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운명' 소외된 남녀에게 다가온 순정

신파(新波)가 유행하는 사회는 서글프다. 그것은 사랑만이 마지막 종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외로운 개인에 대한 슬픈 방증(傍證)이면서, 어쩌면 남아있는 그 종교 마저 사실은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증(反證)하는 우울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남녀의 만남마저 ‘산업’이 된 이 차가운 세속 도시에서, ‘너는 내 운명’이라니. 감독 스스로 ‘통속 사랑극’임을 선언하고 있는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은, 이렇듯 그 비현실성 때문에 차라리 강력하다. 그리고 그 낭만적 신파는 황정민과 전도연이라는 배우에 힘입어 한층 더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골방에서 자위를 시도하다 노모(老母)에게 들키고 마는 인생. 누렇게 쩐 팬티마저 늙은 어머니의 손빨래에 맡겨야 하는 농촌 총각 석중(황정민)은 스쿠터를 타고 가던 티켓다방 레지 은하(전도연)에게 첫 눈에 반한다. 그가 은하의 티켓을 끊는 이유는 단 하나. 술과 매매춘에 지친 가련한 영혼을, 그 시간 동안이라도 쉬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지독한 순정에 함께 눈 먼 은하는 석중과의 결혼하고, 이제 행복의 꼭지점에 이른 영화는 신파 특유의 비극으로 곤두박질한다. ‘너는 내 운명’이었던 여자가 알고 보니 남편이 있었고, 한술 더 떠 에이즈 환자였다는 것. 은하는 이제 “세상에 대한 복수를 위해 병 걸린 몸으로 윤락을 일삼아 왔다”며 매스컴을 장식한다.

‘약속’ 등 신파에서 특히 강한 흡인력을 보여줬던 전도연의 연기도 여전하지만, 양쪽 볼에 호빵 하나씩 들어있는 것 같은 순박한 비주얼로 “너는 내 운명”을 읊어대는 황정민의 주술은 참으로 마력적이다. 무거운 구식 녹음기를 신형 MP3플레이어처럼 목에 건 채 음악을 틀거나 첫날 밤을 치르기 직전 엉덩이 사이에 끼어버린 흰색 면 팬티를 힘들게 끄집어내는 황정민은 객석의 폭소를 이끌어내고, 들이킨 농약 탓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교도소 철창 밑에서 내지르는 그의 절규는 관객의 눈물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이끈다.
배우들의 성취와 별도로, 통속 사랑극 ‘너는 내 운명’에는 스스로를 범박(泛博)한 신파와 가르는 장치가 숨어 있다. 그것은 TV 다큐멘터리 PD 출신인 박진표 감독 특유의 현실적 시선이다. 70대 노인의 성(性)을 담아낸 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2002)에서 보여줬던 다큐적 시선은, 신파에서조차 일관되게 관철된다. “절대로 변심하지 않음. 필리핀 여성과 결혼하세요”라는 플래카드가 마을 초입에 휘날리고, 콜레라에 감염된 돼지를 구덩이 묻어버리며, 젖소가 새끼 송아지를 낳는 순간의 열린 자궁이 현미경 같은 리얼리티로 클로즈업된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에 대한 고발로도 읽혀질 수 있는 그 시선은 특별한 후속 설명 없이 일회성으로 휘발하고, 영화는 다시 “이건 신파야”를 반복한다. 드라마 전체를 훼손할 만큼은 아니지만, 감독의 스타일에 대한 강박이 너무 과하지 않았는가를 생각케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