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향토기행] 홍성, “조국이 위태로울 때마다 위인이 나타났다”

▲ 지난 10월 초에 열린 내포사랑 큰축제에서 호상놀이패가 조양문을 지나고 있다.

내포(內浦)라 불리는 지방이 있다. 내포란 ‘안쪽의 개’란 말로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강어귀의 안쪽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다. 전통적으로 내포지방이라 하면 아산만과 천수만의 바다를 위아래에 두고, 금북정맥의 가야산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열 고을을 합쳐 부르는 지명이다.

해미·결성·태안·서산·면천·당진·홍주·덕산·예산·신창 이렇게 내포의 열 고을 가운데 홍주(洪州), 그러니까 옛 홍주와 결성을 합쳐서 이루어진 현재의 홍성(洪城)은 내포에서 가장 큰 고을로 꼽혔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어패류의 최고 산란지로 꼽혀온 천혜의 어장인 천수만을 서쪽에 거느리고 있는데, 천수만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작은 포구들, 즉 옹암포의 광천과 동산포의 결성으로 풍부한 해산물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 홍성의 상징인 홍주성의 조양문은 홍성 주민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또 금북정맥에서 발원한 금마천은 주변에 널찍한 농토를 펼쳐 놓았으며, 이 평야는 동쪽의 예당평야에까지 이어져 내포의 풍부한 곡창지대를 이뤘다. 여기에다가 동남쪽으로 접한 청양 고을 산속에서 나는 특산물까지 모여드니 홍성은 내포지방의 중심지로 부족함이 없는 고을이었다.

이는 명칭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 말에 처음 등장하는 충청도라는 명칭은 양광도(楊廣道), 충청공홍도(忠淸公洪道) 등으로도 불렸고, 조선시대에 주로 충청도로 불리다가 홍충도(洪忠道)와 공충도(公忠道)로 바뀌기도 했다. 이 명칭에서 클 홍(洪) 자는 모두 당시 홍주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니, 충청도에서 홍주의 정치적 위상은 충주·공주·청주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100년 전까지만 해도 홍성은 내포의 수많은 고을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충청도의 대표 고을이었던 것이다.

“촌에서 출세했네!”

학창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같은 과 후배의 고향이 홍성이라는 말을 듣고 길손이 불쑥 내뱉은 말이다. ‘촌’이라는 말은 폄훼가 아니라 정겨운 고향에 대한 표현이었으나 아마 후배는 듣기가 거북했던가 보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정색을 하곤 홍성 자랑을 한참 동안이나 느릿느릿 풀어놓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이런 말도 뭇(못) 들어봤슈? 홍성 가서 아는 체 허지 말구, 광천 가서 돈 있는 체 허지 말라구유!”

“?…”

“왜냐믄유, 홍성에는 관공서가 많어서 그만침 유식한 사람도 많었다는 말이구유, 광천은유, 아주 큰 옹암포구가 있어서 알부자가 많았다는 뜻이유.”

▲ 인지한 미소로 홍성 읍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용봉사의 신경리마애불.

당시 길손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고개를 계속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러구 홍성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나 백야 김좌진 장군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나왔슈. 대전은 머 있슈?”

그리곤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랑스러운 말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광천서는 주먹자랑도 허지 말라구 했슈.”

그는 홍성에서도 광천 출신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홍주는 호서의 큰 고을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장으로 일컬어왔다’고 기록된 사실을 길손이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렇듯 내포의 중심지였던 자부심이 그대로 묻어있는 홍성은 읍내 한중간에 떡 버티고 있는 홍주성과 그 주변의 흔적을 먼저 살펴보는 게 순서가 맞다. 배산임수형인 홍주성은 홍동~백월~오서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적의 침입을 막는 1차 방어선 임무를 맡고, 홍성천과 월계천이 해자(垓字) 역할을 하고 있는 반타원형 평지성으로 예전부터 내포지방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왔다.

