이드리언 라인의 관능적인 영상 속에서 한층 더 빛난다.

10. 공효진 + ‘품행제로’
여자로선 좀 수위가 높다 싶을 정도의 욕을 해도 하나도 상스럽게 들리지 않고, 시종일관 선머슴처럼 굴다가 문득 여린 감성을 드러내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는 그녀. 공효진은 그렇게 자신만의 개성을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흔치 않은 여배우이다. 그녀의 불량한 매력과 가장 궁합이 잘 맞았던 작품은 ‘품행제로’. 80년대 10대들의 삶을 경쾌하게 그린 이 영화에서 주인공 ‘쭝’필을 좋아하는 여고 ‘짱’ 나영 역을 맡았다. 세밀하게 복원된 80년대 학원 문화의 디테일들 속에 각자의 추억을 대입시켜보는 것도 이 영화가 제공하는 즐거움 중 하나. (오영재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