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기자의 시네마 레터] 빨간 구두

‘너는 내 운명’에서 폭력적인 전 남편 천수를 피해 숨어 지내던 은하는 석중을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이 영화에서 둘이 처음 관계를 갖는 것으로 암시되는 장면은 낭만적으로 구성되었지요. 몸을 조금 세운 은하가 밑에 누운 채 수줍어하는 석중의 옷을 장난스레 벗기려는 순간, 두 사람이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며 화면엔 보이지 않도록 처리되었으니까요. 카메라는 그런 둘을 축복하듯 살짝 내려다보는 각도를 취합니다. 반면 천수가 은하를 찾아내 강제로 욕심을 채우는 장면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런 상황의 섹스신이 대부분 그렇듯, 두 사람은 후배위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때 화면 구도는 열린 문 너머로 넘겨다보는 앵글로 짜여졌지요.
지난달 개봉한 이태리 영화 ‘빨간 구두’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장면이 나옵니다. 극 초반 중년 남성 티모테오는 전화를 빌려 쓰러 들어간 집에서 이탈리아라는 여자를 완력으로 범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폭력적 섹스인데도 이 장면은 남성상위의 ‘일반적인’ 체위로 표현됩니다. 그건 천수와 은하의 관계와 달리, 티모테오와 이탈리아가 앞으로 사랑에 빠질 사이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불행히도 강압적으로 시작됐지만 남은 러닝 타임 동안 뜨겁게 교류할 둘에 대한 연출자의 ‘무의식적 예의’를 드러내는 부분이 아닐까요.

프랑스 신경학자 프랑수아 레르미트는 위치만 바꿔도 사람들이 얼마나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는지 실험했습니다. 육지를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놓고 뱃머리와 선미를 표시하지 않은 배 한 척을 그려넣으면 절대 다수가 바다를 향해 배가 떠나가는 장면이라 답한다지요. 그런데 똑같은 그림의 좌우를 돌려 그리면, 배가 육지로 들어오는 중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훨씬 많답니다. 인간은 우편향(右偏向) 특성을 갖고 있기에 무의식적으로 배가 항상 오른쪽으로 움직인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말 위치만큼 고정관념에 붙박힌 것도 드물지요.
익명의 남녀가 빈 아파트에서 서로에게 탐닉하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첫 섹스신은 서서 관계를 갖는 입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벽으로 밀어붙인 후 겨울 코트까지 걸친 채 지퍼만 내리고 욕망을 ‘해결’합니다. 최소한의 육체 면적만 접촉시킨 뒤 가장 적은 노력을 들이는 이 자세는 둘의 관계가 얼마나 표피적인지 드러냅니다.
강도 높은 베드신으로 이 작품과 함께 70년대 영화계에 큰 충격을 던진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에서 기생인 여자와 주인인 남자의 첫 관계는 서로 앉은 가운데 이뤄지는 좌위 형태로 연출됐습니다. 첫 섹스인데도 남성 혼자 주도권을 쥐지 않게 표현된 극중 이 체위는 둘 사이 욕망의 평등한 관계를 담아내며 이후 남자를 압도해가는 여자의 집착을 예비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진행될수록 점점 더 여성상위 자세가 지배적으로 되어가지요. 십여차례 가까운 둘의 베드신은 단 한 번도 남성상위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반면 극중 부부간 잠자리는 별다른 긴장감 없는 남성상위로 묘사되지요.
역사가 100년을 넘기면서 영화는 특정 설정을 관성적으로 반복합니다. 하지만 클리셰(상투적 표현)야말로 사람들이 진짜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체위는 곧 이데올로기입니다.
(dj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