풍수지리에선 홍주성의 앉음새가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국’이라 보기도 한다. 부안 변산의 개암사 울금산성과 더불어 백제 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일 것으로도 추정되기도 하는 홍주성은 고려 이후 무려 열여섯 차례나 왜구의 침략을 받았다. 근세에 동학농민항쟁이 벌어졌을 당시 동학군은 내포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홍주성으로 집결했고, 이곳에서 관군과의 대규모 전투를 벌여 수많은 동학군이 희생당했다. 또한 구한말엔 홍주성에서 민종식(閔宗植)이 이끄는 의병과 일제 군대 간에 큰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홍주성은 일제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홍성 주민들의 곧은 기질을 꺾기 위해 고심하던 일제는 도로를 신설한다는 핑계와 진지를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홍주성을 훼손했던 것이다. 이때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서문(景義門)과 북문(望華門)도 헐렸다. 일제는 가장 크고 화려한 동문(朝陽門)마저 철거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다행히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조선시대 전성기엔 성안에 관아 건물만 35동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이 남아 옛 영화를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홍주성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1906년에 있었던 홍주성전투다. 이조참판이었던 민종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낙향한 후 충청도 정산에서 은둔생활을 해오다가 1906년에 의병에 참여했다. 홍주의병은 1906년 5월11일 홍산을 출발해 바로 서천으로 이동했고, 이후 비인~판교~남포~결성을 지나 5월19일 홍주성에 도착했는데, 1,000여명에 이르는 의병의 기습침투작전에 놀란 성안의 일본군이 철수했으므로 의병들은 수월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일제는 5월20일부터 28일까지 지속적으로 홍주성을 공격했으나 의병들의 저항이 완강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일본군은 이토 히로부미의 지휘로 5월31일 홍주성을 공격했다. 일본군의 홍주성 공격과정은 매우 잔혹해 홍주성 주변 10리 내의 민가와 농토가 모두 초토화됐다. 일본군 보고서엔 의병 및 민간인 82명이 전사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약 1,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전투가 끝난 후 의병들의 주검은 홍주성 근처의 홍주천 기슭과 남산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다 1949년 한 농부가 우연히 많은 유골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1906년의 홍주의병들 유골로 밝혀졌다. 그러나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유골의 주인공을 동학군으로 보기도 한다.

1906년의 홍주의병은 비록 실패하긴 했으나 우리 의병사(義兵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홍주의병은 민종식 이하 유생들이 주도했지만, 병사층은 농민들, 내포 일원에서 활동하던 활빈당(活貧黨)과 부보상(負褓商), 그리고 강제 해산당한 병사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을 만큼 민중 의병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약 300여 명의 유병소(儒兵所)가 별도로 편제될 정도로 유림의 참여와 호응이 컸다. 당시 충청도의 명망 있는 유생들이 거의 모두 참여했는데, 이전과 달리 학통뿐만 아니라 노론과 소론의 당색까지도 극복했다고 한다.

홍주성은 현재 800여m밖에 남지 않았고, 시가지와 복잡하게 얽혀있어 홍성 초행자라면 답사 동선을 잡기가 수월치 않다. 길손이 추천하는 관람순서는 조양문~홍주아문~내삼문~안회당~여하정~성벽 걷기다.

읍내 중심의 조양문을 본 다음 한국통신 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5분쯤 걸으면 군청이 나온다. 군청의 정문 노릇을 하고 있는 홍주아문(洪州衙門)을 들어서면 아름드리 고목들이 보인다. 천주교 박해시절에 많은 교인들이 이곳에 묶여 죽음을 기다리기도 하다.

▲ 맛과 향이 타지방의 새우젓보다 월등히 뛰어난 광천 새우젓을 만드는 토굴.

길을 막는 군청 건물을 돌아가면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安懷堂)이다. 안회(安懷)란 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노인을 평안히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 이어 안회당 뒤뜰엔 성벽을 배경으로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안에 여하정(余何亭)이란 현판을 건 수상 정자가 서있다. 작은 규모의 정자이지만 1896년 이승우 목사가 옛 청수정 자리에 세운 것으로, 역대 홍주목사들이 쉬던 곳이다. 굽어 자란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어우러진 연못의 풍광이 제법 아름답다.

