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플라워' 늙어버린 바람둥이 텅 빈 기억을 두드리다

‘브로큰 플라워’(8일 개봉)는 서두에서 소파에 앉은 한 남자를 보여준다. 이어 우편물이 현관에 떨어지자 그는 잠깐 고개를 돌렸다 다시 TV를 바라본다. 그의 무심한 얼굴은 “이 세상에 뭐 그리 놀랄 일이 있겠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관객의 얼을 빼는 극적 사건으로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처음부터 심드렁한 기운이라니! 그런데, 잠깐. 그 얼굴의 주인공이 바로 빌 머레이가 아닌가. 그렇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과거 화려한 여성 편력을 지녔지만 지금은 혼자 사는 돈(빌 머레이)에게 익명의 여자가 쓴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이십년 전 돈과 헤어진 뒤 낳았다는 아들이 지금 그를 찾아 떠났다는 것. 사태 파악을 위해 돈은 그 무렵 자신이 사귄 여자들을 하나씩 찾아다닌다.
무표정으로 말하는 배우들이 있다. 버스터 키튼의 무표정에 비애가 배어 있다면, 빌 머레이 무표정엔 관조가 담겨 있다. 그의 무표정은 덩어리를 이룬 나른함과 쓸쓸함, 미량의 냉소와 체념으로 인수분해되지만, 그게 한 데 합쳐지면 이상스럽게도 초월적 기운이 서린다. 이국 대도시 가라오케에서 락시 뮤직의 노래를 부를 때(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나 사랑하게 된 여인 앞에서 당근을 씹을 때(‘러쉬모어’), 그의 얼굴은 찰나로 스쳐가는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긴 세월의 모든 흔적을 새겨내는 마술을 부렸다. ‘브로큰 플라워’의 ‘늙어버린 바람둥이’ 캐릭터 역시 큰 사건들을 연이어 겪는데도 한결같은 무표정으로 그 모든 격랑을 헤쳐간다. 샤론 스톤, 줄리 델피, 제시카 랭, 틸다 스윈튼 등 상대역을 맡은 여배우들의 다양한 연기가 멋진 밑그림을 이룬다.
올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브로큰 플라워’는 ‘천국보다 낯선’ ‘데드맨’의 미국 독립영화 스타 감독 짐 자무시 작품이지만, 전작들에 비춰보면 놀랄 정도로 대중적인 화술을 지녔다. 조금 느릴 뿐 화법 자체가 친절하며 지적인 유머도 수시로 끼어들어 재미를 더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극이 진행될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비어가는 기이한 영화다. 돈의 여정이 거듭되면서 스토리 전개 자체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고 ‘편지를 보낸 여자는 누굴까’에 대한 최초의 궁금증도 서서히 엷어진다. 편지봉투에서 시작해 가운 리본 꽃 명함까지 시종 반복되는 분홍색 모티브나 인물들 이름을 반복하는 방식에는 깊은 상징이 숨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런 설정은 리듬을 위한 것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종의 트릭에 가깝다. 중첩된 이야기 구조를 선호하는 자무시 영화들에서 깨달음은 결국 진공을 동경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돈의 주위를 돌다가 멈춰선다. 이어 영화에 구두점을 찍는 것은 클로즈업된 빌 머레이 얼굴이다. ‘브로큰 플라워’는 그의 텅 빈 표정이 모든 것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