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장식하는 한국영화 걸작 2편

◆ 스펙터클과 드라마가 제대로 만난 '청연' 흡인력 강한 드라마에 비해 볼거리는 보잘것없었다거나, 압도적인 스펙터클에 못미치는 헐거운 플롯으로 관객을 실망시켰던 충무로 대작영화의 슬픈 기억은, ‘청연’(29일 개봉)을 통해 상당 부분 잊혀질 것 같다. 대의명분보다는 꿈을 위해 살았던 여인의 비상과 추락은, 수천 미터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이내 곤두박질한 복엽기(複葉機)의 포물선과 고스란히 포개진다. ‘청연’이 선사하는 비극의 스펙터클은 의외로 깊고 넓은 파문을 스크린에 일으킨다.
밤에는 택시운전사로 낮에는 비행학교 생도로 주경야독하는 박경원(장진영)의 소망은 최고의 여류 비행사. “조선인과 일본인,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는 하늘이 가장 좋다”는 그녀에게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거창한 독립운동의 의지도, 아늑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소박한 욕심도 뒷전이다.
데뷔작 ‘소름’으로 평단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던 윤종찬 감독은, 무려 10배의 제작비(약 100억원)를 들인 블록버스터에서도 특유의 집요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화려한 이미지의 강박 탓에 인간을 뒤로 미뤘던 선배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경원이라는 캐릭터에 피를 채우고 ‘청연’의 드라마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는다. 경원을 사랑하는 부잣집 아들 한지혁(김주혁)이나 라이벌이자 친구인 일본인 여류 조종사 기베(유민)의 캐릭터도 마찬가지. 식민지의 딸로서의 ‘영웅담’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굴곡 많은 삶을 살고 있는 허약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전 일본 비행대회에서 박경원의 비행기가 구름 위로 치솟았다 내려오며 360도 대회전하는 영화 중반 경주 장면과,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폭우를 무릅쓰고 산맥을 넘으려는 마지막 비행 장면은 ‘청연’의 백미. CG의 최전선을 확인하는 순간이면서, “스펙터클에 드라마를 입힌다”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예민한 시대를 다룬 영화, ‘청연’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범벅으로 섞여 있다. 박경원을 ‘친일파’로 보고 싶은 관객에게도, ‘시대의 희생자’로 보고 싶은 관객에게도, 감독은 만족을 주지 않는다. 아니, 제발 그런 양분된 이데올로기의 주박(呪縛)에서 벗어날 것을 갈망한다. 마치 박경원 고향 하늘을 가로지르던 푸른 제비(靑燕)의 활공처럼.

◆ 주체하기 힘든 에너지가 넘치는 '왕의 남자' ‘왕의 남자’(29일 개봉)에서 확인하는 것은 주체하기 힘든 에너지다. 미천한 광대가 하늘 아래 최고 권력인 임금을 쥐락펴락할 때의 카타르시스, 천길 낭떠러지 같은 외줄 위에서 공중제비를 넘을 때의 짜릿함, 같은 성(性)과 다른 성에 대해 느끼는 질투와 매혹이 터질듯한 긴장감과 함께 시각화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한국 사극영화에서 쉽게 만나지 못했던 예외적인 경험이다.
‘왕의 남자’가 비틀어 놓은 시공은 연산군 시절의 조선. 전작 ‘황산벌’에서 삼국시대 해학극의 한 진경(珍景)을 보여줬던 이준익 감독은, 이번에는 폭정(暴政)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연산군을 클로즈업한 뒤 ‘한판 뒤집기’ 난장(亂場)을 펼친다.
친숙한 역사를 희롱하고, 지엄한 왕권을 조롱하는 이 풍자의 한마당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광대 장생(감우성). 매 끼니를 걱정할 만큼 비참한 신분이지만 놀이판에서만큼은 왕 부럽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동료 공길(이준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온 그는 곧 저잣거리의 명물로 떠오르고, 권력 암투와 음모에 지친 왕(정진영)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던 내시 처선(장항선)은 꾀를 낸다. “왕을 웃기라”는 특명을 이들에게 내린 것. 장생은 어전(御前)에서 왕과 녹수(강성연)의 애정행각을 겁없이 능멸하지만 연산은 예상외로 파안대소하고, 장생 패거리는 ‘궁중 광대’로 신분 상승을 이룬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높으신 분’을 조롱하는 한판 놀이를 펼칠 때마다 신하들은 떼로 죽어나가고, 장생은 공길을 별도로 부르는 왕의 욕망에 점점 진저리를 친다.
지면과 수직을 이룬 카메라가 잡아내는 줄타기의 아슬아슬함이나 ‘패왕별희’를 연상시키는 경극의 화려함 등 시각적 쾌락도 상당하지만, ‘왕의 남자’ 매력의 뿌리는 감우성과 정진영, 그리고 신인 이준기가 함께 빚어내는 연기의 앙상블이다. 차갑고 예민한 남자로만 남아있던 감우성이 폭발할 것 같은 광대의 에너지를 뿜어낼 때, 평소 이죽거리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던 정진영의 목소리가 연산군의 입을 통해 기막히게 어울리는 발성을 보여줄 때, 희뿌연 목덜미를 가진 수줍은 이준기가 동성애를 넘어서는 매력으로 광대와 임금 사이에서 수축하고 팽창할 때, ‘왕의 남자’의 에너지는 마치 지남철처럼 관객을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