그런데, 조양문~홍주아문~내삼문~안회당의 순으로 자리했던 홍주관아를 일제는 홍주아문과 안회당 사이에 지금의 군청 건물을 세움으로써 ‘홍성의 정기’를 차단해 버렸다. 마치 서울의 경북궁 앞에 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처럼. 그래서 홍성 주민들은 군청 건물을 작은 총독부 건물이라고도 한다.

홍주성을 둘러보고 홍성의 지난한 역사를 되짚어봤다면 이젠 북쪽의 용봉산((龍鳳山·381m)으로 갈 차례다. 암봉 즐비한 용봉산은 비록 높이는 400m가 채 안 되지만, 홍성의 대표경치인 팔경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히며 사랑 받는다. 산세가 마치 봉황의 얼굴과 용의 꿈틀거리는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용봉산이라 했다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엔 팔봉산(八峰山)으로 적혀 있다. 언제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의 이름이 붙어도 전혀 어색치 않은 산세다.

홍주성 앞엔 고려 때의 큰 절집 광경사(廣景寺)의 유물인 당간지주가 우뚝하고, 서쪽엔 결성의 고산사, 남쪽 오서산의 정암사·내원사가 있으나, 홍성 최고의 불교성지는 아무래도 북쪽의 용봉사인 듯싶다.

▲ 용봉사의 유물들. 돌절구, 맷돌, 석조 등에서 용봉사의 역사와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엔 영봉사(靈鳳寺)로 표기되어 있는 용봉사(龍鳳寺)의 창건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백제 때 기왓조각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전문가들은 이 절집이 백제 때 처음 지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주문 근처엔 통일신라시대에 조각한 마애불이 있고, 절 위쪽에 고려 때 새긴 마애불이 있으며, 법당엔 조선 숙종 때 승려 화가 진간이 그린 영산회괘불탱이 걸려있는 등 시대별로 주목할 만한 보물급 유물이 있는 것으로 봐서 창건 이후 조선 말기까지 사세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홍성 주민들의 염원을 들어주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용봉사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인근 수덕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00여 년 전인 1906년, 평양 조씨들이 공조참판을 지낸 조희순(趙羲純)의 묘를 용봉사 자리에 쓰기 위해 절을 밀어내자 주민들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 한다. 용봉사에서 서쪽(왼쪽) 산길로 30m 정도 오르면 문제의 무덤이 보인다. 용봉사 스님의 말에 따르면 요즘에도 더러 후손들이 찾아와 묘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150m쯤 더 오르면 널찍한 터가 나오고, 드디어 신경리 마애석불(보물 제355호)이 보인다. 마애불은 큼직한 바윗덩어리를 감실형으로 움푹 파내고 돋을새김으로 조각했다. 4m에 이르는 거대한 몸체라 아래서 올려다보면 무뚝뚝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약간 미소를 띠고 있는 부처님의 표정은 온화하고 원만하다. 돌부처의 시선은 남향이다. 자애로운 그 눈길을 좇으면 멀리 내포의 중심 고을인 홍성 읍내가 내려다보인다. 홍성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해주길 바라던 백성들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용봉산을 내려와 동쪽의 홍북면 노은리로 간다. 이 마을은 거창한 유적이나 유물이 없어 일반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지만, 여기에선 만고절의(萬古節義)의 상징적인 인물 두 분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고려 말기의 명장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이 1316년에 여기서 태어났고, 그후 100년쯤 뒤인 1418년엔 조선 초기의 학자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1418-1456)도 세상의 빛을 보았다. 이렇듯 출생지가 같은 두 분의 운명은 모두 새로운 임금에 반대해 절개를 지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직계 후손이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 가난한 농촌의 초가집 같은 만해생가.

산중턱에 있는 최영 장군의 사당은 찾는 이 드문 듯 고즈넉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최영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묘안을 냈다. 바로 부정한 재물을 모았다는 누명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부정한 재물은 정적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모양이다.

