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몰이 2편: '거대 토끼의 저주'와 '유령 신부'

매력적인 주먹코에 꾹꾹 누른 손자국이 선명하다. 찰흙인형 강아지 그로밋이, 역시 점토로 빚은 과학자 월래스와 코코아 넘치는 머그(mug)로 축배를 든다. 컴퓨터로 찍은 3D 애니메이션이나 종이 위에 그린 셀 애니메이션으로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생생한 리얼리티. 지난 주말 할리우드에서 개봉 첫 주 흥행왕좌(7~9일:1610만 달러 수익)에 오른 클레이 애니메이션 ‘월래스와 그로밋: 거대 토끼의 저주’(Wallace & Gromit: The Curse of the Were-Rabbit)이다. 박스오피스 몇 계단 아래에는 팀 버튼이 만든 ‘유령 신부’(Corpse Bride·6위)가 라텍스로 빚은 자신의 독특한 신체를 수줍은 듯이 드러낸다.
인형의 스크린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 개봉 예정일은 두 편 모두 11월 4일. 방학 때면 만나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과 달리, ‘치킨 런’(2000년) 이후 5년 만에 극장에서 만나는 장편 스톱모션(stop motion) 애니메이션이다.
이름마저 낯선 이 장르의 애니메이션은, 실제로 재료를 써서 인형을 만든 뒤 멈춰 서 있던(stop) 그들에게 움직임(motion)을 줘서 한 컷 한 컷 카메라로 찍어낸 것. 고무찰흙으로 만들면 클레이(Clay) 애니메이션이고, 팀 버튼 처럼 라텍스를 써서 조물락거린 퍼핏(puppet) 애니메이션도 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수공업적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사실감이다. 픽사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저패니메이션의 위력이 제아무리 강력해도, 평면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근원적 한계는 어쩔 수 없다. 동급의 상상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아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는 2D나 3D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종류의 조형감과 질감이 별도로 존재한다. ‘월래스와 그로밋’을 만든 아드만 스튜디오는 “실제로 2D나 3D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주인공 얼굴 표면을 손으로 눌러가며 표정을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인내심으로 이뤄지는 이 세계는 또한 ‘느림 미학’의 정점이기도 하다. 극장용 장편 영화 수준의 화면을 얻기 위해서 이들이 준비하는 시간과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 팀 버튼의 ‘유령신부’는 1초의 장면을 얻기 위해 많게는 12시간을 들였다. 한 번에 0.5㎜정도 인형을 움직여 각각의 포즈를 촬영하고 이 장면을 이어 붙이는 작업은 엄청난 집중력과 참을성을 요구하는 것. 1908년 영국에서 클레이 애니메이션용 점토를 개발하며 시작한 이 장르의 역사는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수공업적 장인정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낯선 장르인 만큼, 한국에서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흔하지 않다. 2003년 동경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권오성 감독의 중편 ‘강아지똥’이 그나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고, 그의 최신 작품인 ‘동물 농장’은 6편의 애니메이션 단편을 묶은 ‘별별이야기’의 한 작품으로 묶여 최근 극장 개봉했다. 또 전문 스튜디오인 ㈜이미지플러스(사장 정원만)의 52부작 ‘내 친구 드래곤’은 매주 목·금요일 오전 9시 EBS TV에서 상영중이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에게는 차라리 TV CF에서 만나는 광고들이 더 익숙할 것이다. 아이스크림 호도마루나 체리마루 광고에서 만나는 호두 인형·체리 인형, 그리고 삼성전자 ‘또 하나의 가족’ 시리즈, 달팽이들의 일화를 귀엽게 그린 ‘깜찍이 소다’ 등이 한국인들의 사랑을 담뿍 받은 클레이 애니메이션 광고들이다.
현재 극장용 장편 ‘럭키 서울’을 준비중인 권오성 감독은 “우리나라도 자본력은 턱없이 못 미치지만, 비슷한 조건일 때 촬영 노하우는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