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흩날리는 베를린, 거리에 수북하게 쌓인 눈이 회색빛 건물들을 더 우울하게 만들지만 제5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주요 행사장이 위치한 포츠담 스퀘어엔 열기가 넘쳐났다.
메인 행사장인 팔레스트 앞을 점령한 세계 각지에서 달려온 영화인들. 눈을 반짝이며 전날 본 영화에 대한 평을 쏟아내고 있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높아진 한국영화의 위상을 절로 실감하게 된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온 영화 제작자 겸 배급업자인 호라시오 우반. "박찬욱 감독의 열성팬"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밝힌 그는 "이번 필름 마켓에서 좋은 한국영화를 건지려 왔다"며 기자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스페인에선 해마다 1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지만 흥행 수익을 만들어내는 영화는 다섯 손가락을 넘기 힘들다는 것. "영화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흥행 신기록을 만들어가는 한국영화의 현실이 부럽다"며 "내로라하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쓰는 등 작품성과 대중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한국의 스크린쿼터에 대해 처음 듣는다는 그는 최근 한국정부가 축소 방침을 결정했다는 이야기에 "어찌 보면 오늘날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케 한 제도일 텐데, 너무 빨리 안전장치를 떼는 것 아니냐. 한국영화인들 입장에선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벨기에 출신 프로듀서인 안드레 조메리아트 또한 스크린쿼터에 대해선 동일 입장. "벨기에는 매해 정부나 유관단체에서 기금을 조성해 영화 산업 발전을 도모한다"고 밝힌 그는 "그러나 아무리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더라도 관객과 만나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 아니겠냐"면서 "스크린쿼터 같은 좋은 제도를 축소하려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자기 집에 불난 것처럼 흥분하는 그들을 보니 서울 광화문에서 연일 칼바람과 싸워가며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한국 영화인들의 싸움이 결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님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베를린 현지에서 유력 언론과 인터뷰 등을 앞두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힘찬 발언이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스포츠조선 베를린[독일] 전상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