그러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훈을 한평생 지키며 살아온 최영 장군은 죽기 전에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에 단 한 번이라도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면 내 무덤에서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결코 풀이 돋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봉분에 풀이 나지 않아 붉은 흙빛이 그대로 드러난 무덤을 적묘(赤墓)라 하는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는 조선왕조 500년간 정말로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조선이 망하고 일제 때 대대적인 묘소 정화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비석도 세웠으나 풀은 여전히 돋지 않다가 1970년대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이 무덤을 정성들여 가꾸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풀이 돋았다고 전한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 태어난 마을은 최영 장군 사당에서 채 1km도 안 떨어져 있다. 그런데 노은리엔 성삼문 부인의 묘와 부모의 묘는 안내팻말도 거창하게 서있으나, 정작 매죽헌의 묘는 어디에도 없다. 여기엔 최영 장군보다 더 비참했던 매죽헌의 마지막 사연이 전한다.

세조를 암살하려는 거사가 김질의 밀고로 실패한 후 성삼문은 한강변 새남터로 끌려가 처형당하는데, 그가 받은 형벌은 두 팔과 다리 및 머리를 각각 묶은 수레를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는 거열형(車裂刑)이었다. 그의 시신은 팔도를 떠돌고, 당시 한강 노량진엔 성삼문의 시체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그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시체를 수습해 노량진에 묻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올 뿐이다.

1676년(숙종 2)에 선생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면서 사육신을 같이 모시고 녹운서원이라 했다. 조선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훼철될 처지에 놓이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묻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 당시 유생들이 노은단에 무덤처럼 봉분을 만든 까닭은 아마도 무덤조차 없는 성삼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은단은 세조 앞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았다는 조선 지조의 상징 성삼문의 가묘인 셈이다.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擊鼓催人命)

고개 돌려보니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回頭日欲斜)

황천 가는 곳 주막 하나 없으니(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잘 것인가(今夜宿誰家)

▲ 전국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던 결성농요를 재현하고 있는 결성 주민들.

절망적 현실을 담담한 시정으로 승화시킨 이 멋진 절명시(絶命試)는 성삼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전하는 시문집 어디에도 이 시는 실려 있지 않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751년 간행된 일본 최고(最古)의 한시집 ‘회풍조(懷風藻)’에서 좀 거칠긴 해도 이와 아주 흡사한 일본 오호츠(大津) 왕자의 절명시를 찾아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정변을 일으켰다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참수 당한 일본 왕자 오호츠의 작품을 후세에 누군가 환골탈태식으로 개작해 성삼문 작품이라고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최영 장군과 성삼문의 그림자를 밟았다면 옛 홍주 고을은 얼추 돌아본 게 된다. 이젠 금북정맥을 넘어 서쪽의 결성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길은 두 갈래다. 홍성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하고개를 넘거나 21번 국도를 따라 꽃조개고개를 넘어 가는 방법이 있다. 길손은 꽃조개고개를 넘었다. 광천을 들렀다가 결성으로 가기 위해서다.

광천 여행은 아무래도 오서산 정상엔 억새가 새하얗게 피어나고, 옹암포 토굴엔 새우젓이 잘 숙성되고 있을 가을이 제철인 듯싶다. 금북정맥의 서편에 오서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광천은 대한민국 최고의 젓갈 마을이다. 광천 읍내엔 토굴새우젓 재래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포구였던 옹암리 독배 마을에 가면 토굴새우젓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옹암포의 시장 형성은 고려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새우젓을 사고 파는 시장의 틀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 말엽에 들어서라고 한다.

옹암포는 천수만으로 연결되는데, 그 포구에 서해를 지키는 수군 본부인 충청수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옹암포가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크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1931년에 개통되어 옹암포를 지나가는 장항선의 위력도 빼놓을 수 없다.

▲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들이 홍주성 탈환 과정을 보여주는 홍주성전투 장면.

이렇듯 여건이 두루 좋은 옹암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100여 척의 어선들이 들어올 정도로 서해안의 커다란 항구였다. 그러나 1980년에 안면도에 연륙교가 생기면서 옹암포로 들어오던 수산물이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운송수단이 철로에서 국도로 바뀐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옹암포 갯벌에 토사가 쌓여 해수면이 점점 얕아졌는데, 얼마쯤 지나 포구에 보령방조제가 들어서면서 마침내 옹암포는 폐항의 운명을 맞았다.

