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 서생' 조선 선비의 유쾌한 야설?예술?魂

특정 작품을 전개 과정에 따라 서너 부분으로 나눠 거론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 편의 영화는 그 자체의 리듬과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일종의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과 중반 그리고 후반으로 구분하면, 바로 그 미학적 공과가 정답처럼 도출되는 ‘음란서생’을 다른 방식으로 평하기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연단에 처음 오른 뒤 긴장해 더듬거리다가 곧 자신의 능력을 살려 청산유수로 청중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지만, 이후 과욕으로 다른 주제를 덧붙이던 끝에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내려서는 연사를 보는 것 같다.
당대 최고 문장가인 윤서(한석규)는 그림 위조 사건을 수사하다 은밀히 유통되는 음란소설을 보게 된다.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직접 음란소설 쓰기에 매달리는 윤서는 악명 높은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에게 삽화를 의뢰한다. 왕(안내상)의 총애를 받는 정빈(김민정)이 윤서에게 매력을 느껴 다가오자 윤서는 그녀와의 이야기를 소설 소재로 활용해나간다.

이 영화 중반은 이제껏 충무로에서 보기 힘들었던 종류의 신선한 유머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인터넷 댓글에서 룸살롱 모습까지 현대의 풍속을 사극 상황으로 바꿔 표현한 재치가 빛을 발하고, ‘왕의 남자’가 그랬듯 음담패설을 하면서도 세련된 포장으로 품위를 잃지 않는 화술이 뛰어나다. 은밀한 글쓰기에 매혹된 윤서가 마감에 쫓기면서도 반응을 궁금해 하는 장면엔 일급 시나리오 작가로 오랜 기간 활동했던 김대우 감독의 자의식이 생생히 투영되어 있다.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글쓰기 열정에 휩싸여 흥분된 나날을 보내는 윤서의 모습을 행복하게 스케치하는 이 영화는 창작 작업 자체에 대한 감독 자신의 열렬한 러브 레터이다.
‘퀼스’ ‘스위밍 풀’ ‘원초적 본능’처럼 작가가 스스로의 경험을 창작에 직접 녹여 넣는 과정을 재치있게 다룬 영화를 충무로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재기와 생기로 번뜩이는 ‘음란서생’은 흥미로운 ‘예술가 영화’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몸에 꼭 맞는 배역을 맡은 한석규는 느릿느릿 의뭉스런 말투 속에 사대부의 권태와 음란소설 작가의 욕망을 함께 녹여내며 호연했다. 등장하는 장면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오달수(음란서적 배포업자)의 연기가 뛰어나고 극 전반에 안정감을 부여한 김기현(음란서적 필사꾼)도 좋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관객이 리듬을 잃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통일된 분위기 조성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본 궤도에 진입하기까지 어수선하고 비효율적인 전개를 보이는 초반도 그렇지만, 그때까지 구축한 코미디의 활력을 버리고 핏기 없는 멜로로 선회한 후반이 더욱 아쉽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 아니더냐”라며 탄식하는 왕의 대사는 더없이 낭만적이고, 삶 전체를 내던지는 정빈의 감정은 격랑으로 요동치지만, 육화되지 않은 사랑의 언어들은 스크린 위를 공허하게 떠돈다. 한석규와 김민정이 서로 절절히 사랑하는 사이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약점. 느닷없는 액션 시퀀스나 지나치게 잔혹한 몇몇 장면 묘사도 극에 불필요한 굴곡을 만들면서 일관된 정조(情調) 형성에 장애가 된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얘기를 내버려두고 왜 통념을 좇아 엉뚱한 데서 클라이맥스를 빚으려 했을까. 리듬은 결국 하나의 창작품을 만들 때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왕의 남자’ 이후 사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적기에 개봉하는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은 차기작에 기대를 걸게 하는 미완의 대어다.