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 재일조선인의 좌충우돌 성장기 속으로

재일조선인은 굴곡 많은 한국 근현대사에 깊게 패인 환부(患部)다. 상처가 아린 탓일까, 그간 한국에서 이들을 다룬 예술적 접근은 한결같이 부채의식에서 출발해 엄숙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일본에서 키네마준보 베스트영화, 아사히신문 베스트영화 등에 선정되면서 호평받은 일본 영화 ‘박치기’(14일 개봉)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런 감상(感傷)적 접근 방식을 정면 가격한다. 이념을 들이대 젠체하지도, 뒷짐지고 무게 잡지도 않으면서 모순투성이 사회를 맹공하는 법을 보기 좋게 한 수 가르쳐주는 수작이다. 박치기의 한글 발음을 그대로 딴 원제 ‘パッチギ’가 말해주듯 이 영화는 재일조선인,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다. 때는 프랑스의 68혁명, 프라하의 봄, 베트남전, 김신조 사건 등 전세계가 대격변의 풍랑에 휩싸였던 1968년. 교토의 히가시고와 조선고 학생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질이다. 히가시고에 다니는 코우스케(시오야 슈운)는 선생님의 명령을 받고 조선고에 친선축구대회를 제안하러 간다. 그곳에서 코우스케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경자(사와지리 에리카)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녀와 소통하기 위해 한글을 익히고, 금지곡인 ‘임진강’ 연주까지 배운다. 그러나 코우스케(康介)가 한국식으로 ‘강개’라고 불릴만큼 둘 사이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선고 학생 재덕이 일본 학생과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자유와 평화, 혁명과 전쟁이라는 거대 담론들을 속속들이 훑어나가지만, 현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는 시선 덕에 지루하지도, 무겁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흑막에 가려진 어두운 개인을 들춰내는 게 아니라, 좌충우돌하는 개인의 일상 속에 이념을 투영한 감독의 전략 덕이다. ‘박치기’는 분명 일본 감독과 일본 배우가 만든 일본영화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 생생하게 담겨있는 재일조선인 사회의 디테일은, 때로 한국 관객을 위해 만든 ‘좌우 양 날개를 단 역사 교과서’ 같은 느낌마저 준다. 남한에서는 그 존재조차 몰랐던 북한 노래 ‘임진강’이 주인공의 사랑의 매개이자, 영화의 중요한 모티프로 쓰였고, 대사 한 줄 한 줄 역사가 촘촘히 박혀있다. 재일교포 제작자 이봉우(씨네콰논)씨가 제작을 담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는 일정한 사실성을 담보하지만, 걸작을 탄생시킨 가장 큰 원동력은 이즈쓰 키즈유키 감독의 용기같다. 1981년 데뷔작 ‘아이들의 제국’에서부터 줄곧 재일조선인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져온 이즈쓰 감독은 “이 쪽발이 새끼야” 같은 한국어 대사를 젊은 일본 배우의 입을 통해 내뱉으면서 일본의 폐부를 찌르는 시도도 주저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즈쓰 감독이 날린 박치기에 얼얼해진 이마를 문지르며 자리를 뜨는 길, 그에게 왠지 오랜 부채를 떠넘긴 듯한 마음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