만선의 기쁨으로 술렁이며 느긋한 내포 사투리 넘쳐나던 포구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 되고 말았다. 졸지에 생업을 잃은 위기에 처한 주민들은 방향을 잃고 당황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아니 바다가 메워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새우젓을 김장 김칫독 묻듯이 땅을 파서 보관했다는데, 버리는 것이 절반이나 될 정도로 생산성이 떨어졌다. 이때 독배 마을의 윤병원 할아버지는 시험 삼아 약 60독 분량의 새우젓을 오서산 자락 폐광으로 옮겼다. 일제 때 금광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윤 할아버지는 탄광의 온도가 새우젓을 숙성시키는 데 적합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윤 할아버지의 예상은 적중했다. 새우젓사업은 10배 이상의 이득의 볼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윤 할아버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어촌의 신지식인이요 벤처사업가였던 셈이다.

윤 할아버지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주민들도 옛날에 어선들의 무사항해를 빌었던 당집이 있는 잿배기 언덕에 하나둘 토굴을 파면서 광천 새우젓은 우리나라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토굴새우젓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현재 잿배기 언덕과 그 주변 야산 토굴엔 암반을 구불구불 파들어간 토굴이 50여 개나 있다. 윤 할아버지는 몇 년 전 작고하고 현재 손자 윤태호 씨가 가업을 이어받아 새우젓 영업을 하고 있다.

새우젓 익는 토굴을 빠져 나온 뒤 ‘서해의 등대’로 불리는 오서산(烏棲山·790.7m) 중턱에 자리한 정암사 뜨락에서 광천 읍내를 굽어보곤 서쪽으로 달린다. 농촌의 전통을 잘 이어온 결성 고을을 지난 뒤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고산사 대광보전(보물 제399호)을 살펴보고 나면 다시 두 명의 위인을 만나게 된다.

금북정맥 동편의 홍동에서 만난 두 분이 600년을 전후한 먼 시기에 변하지 않는 절의를 보여준 인물이라면, 서편의 결성과 갈산에서 만나는 두 분은 지난 20세기 초반에 조국과 백성에 대한 올곧은 사랑을 보여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사와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1889-1930) 장군이다.

만해의 생가는 결성면 용호리고, 백야의 생가는 갈산면 행산리다. 행정구역으론 면이 다르지만 두 분 집 사이의 거리는 채 10리도 안 될 듯이 보였다. 승용차로 10분 거리요, 걸어서도 지름길로 가면 30~40분 정도로 가깝다. 1879년생인 만해는 1889년생인 백야보다 10살 연상이다. 동시대를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 같은 뜻을 지녔던 두 분은 과연 아는 사이였을까? 일설엔 두 분이 수덕사에서 팔씨름도 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두 분의 집이 지척이긴 해도 서로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는 게 정설이다.

집안 환경으로 보면 만해의 집은 가난했고, 백야의 집안은 부자였다. 복원된 생가도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초가집인 한용운 선생의 생가는 그 시절 민초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고, 김좌진 장군 생가는 내포지방 양반 가옥의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결성의 한용운 생가를 찾는다. 누옥 마루엔 심우재(尋牛齋)란 현판이 걸려 있다. 만해가 54살에 지어 65살에 입적할 때까지 살았던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얻어온 이름이다.

만해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여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글을 일찍 깨우치고 영특해서 사람들이 한용운의 집을 신동집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한용운의 집은 서당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8살에 홍주목으로 이사하고, 14살에 천안 전씨 집안의 여자와 혼인했으나 이태 뒤에 집을 떠난다. 18살에 백담사로 출가한 만해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24살에 재입산한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로서, 시인으로서, 대중불교를 전파한 승려로서 큼직한 족적을 남긴 만해의 강직한 언행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만해는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그런데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남당항 갯벌에서 낙지를 잡는 아낙.

