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혜의 유행유감] 톡톡 튀는 감초연기로 주연까지

지난 연말 “60여명의 스탭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나는 그냥 먹기만 한다”고 했던 황정민의 감동적인 수상소감이 인구에 회자됐었다. 그 남자의 그렁그렁한 눈빛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았던 사람이 아마 없었을 듯. 처음부터 주연으로 급부상해 화제를 몰았다가 어느 순간 눈에서 멀어지는 반짝스타도 부지기수지만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고생을 많이 하다가 주연배우로 거듭나는 배우들 중에는 이른바 초심을 잃지 않는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많다. 송강호의 ‘넘버3’, 최민식의 ‘조용한 가족’, 설경구의 ‘송어’, 정재영의 ‘실미도’, 황정민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그들은 그때 분명히 최고의 조연배우였고 새로운 물결을 예고했으며 지금은 대한민국 영화계의 주인공 후보에 이름을 당당히 올리는 배우들이 되어 있다. 그들은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체험자들이며 우리가 좋아하고 때론 존경하는 인물이 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공공의 적’의 이문식이 ‘형사 공필두’로 나섰고 ‘달마야 놀자’의 김수로가 ‘흡혈형사 나도열’로 시작했으며 ‘손님은 왕이다’에서 성지루는 비밀스런 이발사로 남모르게 면도날을 갈며 그 뒤를 잇기 시작했다.
연륜과 경험으로 주조연을 넘나드는 백윤식, 김수미의 활약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압권이다.
자기만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영화를 장악하는 주연의 무게감도 중요하지만 꼭 필요한 캐릭터를 짧은 장면만으로 표현해주고 영화의 색깔을 만들어내 주던 그들의 감칠맛 연기.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는 지금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행이 도는 만큼 인기도 돌지만 그들이 선물했던 조연배우 시절의 강렬한 연기와 이미지들을 많은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승승장구에 여러 가지 의미를 두고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
이제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배우들의 물갈이 또한 빨라져서 박철민, 탁재훈, 현영 등 새로운 막강 조연군단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언젠가는 주인공이 되는 날을 향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언젠가 이문식이 사석에서 “마파도 이후 내가 주연만 하는 줄 알고 시나리오가 한동안 안 들어 왔어요”라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한번 주연하면 영원한 주연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묻자 그는 “아니 평생 배우할건데 좋은 배역 있으면 해야지. 내가 맨날 무슨 주연 이에요?” 라며 화들짝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우 주연’에 등록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역할들은 서운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 경험해야 할 지도 모른다. 우리 영화계는 왜 주연이 되면 다신 조연을 연기하지 않을 거란 고정관념이 생겼을까.
전세계를 상대로 팬을 확보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대배우들이 간혹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고 신인감독과의 호흡으로 이뤄낸 성과를 들으면서 부러웠던 적이 있다. 다양성으로 말하면 우리의 영화시장도 할리우드를 능가한다. 이제 한국 최고의 주연배우들이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조연연기에도 도전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으면 하는 욕심이 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자이며 외모와 연기력과 품성까지 삼박자의 균형을 갖춘 장동건이 언젠가 ‘해안선’에 출연했을 때, 독특한 이미지와 탁월한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여배우인 강혜정이 ‘웰컴투 동막골’로 여우조연상을 당당하게 수상했을 때,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며 영화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국민배우 안성기를 떠올릴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영화를 선택하는 그들의 ‘남다른 기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분량이나 비중, 개런티와 아우라, 한번 주연은 조연으로 내려갈 수 없다는 생각 이런 것들에서 살짝 벗어난다면 좀더 다양하고 즐거운 영화 보기가 되지 않을까.
(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 blog.chosun.com/amsaj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