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舞飛 딴 생각] 디테일의 美學

어떤 영화를 잊지 못한다는 건, 그 영화의 한 장면에 대한 개인적이면서도 과도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애정은 아주 사소한 그 무엇에서 유발되며, 잘 연출된 디테일만큼 관객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건 많지 않다. 디테일의 즐거움. 어쩌면 이것은 영화 보기의 즐거움과 동의어일지도 모르며 최근 한국영화의 승승장구 이면엔 잘 만들어진 디테일의 충실함이 있었다. 디테일은 흘러간 그 무엇을 떠올리게 한다. ‘나이스’라는 짝퉁 마크를(살인의 추억), ‘Bambina’가 흘러나오는 롤라장(품행제로)을 보며, 우린 자연스럽게 1980년대를 떠올린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종이 마개가 덮인 우유병이 정겨운 건 아직도 그 고소한 우유 맛을 아직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복고주의 컨셉의 영화가 아니더라도, 70~80년대를 다룬 영화들엔 반드시 노스탤지어 아이템이 한두 개씩은 있기 마련이다.
디테일은 착각을 일으킨다. 특히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에 파고들어 그 디테일을 살려줄 때, 우린 잠시나마 그 배우의 전직을 의심한다. 전형성이 강한 직업일 경우 더욱 그렇다. 형사 캐릭터가 대표적인데, 기주봉이나 장항선 혹은 천호진이 형사로 등장해서 애드립인지 대사인지 구분 안 가는 대사를 툭툭 던지며 수사를 진행시키는 걸 보면, 디테일이 캐릭터에 미치는 힘을 새삼 깨닫는다.

멜로에서 디테일은 특정제품과 결합하기도 한다. ‘광식이 동생 광태’의 스테플러 심은, 그것이 ‘평화’공업사 제품이라는 사실과, 광식이가 학교 다닐 때 소외당한 여학생들을 전담했던 ‘평화’유지군이었다는 과거와, 화면에 흐르는 ‘For the Peace of All Mankind’라는 노래와 결합해 디테일의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10년 간 뭉기적댔던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랑을 놓치다’에선 88에서 This로, This에서 Time으로 바뀌는 담배가 시간의 흐름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불후의 명작’에선 바나나우유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선 야쿠르트가 사랑의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했다.

디테일이 유발하는 웃음은 한 템포 늦다. 하지만 그 여운은 오래 간다. ‘넘버 3’의 킬러 송강호의 가방에 칼과 함께 들어 있던, 라면 반쪽과 반찬통 그리고 숱한 업소용 라이터는 이 영화를 서너 번 봤을 때 발견할 수 있는 선물 같은 디테일이다. ‘투캅스’를 두 번째 봤을 때는, 안성기가 아내와 미키마우스 잠옷을 커플룩으로 입고 있는 장면 때문에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웃을 수 있었다. ‘투사부일체’에선 정준호와 정운택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에서 아무 대사도 없이 배경처럼 존재했던 정웅인의 표정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디테일은 영화에 방점을 찍는다. ‘디테일의 제왕’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디테일 종합선물 세트’같은 영화다. 취조당한 박상면의 얼굴에 선명히 새겨진 신발 자국, 잠복중인 박중훈과 장동건 머리 위에 동동 떠 있던 설렁탕, 서서히 옆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에 잡히는 경찰서 내부의 풍경 등은 이명세 감독의 어떤 집착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주얼은, 스타일리시한 액션이나 공들인 미술보다도, 범인 안성기를 기다리는 형사 박중훈의 발등 위에 떨어진 땀 한 방울일 것이다.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그 땀 한방울은 얼굴에서 콧잔등을 거쳐 맨발 위로 톡 떨어지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든다.
디테일은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만든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필자가 ‘왕의 남자’를 한 번 더 본 건 인형 때문이었다. 손 인형과 종이 인형으로 공길이 빚어내는 퍼포먼스의 아름다움! 이준익 감독이 직접 만들었다는 그 작은 인형들이 주는 디테일의 감동은 그 어떤 규모의 스펙터클보다도 더 강렬했다. 영화의 크기와 부피를 넘어서는 핵심적인 비주얼. 바로 그것이 디테일이다.
(월간 ‘스크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