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기자의 시네마 레터]월래스와 그로밋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는 발명가 월래스와 충견 그로밋이 벌이는 갖가지 모험을 다룹니다. 최근 개봉한 ‘월래스와 그로밋:거대토끼의 저주’에서도 둘은 마을의 작물을 망치는 토끼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콤비 플레이를 펼치지요.
그런데 사실 둘은 대등한 파트너라기보다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뒤치다꺼리 해주는 관계에 가깝습니다. 치즈를 너무 좋아해서 우주선을 발명한 뒤 (치즈로 이뤄졌다고 믿는) 달나라에 갈 정도로 엉뚱한 월래스가 온갖 일을 저지르면, 그로밋이 늘 뒷수습을 하니까요. ‘월래스와 그로밋:거대토끼의 저주’에서는 그로밋이 뚱뚱해진 월래스의 다이어트 코치 노릇도 해주지요. 악당 빅터가 월래스에게 총을 쏘자 비행기를 탄 채 몸을 날려 막아내기까지 하고요. 친구도 가족도 없는 월래스에게, 정말이지, 그로밋은 언제나 편을 들어주는 단 하나의 캐릭터인 셈이지요.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그로밋의 신체적 특징입니다. 극중 유독 그로밋의 입만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사실 말이지요. 똑같은 개인데도 빅터가 기르는 필립은 아주 과장된 입과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에겐 입이 없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걸까요. 제작진은 그로밋에게 부여된 ‘온전한 내 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그 ‘조건’이 필요하다고 느낀 건 아닐까요. 좀 위악적으로 말해보지요. 입이 없으니 음식을 축낼 염려가 없습니다. 가끔씩 그의 불평을 들어주는 척 하느라 피곤해질 위험도 없고요. 혹시 너무나 슬퍼하는 날이 와도 소리내어 울 수 없으니 상대는 적당히 어깨만 토닥여 주면 됩니다. 공격적 속성을 상징하는 이빨이 없어서 매사에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이 보장되기도 하지요.
이 영화에는 그로밋이 빅터에게 잡혀 철창에 갇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그로밋은 입이 없는 탓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목놓아 한탄할 수도 없어, 어둠과 침묵 속에서 작은 신음소리만으로 절망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 장면 어딘가에선 그저 ‘온전한 내 편’에 대한 판타지를 원했을 뿐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차갑게 깔릴 것만 같습니다. “가엾긴 하군. 하지만 네 슬픔은 네가 알아서 해. 네가 고통을 느낀다니 마음 아프지만, 그걸로 나를 신경쓰게 만들진 말아줘.”

그로밋은 왜 개로 설정됐을까요. 사람으로 그려졌다면 지나치게 착취적인 관계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이었다면 있을 수 있는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공정성 잣대에 따른 공격을 무화시키는 동시에, 개라는 동물에게서 연상되는 희생과 복종에 대한 기대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사랑이든 우정이든 혈연이든, 사람들은 종종 ‘온전한 내 편’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온전한 그의 편’이 되진 않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 없이 주는 나무’에서 주인공이 오랜 세월 제멋대로 행동해도 그 모두를 묵묵히 감수할 수 있는 대상은 사과나무였지요.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세상과 불화한 과학자 존 내쉬의 모든 것을 받아준 친구 찰스는 존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이었고요. 이 땅에 ‘온전한 내 편’은 없습니다. ‘온전한 내 편’을 갈구하는 삶의 아픔과 그 아픔 속에 웅크린 이기심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