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적 이창호·최철한 투지에 벌써부터 온몸이 짜릿"

나는 바둑판이로소이다. 유서 깊은 타이틀전 가운데 내 등 위에서 벌어지지 않은 바둑이 없었지요. 국내 최고(最古) 역사의 국수전이 올해로 49회째를 맞아 25일부터 도전 5번기에 들어간답니다. 국수전 반세기의 역사는 바로 국내 바둑계 1인자 계보의 역사였습니다. 올해는 또 누가 영예의 국수에 오를지 벌써부터 온 몸이 짜릿짜릿합니다.
이번에 내 등을 함께 긁어줄 기사는 국수 최철한(21) 九단과 도전자 이창호(31) 九단입니다. 최철한에게 국수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첫 타이틀은 천원(2003년)이었지만, 당대의 1인자 이창호를 맞상대해 정상을 밟은 첫 무대가 2004년 47기 국수전이었기 때문이죠. 최철한은 그 여세를 몰아 기성전서도 이창호를 꺾고 타이틀을 보탠 뒤 세계로 도약했습니다.
반대로 이창호로선 최철한과 국수전을 잊을 수 없을 거외다. 지난해 48기 도전권을 따내 리턴 매치에 나섰으나 뜻밖에 0대3이란 치욕적 스코어로 패퇴했거든요. 47기 무렵만 해도 부동의 1인자였던 이창호는 어느새 ‘신 4천왕’의 일원으로 한발 물러나 있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최철한이고 무대는 국수전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이창호가 절치부심 끝에 또 다른 숙적 이세돌을 연파하고 기어이 또 한번 도전기 무대에 섰군요. 최철한과의 국수 쟁패는 이로써 연속 3년째입니다. 이창호가 스승 조훈현과 33기부터 40기까지 8년 연속 국수를 다투던 시절이 떠오르는구려. 이럴 때면 대국자들의 투지가 담긴 돌들이 사정없이 내려 찍히면서 나는 멍투성이가 됩니다. 10시간씩 엎드린 채 난타당하다 보면 아무리 나무로 만든 몸이라지만 당할 장사가 없더이다.

한국기원이 발표한 지난해 종합 랭킹은 이창호 1위, 최철한 2위인데 올해 1월 랭킹은 최철한 1위, 이창호 2위더군요. 국내 타이틀 수는 이창호가 4개로 최철한의 2배입니다. 하지만 둘 간의 통산 전적에선 최철한이 15승 13패로 다시 역전시켰다지요? 박영훈 이세돌 등 소위 ‘신 4천왕’ 멤버 중 이창호가 5할 밑 승률을 기록 중인 상대는 최철한이 유일하더이다.
나는 대국자의 마음을 읽을 줄 압니다. 수천, 수만개의 돌을 받아내면서 독심술을 익힌 거죠. 최철한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이창호 파괴법만 터득했다”는 세간의 비아냥입니다. 이창호에게만 유독 강하다는 뜻인데, 그는 이번 방어전서 성공한 뒤 다른 대회서도 힘을 보여주겠다고 단단히 다짐 중입니다. 이창호는 두 달 전 끝난 GS칼텍스배 결승(최철한에게 2연승 후 3연패)을 못 잊고 있어요. 이번 대결이 기사생활의 분수령이란 각오로 결전을 준비 중이죠.
반세기 국수전 역사에서 한 번이라도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기사는 단 9명뿐입니다. 그 적통(嫡統)이 이미 최철한 대(代)로 넘어간 것인지, 아직은 이창호의 시대가 저물지 않았음을 보여줄 것인지 지켜볼 일만 남았습니다. 내 오랜 동료인 흑백 돌들도 마음이 들떠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군요. 대국자들의 심장 박동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