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제목이 진화한다

한국영화 제목이 달라지고 있다. 관객이 영화를 접하는 첫 통로인 제목은 대중의 취향과 유행을 감안해서 빠르게 변화할 수 밖에 없다. 2004년 12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 85편과 2000년 상영된 58편(각각 그 해 개봉한 한국영화 총 편수)의 제목을 비교 분석했다. 5년이란 기간은 영화 제목이 변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두 글자에 다 담을 수 있나요
제목은 간결함이 생명. 그러나 요즘 충무로는 간명한 맛을 살리되 좀더 적극적인 작명법을 택하고 있다. 5년 전 한국영화의 평균 글자수는 3.92자였으나 올해 충무로 영화는 5.02자에 달한다. 28% 증가. (극단적 길이를 가진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와 부제가 길게 붙은 애니메이션 ‘그리스 로마신화’를 제외한 수치.) ‘쉬리’ ‘친구’를 위시해 한때 유행했던 두 글자 제목이 2000년엔 22%였지만 2005년에는 7%로 급격히 줄었다.
제목의 길이가 늘어난 이유는 이른바 ‘하이 컨셉트 영화’(한 두 줄로 스토리를 압축할 수 있는 설정을 지닌 기획 영화)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나온 ‘B형 남자친구’ ‘미스터 주부퀴즈왕’ ‘여고생 시집가기’ 등은 제목만 들어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대히트 이후 특히 코미디가 가미된 멜로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이런 작명법은 특성상 일정한 길이 이상의 글자수를 필요로 한다. 운율을 가진 제목이나 살짝 비틀어 재미있게 표현된 제목이 각광을 받는 것도 글자수가 늘어나는 이유다.
심재명 MK픽처스 사장은 “요즘 충무로에선 ‘공감 마케팅’을 통해 관객과 적극 소통하려는 시도가 많다”며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제목보다는 좀더 직설적이면서 쿨한 제목이 선호되는 것도 젊은 관객 취향과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올 겨울 개봉을 앞두고 있는 ‘태풍’ ‘청연’ ‘야수’ 같은 작품들에서 보듯, 대작들은 상대적으로 짧은 제목을 선호하는 경향이 여전하다.
◆주인공 이름도 브랜드
등장 인물 이름을 아예 제목으로 내세우는 경우도 크게 늘었다. 2000년에는 단 5편에 불과했지만 지난 1년 사이엔 ‘역도산’ ‘광식이 동생 광태’ ‘사랑해, 말순씨’ 등 모두 13편이나 나왔다. ‘선생 김봉두’의 영향으로 ‘한길수’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처럼 성과 이름 전부를 사용하는 경우도 늘었다. ‘JFK’ ‘델마와 루이스’ 등 할리우드에서는 주인공 이름을 넣는 방식이 흔히 구사되어 왔지만 충무로에서는 최근까지 상대적으로 기피되는 유형이었다.
제목에 들어간 이름은 극중 캐릭터를 일종의 브랜드처럼 인지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변화는 젊은층에서 관계나 직함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선호되면서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다.
◆문장 부호는 디자인의 기호
5년 전에는 쉼표를 사용한 제목이 한 편도 없었다. 그러나 2005년에는 ‘소년, 천국에 가다’ ‘제니, 주노’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안녕, 형아’ 등 무려 8편이나 쉼표를 사용했다. ‘철수♡영희’처럼 특수 기호를 제목에 넣는 경우까지 생겼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후 좀더 잦아진 이런 경향은 긴 제목에 리듬을 부여하고 멋을 부리기 위해서다. 전혀 다른 이유도 있다.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는 “문장 안의 모든 것을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감성적 관객층을 겨냥해 제목을 디자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며 말했다.
◆영어는 촌스러워
한동안 제목에 영어 단어를 넣는 것이 고급스런 포장처럼 여겨졌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분위기가 변했다. ‘배니싱 트윈’이나 ‘해피 데이’ 같은 영화가 나왔던 5년 전에는 20%가 넘는 작품이 외국어 단어를 사용했지만, 올해는 8%에 불과했다. 요즘 관객은 제목에 영어를 섞어 쓰는 게 촌스럽다고 느끼기 때문. ‘웰컴 투 동막골’은 오히려 그런 촌스러운 느낌을 모든 연령층이 볼 수 있는 휴먼 드라마의 감각으로 살려낸 예외적인 경우다. 이와 정반대로 ‘혈의 누’ ‘극장전’ ‘나의 결혼원정기’ 등 옛스런 한자 어투를 사용한 제목들이 각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