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섬뜩녀'하겠다고 난생 처음 졸랐어요"

포크를 잡은 손이 햄 조각 위에서 하릴없이 맴돈다. 오후 여섯 시를 넘긴 시각.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라며 발랄하게 주문했지만, 오므라이스는 삼십 분째 절반 넘게 남아있다. 엄정화는 긴장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이었어요. 배역을 달라고 먼저 조른 것은. 그러고 보니 개봉하기 전에 세 번이나 영화를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네요. 편집실에서 한 번, 기술시사 때 한 번, 그리고 엊그제 VIP 시사회까지.”
죽은 아이에 대한 복수로 영화 초반에 다섯 명을 잇달아 저 세상에 보내는 여자, 정순정. 27일 개봉하는 잔혹극 ‘오로라 공주’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 사실 뜻밖이다. 애교와 눈웃음으로는 겨룰 상대가 많지 않은 엄정화에게 이런 싸늘한 캐릭터라니. 자신을 지배하던 ‘오늘 맑음’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변신? 글쎄요. 강박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감정의 극단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죠. 감독님이 나중에 그러시더라고요. 누가 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그런 배우보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나오는 의외성. 그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결심했다고.”
‘오로라 공주’는 배우 출신 방은진의 감독 데뷔작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 그녀 역시 단순한 연기 변신을 넘어 감독을 꿈꿔본 적은 없을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아예 손을 휘휘 젓는다. “배우가 감독에 욕심이 있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쪽에는 아예 재능이 없다”면서. 그러고는 “클라이맥스 부분을 찍은 뒤 바로 모니터로 확인하는데, 감독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하더라고요. 그때 이 사람도 결국 배우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라며 화제를 돌린다.

‘오로라 공주’라는 제목은 살인 현장에 ‘서명’처럼 남아있는 스티커에서 비롯됐다. 지금 30대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TV 애니메이션 ‘손오공과 오로라공주’의 그 예쁘장한 공주 캐릭터. “닮았다”고 살짝 덕담을 건넸더니, 그제서야 굳어있던 표정이 껍질을 벗는다. 그리고 유년 시절로의 시간 이동. “제가 충북 제천하고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자랐거든요. TV도 채널이 하나밖에 잡히지 않던 곳이었죠. 창피한 얘기지만, ‘오로라 공주’도 이번에 처음 알았지 뭐예요.”
한번 풀어진 긴장으로 그녀는 한층 자유롭다. 이번에는 강원도 정선의 외갓집과 처녀 시절의 이모를 떠올린다. “어린 나를 보면 깜빡 넘어가시던 분이었거든요.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모가 아이를 낳았죠. 어린 생각에도,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걸 느꼈죠. 화장실 가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요.”
‘오로라 공주’를 찍으며 그 이모 생각이 났다고 했다.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구나. 세상은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게 해줬던 이모. 그런데 만약 그렇게 소중한 아이를 잃는다면?
청주의 쓰레기 매립장에서 여드레 밤낮을 뒹굴고(악취가 아직도 밴 것 같다며 뾰로통이다), 상대 변호사(장현성)의 주먹에 맞아 시나리오에도 없던 진짜 쌍코피를 줄줄 흘려야 했지만(장현성은 미안하다며 지금도 얼굴을 못 든다고 했다), 개봉을 3일 앞둔 지금 엄정화는 “뿌듯하다”고 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앙큼한 연희, ‘싱글즈’의 씩씩한 동미, ‘…홍반장’의 발랄한 혜진, 그리고 최근 2주 동안 흥행 왕좌를 지켰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톡톡 튀는 유정까지. 빛깔과 무늬는 달랐지만, 그가 껴안고 관객이 사랑했던 캐릭터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랑스럽다고 쉽게 표현하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운, 비운의 엄마 정순정이다.
‘오로라 공주’의 성패(成敗)는 결국 관객이 엄정화의 정순정에게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지 여부로 판가름날 것이다. 그는 “공감 여부는 관객이 결정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순간, 엄정화의 눈은, 분명 순정(純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