이외에도 가깝게 지내던 최남선이 변절하자 그를 장사 지낸 뒤 죽을 때까지 외면했고, 최린, 이광수 등도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온 나라가 절망에 사로잡혀있을 때도 “보라, 겨울이 가면 봄이 오지 않느냐”며 희망을 놓지 않았던 만해. 그러나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5월9일 만해는 심우장에서 66세의 일기로 열반에 들고 말았다. 유해는 미아리에서 화장한 후 망우리에 안장됐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번듯한 기와집이다. 당시엔 인근의 들판이 모두 그 집안 소유의 땅이었다 하니 상당한 부자였던 셈이다. 대문 기둥엔 장군의 이름이 쓰여진 문패도 걸려 있다. 안동김씨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선각자였다. 17세에 집안에서 대대로 부리던 노비 30여 명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주었고, 99칸이나 되는 집을 호명학교(湖明學校) 교사로 내놓고 정작 본인은 초가집으로 나가 살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에 기호흥학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계몽운동만으론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백야는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였는데, 이때 경찰의 습격을 받고 피신하던 자신을 도와준 정계월이란 기생과 인연이 되어 낳은 아들이 김두한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야는 결국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살이를 한 뒤 비밀결사 대한광복단에 가입해 북간도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이 되고, 사관양성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드디어 1920년, 청산리에서 홍범도 장군과 연합해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는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러나 10년 뒤인 1930년 공산당원에게 저격을 당해 순절하고 말았다. 유해는 비밀리에 고국으로 옮겨졌고, 생가와 가까운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됐다가 오서산 서쪽 기슭의 보령 죽림리에 이장됐다.

생가 옆 전시관에 있는 백야의 글씨를 보면 혀를 내두를 만큼 명필이다. 장군은 어려서 서당 공부와 16세에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 뿐 다른 정규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글씨는 어느 문인보다도 뛰어났고 학식 또한 높았다. 현재 생가 주변엔 김좌진 장군의 혈육은 살지 않는다. 다만 생가에서 서쪽으로 20리쯤 떨어진 서부면 어사리 포구에서 김두한의 셋째 부인 김순옥씨(59)가 장군횟집이란 식당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바다로 간다. 홍성의 해안선은 짧다면 짧지만, 천수만을 끼고 있는 덕에 먹을거리가 언제나 넘쳐난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꼽히는 태안반도의 남쪽, 안면도와 충청도 해안선에 안겨있는 천수만은 생명의 원천인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 천혜의 어장으로서 서해에서만 나는 새우의 왕 대하의 대표적인 산란지로 꼽힌다. 여기서 부화한 대하는 몸집을 한껏 키운 뒤 안면도를 돌아 서해 큰바다로 나간다. 따라서 근방에서 가장 큰 어항인 홍성의 남당항은 가을만 되면 대하를 맛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길손이 찾았을 때도 대하를 찾는 사람들로 남당항은 흥청대고 있었다.

▲ 남당한 갯벌. 조개나 낙지 따위의 갯것을 잡는 어민과 망둥어 잡으러 온 도시의 낚시꾼이 어울려 있다.

해안도로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횟집을 기웃거리다가 허름한 간이횟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천수만이 보이는 바다쪽에 앉아 어둠에 잠기는 갯벌을 감상하며 대하를 먹었다. 날것으로 맛보는 생대하도 좋았고, 프라이팬에 올린 왕소금구이도 괜찮았다. 소주 한 잔 입안에 털어 넣고 곁들이는 대하 안주는 정말 최고의 계절 별미였다. 그 맛있는 대하를 정신없이 삼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어려웠던 지난 20세기 초에 올곧은 구국혼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만해 한용운 선사나 백야 김좌진 장군 같은 분이 아니었으면 길손이 오늘 과연 홍성 바닷가에서 이렇게 마음 편하게 대하를 맛볼 수 있을까.

그 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김좌진 장군의 단장지통(斷腸之痛)이란 우국시 한 편으로 내포의 큰 고을인 홍성에서의 가을 나들이를 마무리하려 한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찬데(刀頭風動關山月)

칼끝의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구누나(劍末霜寒故國心)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三千槿域倭何事)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不斷腥塵一掃尋)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