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4천왕 시대로?

‘창·돌·철·훈’ 시대가 뿌리를 내리는가. 국내 최정상권 판도가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의 4강 구도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메이저급 국내 타이틀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2년간 국제타이틀도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다. 이들 4명이 배제된 채 치러지는 타이틀전 결승이나 도전기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바둑역사는 크게 보면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의 4대 ‘왕조 시대’를 거쳤다. 조남철과 김인은 거의 무풍지대를 달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대 1인자들. 김인 퇴조 직후 잠시의 춘추전국 시대가 있었고, 바통을 이어받은 조훈현은 ‘조-서 시대’를 딛고 천하를 평정했다. 이창호 역시 조훈현 유창혁 서봉수 등과 어울려 한때 ‘4인방(4천왕)’ 시대를 거치며 결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창호는 여전히 최정상권의 일각을 지키고 있지만 절대적 카리스마는 사라졌다. 30고개를 눈앞에 두면서부터 8~10년 연하의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의 끊임없는 침공을 받은 결과다. 그가 국내 기전 지분율 1위를 사수하는 사이 국제 무대에선 이세돌이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다. 한때 나돌던 ‘이-이 시대’론은 대형 신예들의 출현 후 사라졌다. 최철한은 지난해 이창호와의 2차례 번기(番棋)를 승리한 뒤 올해 중환배 결승서 이세돌을 제쳤고, 박영훈은 하늘 같던 이창호와 이세돌에게 각각 최근 3연승을 거두며 상대 전적 격차를 바짝 좁혔다.
현재의 ‘창·돌·철·훈’ 시대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누구도 점칠 수 없다. 이창호가 전열을 정비해 1인자 시대를 연장할 수도 있고, 나머지 3명 중 누군가가 치고 나가 새로운 군주로 탄생할 수도 있다. 조한승 송태곤 박정상 원성진 등은 ‘신 4천왕’을 최근거리에서 위협 중이고, 강동윤 이영구 윤준상 고근태로 대표되는 신예군의 추격도 매섭다. 조훈현 유창혁의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고 단언하기도 이르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이라면 ‘창·돌·철·훈’ 각축상은 당분간 지속되리란 견해가 많다. 최규병 九단은 “새로운 패자(覇者)는 아무래도 이들 4명 사이에서 나올 전망이며 그 쟁패 기간은 2~3년 가량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넷 모두에게 정신없이 바쁜 연말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12일 벌어진 제1기 원익배 준결승서 이창호는 최철한을 흑 불계로 제압, 먼저 올라간 박영훈과 패권을 다투게 됐다(날자 미정). 박영훈은 이에 앞서 15일 조한승을 상대로 영남일보배 초청 8강전 결승 3번기 첫판을 둔다. 이창호와 최철한 간에 전개 중인 GS칼텍스배 결승 5번기(이창호 2대1 리드) 4국은 오는 21일로 잡혔다.
이창호는 이 밖에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에도 선착해 있다. 이세돌은 국수전과 기성전서 ‘부활’을 노리는 중이다. ‘신 4천왕’ 간의 격돌은 정상 다툼이란 측면 외에도 흥행 요인이 많다. 과거의 ‘황제’가 세대 간 경쟁을 통해 탄생했다는 점에서 30대 1명과 20대 3명 간 각축이 어떤 그림을 완성 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