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안 보고는 못 배길 걸?"
영화 '태풍'의 총력 마케팅에 관객들의 선택권이 위협받고 있다.
크리스마스 휴일과 주말이 겹친 지난 25일, 극장가는 온통 한국형 블록버스터 '태풍'으로 뒤덮였다. '태풍'이 걸린 스크린 수가 약 500여개. 전국의 스크린 수가 1500여개라고 할 때 전체의 3분의 1 가량을 점령한 셈이다. '태풍'이 개봉 2주일째를 맞은 데다 '작업의 정석'과 '파랑주의보' 등 만만치 않은 영화가 새로 개봉됐음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파워였다.
'태풍'의 '점령' 현상은 이 영화의 제작과 배급을 맡은 CJ엔터테인먼트 계열의 CJ CGV 극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심화됐다.
서울에 있는 8개의 CJ CGV 사이트 총 72개관 가운데 40％가 넘는 32개관에서 '태풍'이 걸렸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킹콩'이 19개관(26％), 갓 개봉된 '작업의 정석'과 '파랑주의보'가 각각 1개 사이트 당 1개관씩 8개관(11％)으로 구색을 맞춘 것에 비교하면 지나친 편중이다. 때문에 그밖의 영화들은 상영관을 잡아도 상영횟수가 아주 적거나 일찌감치 간판을 내려야 했다.
보통 영화의 흥행 성패는 개봉 첫 주의 성적에 영향을 받고 입소문으로 확산된다. 관객동원 지표가 그대로 작품의 완성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아서 '입장객이 200~300만명이 넘으면' 영화에 관심이 없던 관객들도 주목하게 된다. 500만명을 돌파하면 '한번쯤 봐야할' 영화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관객동원에 보다 정확한 집계가 요구되는 이유다.
하지만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자연스런 확대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배급사의 강력한 마케팅이 개입되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한 주 동안의 상영 스크린 수와 관객동원 수, 그리고 예매점유율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해답이 엿보인다.
500여개 스크린에 걸린 '태풍'은 지난 한 주 동안 약 145만명이 입장했다. 또 350개를 확보한 '작업의 정석'은 약 100만명, 375개의 '킹콩'은 115만명이 넘었다. 이를 스크린 당 입장객 수로 환산하면 대략 2900~3000명. 평균 성적은 엇비슷하지만 '많이 걸릴수록 많이 봤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 관객동원과 일치하지 않는 인터넷 예매율도 비밀을 푸는 열쇠다.
티켓 예매 사이트인 인터파크(www.interpark.com)에 따르면, 이날 예매율 1위는 '킹콩'(37.7％)이 차지했다. 뒤를 이어 '작업의 정석'이 21％로 2위, '태풍'은 20.5％로 3위에 그쳤다.
국내 영화 전문 사이트인 맥스무비(www.maxmovie.com)의 예매점유율에서도 '태풍'은 24.51％로 2위에 머물렀다. 1위는 38.31％의 '킹콩'이었다.
이는 결국 '현장판매'라는 변수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아직은 예매보다는 현장판매 비율이 높다는 게 영화계의 분석. 그렇다면 영화를 보러간 관객들이 애초의 선택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많은 스크린에 걸려 접근이 쉬운 작품을 선택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영화 관련 사이트의 한 네티즌은 "지난 주말에 '작업의 정석'을 보러 갔다가 이미 매진돼 있어서 할 수 없이 '태풍'을 보고 왔다. 온통 '태풍' 뿐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꼬집었다.
다른 네티즌은 "배급사가 영화의 흥행을 좌우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프랑스 멀티플렉스 극장에선 한 영화가 두개 이상의 스크린을 못 가져가도록 배급사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런 게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태풍'은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순제작비만 150억원, 프린트를 포함한 마케팅 비용에도 40억원이나 들어갔다. 영화계에서 하는 방법으로 대충 계산하더라도 손익분기점이 600만명 이상이다. 총력 마케팅의 이유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CJ엔터테인먼트는 국내 1위의 투자, 배급사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올해 누적 관객동원에서 라이벌 배급사인 쇼박스에 500만명 이상 뒤지는 성적을 기록했다. 오직 '태풍'만이 막판 뒤집기의 '히든카드'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의 판단은 늘 관객의 몫이다. 출중한 스타, 엄청난 제작비, 남북 분단의 소재가 관객을 끌어들일 것이라는 정형화된 흥행 공식은 이제 접어야 한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보는 재미'야말로 관객들이 누릴 수 있는 최후의 권리다.
(스포츠조선 김인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