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말순씨' 엄마, 소년의 꿈으로 스러지다

모든 영화 감독에겐 꼭 한 번 만들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작품이 하나씩 있다. 섬세한 손길로 빛을 일궈낸 수작 ‘인어공주’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 감독에게 ‘사랑해, 말순씨’(11월3일 개봉)가 그렇지 않을까. 그가 애초 감독 데뷔작으로 준비했었다는 이 영화엔 절제되고 정제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절실함이 화면 가득 물들어 있다. 과거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실한 안타까움,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절실한 소망까지. 어떤 것일까, 열네살 소년에게 비친 세상은. 그리고 삶은.
1979년 10월26일. 정치적 격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도 아랑곳 없이, 화장품 외판원인 엄마 말순(문소리)과 함께 사는 중학교 일학년 광호(이재응)의 머리 속은 다른 일로 분주하다. 세들어 사는 간호조무사 누나 은숙(윤진서)을 짝사랑하지만 엄두가 안 나고, 싸움 실력이 대단한 친구 철호(김동영)와의 우정을 회복하고 싶지만 서먹함이 앞선다. 짓궂은 장난을 치는 동네 바보 재명(강민휘) 때문에 짜증나는 일도 많다. 그러던 어느날, 7통을 옮겨 적어 돌리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행운의 편지’를 받은 광호가 엄마와 은숙, 철호와 재명에게 편지를 전달하자마자 좋지 않은 일들이 꼬리를 문다.

‘사랑해, 말순씨’는 멜로 드라마의 초가을을 넘기고 휴먼 드라마의 늦가을을 열어젖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감독은 암울했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인물 하나하나를 따뜻하고 넉넉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삶의 풍경을 다루는 에피소드의 품질과 현실감이 탁월하고 한 시대를 다루는 손길도 꼼꼼하기 이를 데 없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만화책 ‘바벨2세’와 가요 ‘밤차’에서 비닐 간이옷장과 ‘대한 냉장고’ CF까지 동원, 지나간 한 시대의 공기를 세심하게 불어넣었다. 억압적인 학교 교육에 대한 묘사 방식은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기존 히트작들을 떠올리게 하며 기시감(旣視感)을 안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창의력의 문제라기보다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추억에 획일적 밑그림을 부과한 그 시절 자체의 폭압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랑해, 말순씨’는 언뜻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릇이 큰 영화다. 교양 없고 세련미도 없어 부끄러웠던 엄마에 대한 뒤늦은 사모곡으로 먼저 다가오는 이 작품은 그 엄마가 삶이 비롯한 곳 자체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결국 생(生)의 절절한 고백록이 된다. 그리고 한 시대를 스케치하는 특수성이 성장 영화로서의 보편성보다 일견 강력해 보이지만,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보다는 암울한 시대상황 속 소년의 꿈을 그린 에밀 쿠스투리차의 ‘아빠는 출장중’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유머러스하고 푸근하게 진행되던 영화는 후반에 접어들며 비극을 하나씩 펼친다. 열네살 나이로는 버티기 힘든 삶의 암연(岩淵)에서 소년은 결국 꿈으로 간다. 떠나갔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덩실덩실 그와 함께 춤을 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마음 속 엄마에게 말을 건다. “3학년 됐어요. 보고 계시죠?” 어쩌면 삶은 부서진 꿈의 퇴적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 멀리 어디선가, 소년들은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