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합작 무협' 다시 뜬다

“이미 내 몸에는 노예 표식이 있다.”(김소연) “우리 가족은 백두산에서 왔다. 그리고 집 없는 개처럼 살았다. 너처럼. 그렇다고 영혼까지 노예일 순 없다. 이름을 잊지 마라. 그리고 네 고향도.”(견자단)29일 개봉하는 홍콩 쉬커(徐克) 감독의 ‘칠검(七劍)’의 한 장면. 홍콩배우 견자단과 한국배우 김소연이 조선인으로 출연하는 ‘칠검’은 약 30% 정도가 한국어 대사로 구성돼 있다.
2005년 아시아 영화산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키워드는 ‘합작무협’이다. 한국과 중화권 배우가 함께 출연한 무협영화는 올해 국내 개봉할 작품만도 ‘칠검’ ‘무극’ ‘신화’ 등 세 편. 특히 ‘칠검’은 한국 보람영화사의 이주익 대표가 홍콩·중국과 제작비 3분의 1(50억원)씩을 분담하고 기획단계부터 참여한 적극적 의미의 합작영화다. 중국 양우생(梁羽生)의 무협소설 ‘칠검하천산(七劍下天山)’을 원작으로 여명·양채니 등의 홍콩 배우가 출연하고, 일본의 가와이 겐지가 음악을 맡은 다국적 프로젝트다.

12월 개봉 예정인 또 다른 합작영화 ‘무극(無極)’에선 아예 장동건·장바이쯔(張柏芝), 사나다 히로유키 등 한·중·일 3국 스타가 주연이다. 감독은 ‘패왕별희’로 유명한 중국의 첸 카이거(陳凱歌). 상하이 필름 등 중국 제작자들과 함께 한국 쇼이스트(대표 김동주)와 미국 문스톤엔터테인먼트가 제작비의 10%씩을 투자했다. 10월 개봉 예정인 홍콩 탕지리(唐季禮) 감독의 액션 블록버스터 ‘신화(神話)’에도 김희선이 홍콩스타 청룽(成龍), 양가휘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다. 김희선이 고조선 공주 역으로 나와 약혼자역의 최민수와 버젓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다.
최근 이런 다국적 영화가 쏟아지는 이유는 뭘까? 몇 년 전에도 ‘비천무’ ‘무사’ ‘천년호’처럼 중국에서 전 과정을 촬영한 사례는 있었지만 현지 스태프를 일부 기용했을 뿐 출연진은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합작 프로젝트는 한국이 직접 제작·투자자로 나선다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된다. 극중 한국배우의 비중도 커졌고, 아예 한국계 캐릭터로 나와 한국어를 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는 한국관객을 고려했다기 보다는 ‘아시아 한류시장’을 겨냥했다고 봐야 한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칠검’에 원작에 없던 조선인 캐릭터가 비중 있게 삽입되고 견자단이 한국어 대사를 하도록 설정된 데는 공동제작자인 한국측의 입김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한류 이후 아시아 관객들이 한국어 대사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된 영향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무협일까? 이주익 대표는 “아시아의 고전인 중국 무협이야말로 전세계 영화팬에 어필하는 유니버설한 소재”라고 설명했다.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이 아카데미 10개부문에 후보로 오르고 외국어영화상 등 4개부문을 수상한 이후 웅장한 스케일과 화려한 색채의 중국무협은 할리우드에서도 호감도 높은 핫 트렌드로 대두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현대판 무협물 ‘킬빌’이 큰 인기를 끌고, 장이머우가 ‘영웅’ ‘연인’으로 서양 관객을 의식한 무협물에 도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칠검’은 이태리에만 프린트 250벌이 보내졌을 정도로 유럽 각국에서 큰 규모로 개봉했고, ‘무극’은 미국 판매만으로 제작비(약 3000만달러)를 회수했다. ‘무극’과 ‘신화’의 배급사인 쇼이스트의 이정석 영화사업부장은 “중화권의 노하우와 지명도 높은 감독, 외국 자본이 결합한 스케일 큰 무협물이 현재 미국·유럽 등에 가장 흥행성 높은 아시아 상품”이라며 “여기에 한류스타가 출연하면 제작사 입장에서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합종연횡’ 열기는 한동안 식지 않을 전망이다. 보람영화사는 24일 안성기가 홍콩 스타 류더화(劉德華)와 함께 출연하고 한·중·일·홍콩 4개국이 제작비를 4등분하는 합작영화 ‘묵공’의 촬영에 들어간다. 한국의 박솔미를 캐스팅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 ‘새미시그레’, 홍콩 유위강 감독을 영입한 한국 현대물 ‘데이지’(아이필름) 등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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