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 드 히미코' 아빠의 동성 애인에게 묘한 이끌림

아무리 과감하게 타오른 불도 결국 재로 남는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저녁, 한 줄기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재마저 어지러이 허공을 떠돈다. 아무 것도 막을 수 없을 때, 주저앉아 땅을 치기는 쉽다. 그러나 ‘메종 드 히미코’(26일 개봉)는 기어이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채 밤을 맞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옆에 서 있다가 그 재를 뒤집어쓰고서 살아가야 하는 또다른 사람들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 전 가족을 버리고 떠나간 게이 아버지 히미코(다나카 민)를 증오하는 사오리(시바사키 코우)에게 어느날 하루히코(오다기리 죠)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젊은 동성애 애인 하루히코는 히미코가 불치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간병을 부탁한다. 유산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에 사오리는 증오를 누르고 아버지가 만든 게이 실버타운 ‘메종 드 히미코’로 간다.
이 작품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눈밝은 국내 관객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일본 감독 이누도 잇신의 신작. 그의 재능 중에서 가장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 감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을 생생하게 건져올릴 줄 아는 능력이다. 극적인 일이 발생하는 지점 자체에서는 절제하다가, 정작 그 사건이 다 흘러간 듯 보일 때 인물들 가슴 속에서 불현듯 내출혈이 일어나는 순간을 집어내는 그의 손길은 쓸쓸하고도 따스하다. 마음이란 언제나 여진(餘震)에 흔들린다.
‘조제…’에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이누도 잇신은 여기서 다시금 소외된 사람들의 사랑에 주목했다. 게이 공동체를 이상화하지도 조소하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택했지만, 그 속에 담긴 온기는 관객들 가슴을 데우기에 부족하지 않다. 사오리는 극 초반 늙은 동성애자들이 젊은 남성을 성적으로 희롱할 때 혐오 가득한 눈길을 보낸다. 그러던 그녀가 자신의 ‘취향’을 선택한 댓가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의 그늘을 목도하며 마음 속 빗장을 풀어가는 과정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 대부분의 심리 변화에 그대로 겹칠 것 같다.
매 시퀀스마다 어느 정도까지 관계를 진전시켜야 하고 어디서 구두점을 찍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연출 덕분에 장면장면 배우들 감정선이 생생하다. 오다기리 죠의 멋지게 이상화된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연기적 측면에서 이 작품은 결국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에 고된 생활의 흔적과 혼란스런 사랑의 궤적을 그대로 담아낸 시바사키 코우의 영화다.
언뜻 하루히코와 사오리의 기묘한 사랑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극중에서 정말로 진진한 것은 사오리와 히미코의 관계다. 하늘이 맺어준 부녀 사이에 수십년 증오 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손쉽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잠깐 꿈틀대는 감정의 격랑을 예민하게 스케치함으로써 화해의 가능성 자체를 희망으로 남겨놓는 성숙한 손길은 ‘메종 드 히미코’가 줄 수 있는 감동의 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