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꽃' 누굴 위한 환상인가

‘게이샤의 추억’

‘게이샤의 추억’(2일 개봉) 후반에는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몰락한 일본인 사업가 노부는 은거하던 게이샤 사유리를 찾아가 재기의 발판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미국인 투자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미인계가 필요하다는 것. 이어진 장면에서 사유리와 일본 사업가들은 미국인과 어울려 자유롭게 영어로 대화한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사유리가 언제 영어를 배운 걸까.
이런 상황이 아무 설명 없이 자연스레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직전까지 일본을 무대로 일본인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가 내내 영어 대사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게이샤 역을 맡은 여자 배우들은 모두 중국인이고 상대역 남자 배우들은 모조리 일본인이며 만든 사람들은 미국인인 이 영어 영화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환상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일까.
교토의 게이샤 거리로 팔려간 어린 소녀의 수십 년에 걸친 사랑과 운명을 다룬 ‘게이샤의 추억’은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는 아시아 배우 캐스팅을 자랑한다. 장쯔이 공리 양자경 등 중국 최고 여자 배우들에 야쿠쇼 코지와 와타나베 켄 등 일본을 대표하는 남자 배우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롭 마샬(‘시카고’)이 연출하는 할리우드 대작이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이 작품은 흠 잡을 데 없이 매끈하다. 장쯔이가 게이샤 세계에 입문하며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는 장면처럼 휘황한 볼거리들도 제법 많다.
문제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판타지의 내용이다. 게이샤에 대한 이국적이고도 성적인 판타지와 한 남자에게만 순종을 바치는 일본 여자에 대한 환상이 스모 경기와 야외 혼욕 온천 풍경을 곁들여가며 144분 러닝타임 동안 지겹도록 되풀이된다. 서양 남성 관객의 은밀한 욕망을 겨냥해 만든 ‘게이샤의 추억’은 몽롱한 눈과 능숙한 손 그리고 이미 나 있는 길만 따라 걷는 발로 만든 영화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거론하기조차 민망하지만, 이 영화를 지탱하는 세가지 이데올로기를 지적하지 않을 순 없다. 그것은 오리엔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