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놓치다- 설경구] 눈에 힘 좀 뺐는데…

설경구와 삼청동을 걸었다. 행인들의 입에선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고, 그의 입과 몸에선 전날 밤 들이부었다는 알코올이 뿜어져 나왔다. 혼잣말처럼 “최근 몇 년은 너무 크고, 너무 세고, 너무 눈 부라리는 영화만 찍어온 것 같다”고 내뱉는다. 멜로 ‘사랑을 놓치다’(26일 개봉)를 선택한 이유에 대한 무뚝뚝한 답변. 문득 ‘실미도’ ‘역도산’ ‘공공의 적2’에서 보여줬던 육중한 존재감이 스친다. 그는 “사실 산다는 게 늘 클라이맥스가 있고, 반전이 있는 건 아니잖느냐”면서 “주인공 둘 중 하나가 죽지 않고, 영화적이라기보다 일상적인, 그런 아담한 멜로를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사랑을 놓치다’에서 그는 언제나 사랑을 놓친다. 대학 동기 연수(송윤아)와 10년을 아옹다옹하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이 사랑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시선은 늘 어긋나고, 마침내 확신이 들었을 때는 그녀가 떠났다. 빛의 속도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2006년에 이런 아날로그 연애라니. 68년생 원숭이띠인 그가 “우리 시절 이야기”라며 실쭉 웃는다. “사랑하는데도 말 못하고, 속앓이 하다가 소주 퍼먹고, 다시 처음부터 되돌이표 찍던” 수줍었던 연애.
한양대 연극영화과 1학년을 마치고 그는 전방으로 군대를 갔다. “학교 CC(캠퍼스 커플)였는데, 깨지고 나니 도저히 학교에 나갈 수가 없더라”고 했다. 한 학기만 더 다녔으면 복무일수 45일 감축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는데, 매일 봐야 할 헤어진 연인은 군대보다 무서웠다.

두 번째 사랑도 놓쳤다. “믿지 않겠지만” 이라는 전제를 달더니, 첫 번째 사랑이 깨진 뒤 생각지도 않았던 후배에게서 연애편지를 받았다. 편지와 꽃다발은 자대(自隊)였던 전곡까지 쫓아왔다. 얼굴 본 기억도 몇 번 안 되는 신입생. 그는 친구에게 부탁했다. 친구가 그녀에게 말했다. “다시는 경구에게 연락하지 말아라.”
‘사랑을 놓치다’에서 그의 투박한 연기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마침내 연수와 잠자리를 함께 한 당일이 아니라, 그 다음 날이다. 사랑의 시작이라며 달떠 있는 연수에게 그는 더듬거리며 말한다. “미·안·하·다.” 스스로의 감정에 100%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과 상대방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포갰다는 데 대한 불안감. 하지만 이 섬세한 감정의 표현은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게는 요령부득의 대목이기도 했다.

모니터 시사회 후 가진 설문조사에서 “왜 미안해야 하죠?”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고 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세대의 간극. 대학로에서 시작해 장선우 감독의 ‘꽃잎’으로 충무로로 건너온 지 10년. 설경구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깊게 새긴 ‘박하사탕’의 김영호는 물론, 단역까지 포함하면 그가 스크린에서 보여준 인물은 벌써 열여섯 명에 달한다.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주는 몇 안 되는 배우지만, 연기 한계에 대한 돌파구는 스스로도 고민이다.
그는 “요즘은 소리만 조금 질러도, ‘박하사탕’의 영호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온다”면서 “아무리 다른 모습을 보이려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재료는 나 아니냐”고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진심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잔인하지만, “그건 자기 합리화 아니냐”고 또 물었다. 너털웃음을 짓더니 설경구는 “그래서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만 쓰려고 하는 감독들이 가장 밉다”면서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해 주는 감독님이 가장 고맙다”고 했다.
찻집에 앉은 그가 얼음이 듬뿍 담긴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서울의 아침 기온이 영하 9도를 기록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